〈 16화 〉04. 가치 없는 것, 가치 있는 것 (2)
전해의 군 1만과 유비의 군 5천이 대치한다.
군의 전력은 저쪽이 위라고는 해도, 이쪽의 전투력이 밀릴 리 없다는 게 아군 참모진인 제갈량과 제갈근 선생의 판단.
이에 유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 대 강으로 대치를 이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열린 군의.
유비의 손짓에 꼬맹이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청주자사 전해도 원소의 움직임을 암. 전력을 온존하고 싶을 것.”
“그러면 량아, 우리는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겠니?”
“대치. 그저 물고 늘어지는 것.”
유비의 질문에 제갈량은 지도 한편을 가리켰다.
그곳에 놓인 두 개의 깃발. 좌측으로는 큰 산맥이 자리해 병력을 움직일 수 없었고, 가령 아군이 빠진다면 우측으로 우회하는 것밖에 선택지는없어 보였다.
“저들의 목표는 원소군의 격파지 아군이 아님.”
“그래요. 그러니까 저희는 그저 지키고, 상대가 쉽게 물러나지 못하게 전진과 멈춤을 반복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갈량의 말을 제갈근이 보탠다.
그러니 장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힘쓸 일은 없나?”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그렇게 대치를 이어가면 전해도 분명 행동으로 나설 겁니다. 그때가 장 장군의 진면목을 보여주실 때입니다.”
“쯧, 대치하는 건 좋다지만….”
장비는 살짝 말을 흐리며 유비를 바라봤다.
“누이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전해라면 과거 아군이었던 놈 아니겠나. 저거랑 상대하면 이쪽도 내세울 명분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거라면 괜찮아. 이 누이를 못 믿니?”
“그건 아닌데….”
듣기로 유비는 과거 공손찬의 휘하였다던가.
그들이 보기에 유비군의 움직임은 배신과 마찬가지겠지. 명분이란 곧 싸워야 하는 이유. 그것을 병사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사기도 떨어질 뿐이었다.
가끔 그런 전장이 있다.
내가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를 전장. 동료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정작 그 이유를 모르는 전장을 몇 번인가 경험해보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전장은 진짜 최악이지.
안 그래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병사들인데, 그들에게 이유조차 주지 못하는 지휘관은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유비가 그런 어수룩한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상대하는 군이 과거 그녀의 상관이었다면 이 부분에서는 다소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설마 호세 씨는 절 못 믿으세요?”
“그건 아닌데.”
“그럼 됐어요. 이번 건 절 믿어주세요.”
그녀는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은데, 남자 앞에서 그 거유를 툭툭 두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큰데, 그렇게 두드리면위아래로 출렁이며 움직이는 게 너무 야하다.
“어이, 시선이 조금 이상하다?”
“장비 장군님. 자꾸 그렇게 모함하지 마시죠.”
하여간 누가 동생 아니랄까 봐.
눈 쏠린 건 또 어떻게 재깍 알아채고 귓속말로 떠드는데, 서슬 퍼렇게 인상 찌푸리고 있어서 무섭다.
유비는 우리의 대화를 못 들었는지 좌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면 아군은 예정대로 이곳에 진을 칩니다. 그 과정에서 적의 움직임은 장비, 네가 맡아줘. 전열을 가다듬고 척후의 관리까지는 네게 맡길게.”
“명 받들겠습니다, 누님.”
“제갈근 선생님은 그대로 후방 보급로를 관리해주시고,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어떤 사소한 문제라도 바로 보고 부탁할게요.”
“예.”
이렇게 군의가 정리되나.
서로 의논한다기보다는 기존에 정해진 방침을 군 장교 전원에게 알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대치야 기존에도 하는 것이고, 현아군 최강인 장비를 필두로 해 전열을 가다듬는 것도 예정대로.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원소군이 언제 청주로 넘어서 당도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차일피일 대치만 하고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 량이랑 호세 씨는 잠시 남아주세요.”
“예입.”
왜 둘만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그렇게 군의가 끝나고 꼬맹이와 나만 남아 유비의 앞에 섰다.
그녀는 우리 둘을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자, 이건 량이 꺼.”
“……또 번거로운 일.”
뭔가 싶어서 봤더니 지휘봉 아닌가.
꼬맹이는 그걸 받자마자 대번 표정부터 와락 찡그렸는데, 십 대중반 정도의 나이라는 걸 고려해도 아직 약관도 아닌 소녀에게 이런 걸 맡겨도 되는 건가?
