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04. 가치 없는 것, 가치 있는 것 (1) (15/40)



〈 15화 〉04. 가치 없는 것, 가치 있는 것 (1)

서주를 넘어 청주로 진군한다.
규모는 5천 정도로 국지전에서  역할을 할 정도는 못 되었지만, 당장 청주의 상비군 또한 2만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북 또한 2만의 군을 모아 황하를 넘었다고 한다.
전력으로는 아군의 우위.
다만 황하에서 도하할 원소군의 뒤를 조력하기 위해 서주의 군이 선행, 청주의 군을 끌어내는 게 주요 목적이라던가.

“거참, 심부름도 이런 심부름이 없네.”
“어쩔 수 없죠.”


싫은 소리를 했음에도유비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청주에서 아군이 들러리라는 건 명백.
그 과정에서 분명 원소에게 얻을 것도 많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조조와 아예 척을 진다는 부담이 있는 이상 손익을 따질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 군의 수장은 유비.
그리고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은 그녀 하나만을 바라보고 따랐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광신적일 정도로 그녀에게 미래를 맡겼다.

내가 말참견할 일도 아니겠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영 안 좋은걸요?”


 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번 일은 너무 빠르게 정해졌다.
적어도 이런 중대사안이라면 어느 정도 수순을 밟고 결정될 거로 생각했는데, 관우와 장비를 필두로 다들 간단하게 수락해버렸다.
물론 제갈량과 제갈근 선생의 의견을 수립하여 정한 일이라고는 해도, 반대 의견조차 없이 일사천리로 군주의 의견에 맹목 한다는  다소 이질적이다.


“그냥, 너무 간단하게 정한 거 아닌가 싶어서.”
“호세 씨는 다른 생각이라도 있으셨어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조조나 원소나 무슨 차이인가 싶었거든. 이건 조조를 두둔한다는 게 아니라, 댁이 황족이기도 하니까.”

원소가 현 황실을 진흙 발로 범했다는 건 분명하다.
조조와 원소.
그녀가 바라는  어떤 것인지 제갈량에게 들어 얼추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구태여 한쪽의 손을 들 필요가 있었을까.

이 일에 걸린 이들의 목숨이 너무 많았다.
그 목숨에 책임을 질 수 있기에 유비도 행동한 것이겠지만, 그 판단에서의 신속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호세 씨는 원소가 별로라고 생각하세요?”
“조조나 원소나 그놈이 그놈이라면, 그냥 아예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호세 씨.”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진지한 표정.

“난세를 배경으로 중립이라는 단어는 없어요.”


유비는 아예 단언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의 편이 되던가, 원소의 편이 되던가. 그게 아니라면 저희는 말라죽을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과정에서 조율하고 처신하며 어떻게든 버틴다는 수단도 있었겠지만….”
“있겠지만?”
“그건 아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을 거예요.”


약자에게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말에는 동감할 수 있었지만, 유비가 직접 나설 정도로 원소의 편을 들어 나중에 제대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항상 웃고만 다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가 있어야지.


“난 솔직히 조금 더 길게 고민할 줄 알았어.”
“이런  원래 고민하면 안 돼요. 시간은 저희를 기다려주지 않고,특히 약자에게 있어 망설임이란 독이 되는 법이잖아요?”
“내가 말하는 건 댁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야.”


서주의 관료를 중심으로 하여 더욱 두드러졌다.
아무리 서주목이라고 해도 반대 의견 하나없다는 건 어떨까. 모두가 유비의 의견을 마치 신봉하듯이 고개 끄덕이는 장면은 솔직히 경각심이 드는 풍경이었다.


유비의 능력을 의심하는 아니지만, 사람은 살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 실수하기 마련이다.
그걸 바로잡아주는 것도 신하의 역할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모두 유비의 의견에 찬동만 해서는 그 실수를 바로잡아주는  대체 누가 맡아주겠나.

