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03. 폭풍전야 (2)
원소의 사자가 서주성에 도착했다.
물론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했지만, 아직 원소가 하북을 평정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우선 그를 접대하고자 유비와 관우, 장비나 제갈근 선생 정도가 따로 움직였고, 나나 제갈량은 그냥 적당히 관사 인근의 정원에서 시간이나 죽이고 있었다.
나야 아직 정규 관직에 오른 것도 아니었고, 제갈량의 경우에는 제갈근 선생이 밖에 내놓기 부끄러운 아이라던가.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지만, 어느 부분은 동의.
“원소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꼬맹이를 곁에 두고 돌을 던졌다.
연못에 퐁당 빠지는 작은 돌멩이. 개인적으로 저 경쾌한 소리가 마음에 안정을 주어 가끔 하천가에서 돌을 던지고는 했던 적도 있었다.
“예상가는 선택지로는 둘.”
“둘씩이나 있다고?”
“하나는 연주 국경에서의군사적 도발.”
미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안 그래도 몸 달아오른 조조군이 단체로 짓밟으러 올 게 뻔하잖아.
협상이 결렬됐다고 바로 매복한 군으로 주의 장관을 습격하는 것들이었다. 물론 과거에 내가 몸담은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지금의 나랑은 별로 상관도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현재 서주는 조조군을 감당할 수 없다.
“나머지는?”
“청주 공략.”
청주?
그거 그거잖아. 저 서주 위쪽에 있는 거기.
그쪽이라면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황건적 관련된 피해도 제법 입은 데다가, 지역 자체가 북부와 반도 지역으로 걸쳐 다소 애매한 입지라고 들었는데.
“원소는 청주 공략에 1년이나 걸렸음. 하지만 아직 지지부진. 육로를 통해 공략할 수 있는 서주에 지원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음.”
“뭐야, 그게.”
어느 쪽이건 전부 아군에게 힘을 빌려달라는 소리잖아.
상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 서주를 상대로 원소가 힘을 빌리러 왔다고? 그런 주제에 저렇게 휘황찬란한 규모로 사람을 파견한 거냐?
“원소 그 양반은 양심도 없나.”
“약자는 빼앗기고 강자는 빼앗음. 그나마 이번 건 상황이 괜찮은 편. 원소는 겉보기에 훌륭하나, 치고 나오는 조조의 기세가 너무 강함.”
“그런 이유에서 서주를 함부로는 못 대할 거라고?”
꼬맹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다소 찝찝함이 남았다. 게다가 원소라면 한 황실을 거하게 부정했던 전적이남은 인물.
그것은 원소에게서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였다.
유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론 현 정세로 보아 조조는 황제를 등에 업고 그 권위를 제 입맛대로 휘두르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원소 또한 그리 선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은 것.
“원소랑 손잡는 건 옳은 선택일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자꾸만 맴돌았는데, 제갈량이 그런 내 독백에 반응하여 고개만 살짝 돌렸다.
“호랑이가 둘. 그사이에 낀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음?”
“그야 존나 도망가야지.”
물론 호랑이를 사냥하는 이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일단 죽으라고 뛰어야지?
그게 안 되면 죽는 건데, 일단 시도는 해야지.
“땅에는 발이 없음.”
“인간을 예시로 들었잖아?”
“척하면 척.”
“응, 난 그런 거 몰라.”
그러니 제갈량이 푹 한숨을 내쉰다.
“어린 애임?”
조금 말장난을 걸긴 했지만, 아직 약관도 못 된 여아한테 애 소리를 들으니까 좀 그러네. 그럼 난 제갈량한테 엄마라고 달려들면 되는 부분인가?
물론 젖가슴도 다 안 자란 꼬맹이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마는.
“아무튼, 정답은 호랑이 둘이 싸우게 하는 것임.”
“조조랑 원소야 이미 죽으라고 싸울 게 확정이잖아?”
“우리의 목적은 그 균형을 잡는 것.”
균형?