“그리고 호세 씨는 량이를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엥? 나, 댁 호위 아니었나?”
“저는 아무래도 전선에 나설 일이 없을 테니까요. 량이는 지식은 있는데, 아직 군을 이끈경험도 없고 사람을 다스릴 관록도 없어서요.”
“나도 없다? 그, 과거고 자시고 난 기억 다 날아갔거든?”
그 항변에 유비가 환하게 웃는다.
슬슬 나도 유비라는 여자에 대해 이해하는 바가 있었는데, 보통 저렇게 웃을 때는 반론 따위 듣지 않겠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좋았다.
“부관으로 량이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괜찮아요! 호세 씨라면 분명 해낼 수 있어요!”
거봐라.
“……진짜 명령만 전달하면 되는 거요?”
“네. 물론 량이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면 지켜주셨으면 좋겠고요. 그 부분은 경호 대상이 저에서 량이로 바뀌었다고 생각해주세요.”
그거라면 뭐 어떻게든 가능하다.
살짝 고개 돌려 꼬맹이를 바라봤는데, 여전히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볼 따름이라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혹시 얼굴이 굳기라도 했나?
“자자, 이번 일은 두 사람 모두 천천히 익혀가시면 돼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전면전으로 이어지려면 시간은 있으니까 익숙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죠.”
일을 맡긴 사람의 말치고는 너무 태평하지 않은가.
물론 기대하지 않는다면야 나야 편하다만, 이쪽을 너무 믿는 게 아닌가. 내가 누군가를 이끈 건 과거 십인대의 대장으로 있었을 때와 병주에서 백 언저리의 사람들을 이끈 게 전부다.
“너무 믿지는 말고.”
“호세 씨는 분명 기억을 잃었죠. 그래도 몸이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당장 잠깐잠깐 보여주는 예리한 구석이 있으니까.”
“잘은 모르겠다만, 일단 알겠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스스로도 어렴풋이 느끼는 게 있었다.
예전이라면 이런 복잡한 생각은 절대 못 했겠지. 기억과 경험의 축적은 조금 다른 개념인지, 복잡한 사고도 나름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부분을 느낄 때면 조금 복잡하단 말이지.
내 기억은 아직도 8년 전쯤인가에 머무르고 있는데, 신체만높은 경지에 선 느낌이라 괴리감도 다소 느껴지고는 했다.
대체 누가 날여기까지 이끌었을까.
모두는 입을 모아 진소연이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진소연.
그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 * *
정면으로 대치한 군과 군.
저편에 자리한 전해군의 중심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유비, 이 파렴치한 년아!!”
걸걸한 목소리가 들판에 울린다.
“어이, 댁 부르는 거 같은데.”
“전 파렴치한 여자가 아닌데….”
그럼 뭐 동명이인인가.
이러는 사이에도그는 목청 한껏 높여 소리쳤다.
“공손 장군께 받은 은혜를 잊고 그분의 영지를 겁박하느냐! 아무것도 없던 네년을 동문이라는 이유로 거두고 길러주신 장군께 비수를 꽂는구나!!”
그 목소리를 끝으로 전해군이 한껏 소리치며 이쪽을 비아냥거리는 게 들렸다.창년이라는 욕부터 시작하여 원소의 정액받이라던가, 뭐 그런 추잡한 욕설이 난무한다.
사기를 꺾기 위함이라고는 해도 너무 더럽지 않나?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
“그런 말은 저쪽에 가서 하지그래.”
왜 이쪽에 변명하고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도 적장은 제 대장기를 흔들며 한껏 고무된 듯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러다가 화살 맞으면 어쩌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또 잘 보면 은근히 거리는 유지하고 있다.
저게 바로 노련하다는 증거일까.
“네년에게 마지막 양심이 있다면 앞으로 나와 무릎을꿇어라! 너에게 기회를 준 장군께 인간 된 도리를 지킬 생각이 있다면! 네년이 금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확실히 1만의 군세를 등지고 외치는 장군다운 위용은 있었다.
저 큰 대장기를 한 손으로 휘두르는 건 어지간한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텐데. 확실히 정예라는 공손찬의 군에서도 고위직을 차지한 건 요행이 아니었나 보다.
“저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네요.”
유비는 살짝 웃으며 말을 몰았다.
“가게?”
“지켜보세요. 호세 씨는 저를 조금 의심하는 것 같은데,이 유비는 호락호락한 시정잡배가 아니거든요?”