“아, 그런 건가요.”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착하죠. 제가 뭐라고 해도  따라주고.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거 하나만큼은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우두머리를 신용한다는 건 좋지. 하지만….”

모두가 맹신해서는 의미가 없다.
물론 내가  대단한 인간이라고 이런 말을 하겠느냐마는, 그래도 유비가 나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에 쓸데없는 잔소리를 해버렸다.

“호세 씨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어요.”


바람이 불었다.
겨울도 슬슬 끝나가거늘 아직 차갑게 식은 바람이 우리를 스쳤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부드럽게 흩날린다.


유비는 고개를 돌려 군이 정박한 곳을 바라봤다.

“확실히 다들 제 의견이라면 믿어주죠. 물론 저도 제갈 자매의 얘기를 듣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의견을 수용했지만, 장비나 관우에 이르러서는 아예 전적으로  신뢰하기만 해요.”


무한한 신뢰란 자칫 그 인간을 짓누르는 사슬이 된다.
전폭적인 믿음은 그저 무거울 따름.
만약 누군가가 내 일거수일투족에 찬사를 보내며 믿음을 보낸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저도 나름대로 조심은 하는데, 확실히 호세 씨는 그런 부분에서 지적하네요. 다른 이들은 그런 말을 안 해줬거든요.”
“말참견이었으면 미안하고.”
“아뇨. 오히려 좋은걸요?”

그냥 내 어림짐작일 뿐이었다.
누구나가 옳다고만 하면, 정작 그 사람이 발을 잘못 디딜 때, 그 누가 그 걸음을 멈추겠나. 그런 간단한 사고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유비는 빙긋 웃으며 내게 손 내밀었다.

“제가 실수할때, 잘못된 길을 걸을 때. 그때는 호세 씨가 말려줘요.”
“내가?”
“저번에 물어보셨죠? 왜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꼈냐고. 저랑 비슷하되 다른 사람이라고 했고, 저한테 직설적이라고도 했죠.”

분명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전 살면서 절 껄끄럽다거나 경계하는 사람을 많이 못 봤어요. 처음에는 그런 호기심이었지만, 그런 사람이 절 따라온다면 분명 전 올바르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너무 자의식과잉 아냐?”
“……아니거든요. 진짜거든요.”


그렇다고  갑자기 삐지지는 말고.
물론 유비에게는 모종의 분위기가 있었다. 쉽게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었고, 또한 첫눈에 보자마자 그녀에게 이상한 친밀감도 느껴졌다.
이것은 기억을 잃기 전 영향일까.
그도 아니면.




유비 현덕 ]

통솔력 – 82
무력 – 78
지력 – 84
정치력 – 88
매력  99




매력이라고 적힌 부분의 숫자는 99.
어쩌면 저것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매력이란 단지 외형만으로 정해지는 게 아닌, 그 분위기와 호감을비롯해 사람을 대하는 것 전반에 영향을 끼치니까.
그렇다면 그녀의 저런 말도 인정할  있었다.
아직 명확한 것은 없었지만, 그 관우와 장비가 100을 넘기지 못한  보아 저 숫자의 상한은 100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됐으니까.

99라면 내가 지금껏 보았던 모든 인간을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다.
너무나도 강렬한 매력.
그것은 복일까, 혹은 귀찮은 짐에 불과할까.
혹은 그저 재앙일까.


“나한테 너무 많은 거 기대하지는 말라고.”

상념을 떨쳐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일은 그녀의 문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 옆에서 적당히 말참견하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유비군이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이질적인 존재니까.

“할 수 있는 것만. 그것만으로도 전 만족하거든요?”

헤실헤실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매력 99인가. 확실히 유비의 매력은 범인과 비교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물론 아름다운 이라면 유비군 내에도 더러 있었지만, 유비의 분위기는 뭔가 독특했다.
마치 인간을 초월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내 상태를 떠올렸다.




[ 전호 호세 ]

통솔력 - 87
무력 - 90
지력 - 82
정치력 - 75
매력  89



인간을 마치 수치화시킨 듯한 이것이 묘하게 거북했다.
 이름을 달고 나타나는 수치는 저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해도 준수한 숫자였지만, 인간의 저력과 한계는 고작 이런 숫자놀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왜 이런 게 내게 보이는가는 모르겠지만, 인간을 재단하는방식으로는 최악에 가깝다.


“호세 씨?”
“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너무 허공을 빤히 바라봤을까.
다른 이들에게는 이 숫자와 글씨가 보이지 않으니, 얼핏 보면 허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이상한 놈으로 비출 수 있었다.
살짝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곧 청주의 경계선을 넘는다.
아마 그때부터가 전쟁의 시작이겠지. 듣기로 공손찬은 유주에서 점차 원소에게 압박당하는 상황이라고 하니, 청주를 쉬이 포기할 리가 없었다.
여차하면 청주 방위군과의 전쟁도 각오해야 할 터.

그전에 유비에게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있잖아. 댁은 전쟁에 나설 때 무슨 생각을 해?”
“저요? ……글쎄요. 벌써 십 년 이상 전쟁터를 전전했지만, 아직도 전장 한복판에 서면 조금 두렵기는 하죠. 그래도 싸우는 이상 반드시 이긴다. 그런 생각일까요?”
“그런가.”

나랑은 조금 다르네.
그 부분에서는 확실히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이쪽은 전장이라고 하면 살아남겠다는 목표밖에 없는데, 그 와중에 승리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확실히 군을 지휘하는 장군의 영역으로 생각됐다.


“왜요?”
“그냥. 과거에 내가 장군이었다며? 그래서 조금 생각해봤지.”


역시  그럴 역량도 그릇도 안 된다.
마음가짐은 아직 병사 수준에 그치고 있다. 기억을 되찾는다면  모르겠으나, 유비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목숨과 주변 이들의 목숨만 생각하게 된다.

“중랑장은 저보다  장군님다웠거든요? 막막, 어험. 군을 전진시켜라. 사마의, 너는 전선의 조율을. 현시점부터 이 전장은 아군이 조율한다!! ……같은 느낌으로요.”
“뭐요, 그게.  흉내?”

갑자기 조금 걸걸한 목소리를 따라 하는데, 안타깝게도 유비의 목소리는 천상 여자의 미성이라 전혀 안 닮았고 되려 이상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사마의?
모르는 이름이 막 등장하는 건 다소 떨떠름하다만.


“아무튼! 진짜 장군님이었다니까요?”
“그러셔?”
“아, 못 믿는 거예요?”


믿고 자시고의 문제를 넘어 상상하기 힘들다는게 문제지.
기억을 잃는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답답하구만. 남들은 죄다 내가 장군이었다느니 뭐라고 하는데, 정작 이쪽에서 보자면 웬 이상한 사람 하나를 나랑 비교하는느낌이었다.


만약 기억이 돌아온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제 고작 한 달 반에서 두 달.
그동안 그녀를 비롯해 유비군의 면면과 어울리며 제법 정도 들었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온다면, 과거의 내가  풍경을 바라본다면 어떻게 나올까.

그게 조금 두렵기도 했다.
적어도 나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놓였다. 조조군이고 나발이고, 솔직히 말해 나 자신은 장군이고 자시고 그냥 편안한 분위기에서 적당히 있고 싶을 따름.
그런 부분에서 유비는  마음 편한 지도자였다.

“아,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는데.”
“네?”


이어 말하려던 차.

“장군!!”


이쪽으로 달려오는 병사의 모습에 우리 모두 고개를 돌렸다.
그는 허겁지겁 이곳을 향해 달려오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이며 말을 잇는다.


“척후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전방에 적 다수. 예상되는 병력으로는 약 일만에 달하고,  수장으로는 전해 본인이 직접 나섰다는 보고입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만.
유비와 나는 서로를 바라봤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