의심한 적은 없다만 다소의 의구심은 있었다.
이건 비슷하되 전혀 다른 것.
유비의 능력을 의심한다기보다는 그녀의 현재 처지로 보아 과연 확실하게 끊어야 할 때 저 온화한 성미로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었을 뿐.
그녀는 천천히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 의외였던 건, 홀로 나서는 유비의 뒤로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는 거다. 평소 제 누이를 싸고돌기 바쁜 장비의 성격이라면 분명 억지로라도 따라갈 것 같았는데.
“안 따라가도 되쇼?”
“누이가 진지하다면 나 따위가 범접할 것도 아니지.”
정말 대단한 신뢰네.
나라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달려갔을 텐데.
그러는 사이 유비는 전장 한복판까지 도달해 전해와마주했다.
“전해 장군. 오래간만입니다.”
“그래, 은혜도 모르는 금수가 드디어 얼굴을 들이밀었구나.”
적측에서도 전해 혼자 나섰고, 이쪽에서도 유비 혼자 나섰다.
사실상 양군의 총사령관이 호위 하나 없이 들판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한 상황. 지켜보자니 그저 불안하기만 한데, 정작 장비는 아무 걱정도 없다는 듯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년이 진정 인간의 자식이라면 항복해라. 공손 장군께서는 너를 많이 아끼셨지. 지금이라면 이번 일은 내 무마해줄 수 있음이다.”
“죄송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네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양 허리춤에서 쌍검을 뽑아들었다.
“결국에는 네 입지를 키운 공손 장군을 배반하겠다는 것이냐.”
“내 충성은 오직 국가와 백성을 향한다.”
유비는 평소와 달리 존대마저 버리고 그를 마주했다.
“북평태수 공손찬은 사사로이 백성을 저버렸다.”
바람이 분다.
산맥을 타고 이어지는 바람이 이 전장을 가로지르며 중저음의 소리를 내며 이 전장을 메웠고,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두 사람을 가렸다.
“한의 큰 어르신을. 공손찬이 장군으로만 전장에 매진하는 사이 안으로 백성을 돌보셨던 유주자사 유우 어르신을 베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상관의 큰 뜻을 부하 된 도리로 감히 의심하느냐.”
“충의는 이곳에. 이 대지, 이 땅, 이 국가에 바쳤다.”
그것은 한낱 인간에게 바칠 것이 아니다.
유비는 말 위에서도 당당히 허리를 펴고 검을 내밀었다.
“사리사욕에 눈먼 강자들이 판치는 천하에서조차 가장 의 없고 도리 없는 자. 그 누구보다빠르게 백성을 저버린 공손찬의 부하가 도리를 논하지 말라.”
“이 화냥년이!! 공손 장군은 북방 이민족으로부터 한족을 수호했다. 중앙의 샌님들이 정치에 눈이 멀어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을 때도 그분은 오직 국경을 사수하셨을 뿐이거늘!”
“그럼 마지막까지 그랬어야지.”
이게 지금까지 보았던 유비가 맞는가.
등밖에 보이지 않음에도 그 존재감을 느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깔려, 구태여 소리치지 않아도 선명하게 전해진다.
“천하가 네년을 비겁한 년이라고 욕할 거다.”
사방으로 고요함이 맴돌았다.
이 들판에 모인 인간의 숫자만 1만하고 5천이 넘는다. 그런 이들이 모두 숨죽여 저 둘에게 시선을 향했는데, 그것은 짐짓 엄숙한 무대가 펼쳐진 것만 같았다.
유비를 씹어먹을 듯 말하는 전해를 가리켜 그녀는 말한다.
“천하란!!”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목소리는 바람 소리에 지워질 것도 아니었고, 그것은 그저 잔잔하게 이 들판으로 하여 울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저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녀는 한 손의 검을 하늘로 높이 세우며 소리친다.
“내가 존재하는 이 땅, 이 유비의 시선이 닿는 곳이 바로 천하다!”
하여 유비는 선고한다.
짐짓 타인이 듣기에 너무나도 광오한 선언.
이 들판을 타고 그녀의 목소리가 한껏 퍼져나갔다.
이름 없는 황족.
어부지리로 서주를 차지했을 뿐인 반푼이.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유비의 멸칭으로 이어지는 수식어가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저 뒷모습을 보고 그 누가 감히 유비를 반편이라고 욕하겠나.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그런데도 가슴 한편을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유비는 그 땅에 서서 적과 아군. 그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망라하며 단지 고요히 자신의 야욕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