하지만 하북을 통일한다면 균형의 추는 원소에게기울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는 조조에게 손을 보태 원소와의 균형을 잡는 게 더 합당하지 않나?
“조조의 성장세가 인지의 범위를 넘김. 고작 오 년에서 육 년임. 그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강자가 즐비하던 중원을 장악하고 황제를 옹립, 그 명분까지 휘두르는 천하의 양강으로 우뚝 선 것.”
“하북을 통일한 원소라면 그쪽이 더 크지 않나?”
아무리 중원이 대단하다하여도 그것은 낙양과 가깝다는 것이 한몫한다고 본다.
실질적인 인구와 대지의 크기 등을 산정하자면 연주와 예주에 국한된 조조보다는 원소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커지는 게 아니던가.
“겉보기에는 그렇지만, 조조는 그간 숱한 위협을 만나 하나하나 꺾어왔음. 그 둘이 싸워 승자가 정해진다면 원소와 조조, 어느 쪽이 더 껄끄러울지를 생각하고 내린 결론임.”
“조조보다는 원소가 상대하기 쉽다는 건가.”
원소를 만난 적이 없어 어떻게 확답할 수가 없다.
물론 그간 들은 바로 전쟁에서의 성과는 조조군이 훨씬 많이 쟁취했다고 들었다.
그 과정에 내가 껴있다는 건 조금 의문이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그간 조조군이 거둔 성과만 해도 하북에서 공손찬 하나와 다투는 원소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그 둘이 싸우게 둬도 되나?”
“의문. 그 질문의 이유는?”
“둘 중 하나가 싸워 이기면 그게 곧 천하의 패자잖아.”
문제는 이거다.
천하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강자 둘이 싸우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승자가 정해지는 순간, 그는 명실상부 이 천하 최강자로 군림할 게 뻔했다.
그 뒤로는 무슨 수단을 강구해도 지금의 체제보다 더 힘들어지는 게 사실 아닌가.
“그걸 상대할 방법은? 그게 없는 이상 어느 쪽을 밀어줘 협력한다고 해도 그들에게 집어 삼켜질 뿐이야.”
“아직 구상 중이지만, 연합할 세력이라면 있음.”
“이 주변에?”
이상하다.
그런 세력이 있으면 진즉 말이 나왔어야 정상 아닌가?
유비에게 원소는 여러모로 상대하기 껄끄러운 세력이었다. 그들이 현 황실을 부정했다는 건, 황족인 유비에게는 다소 망설임이 남는 선택지일 터.
그런 대체할 세력이 있다면 구태여 원소와 손잡지 않아도 될 건데.
“이곳으로부터 남부, 강남의 손책.”
“손책?”
그건 또 누구야.
“과거 아군과 다툰 적은 있지만, 그녀는 현재 강남 일대로 크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음. 서주와 양주가 손을 잡는다면,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사이에 그 둘이 무시하지 못할 크기로 확장할 수 있을 것.”
“진짜 모르겠네. 그건 또 누구야?”
“……정말 다 까먹긴 한 모양.”
그 손책이라는 인간도 나랑 관련이 있어?
대단하다고 하면 대단할까. 과거의 나는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다녔으면 말하는 족족 어느 정도 엮여있는 이들이 튀어나오나.
“과거 당신이 손책을 깼음.”
“세상에.”
심지어 악연이라니.
“아직 정해진 건 아니지만, 원소와의 동맹이 체결된다면 이후천천히 시간을 들여 회유할 생각이었음.”
“그래, 그래. 그 부분은 고생하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군의 행보에 관해 내가 참견할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의문이 생겼을 뿐이지, 이들이 잘 알아서 처리한다고 하면 그것까지 간섭할 이유도 없는 셈.
그나마 계획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
그렇게 우리가 떠드는 사이, 저 멀리 행렬이 늘어서기 시작한 게 보였다.
내부 회의라는 건 잘 끝났나 보네.
자리에서 일어서 그쪽으로 걸어가려는 차, 저 멀리 중년 남성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다소 노쇠한 인상이 있었지만, 시선과 표정이 강렬하다. 예법에 맞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아마 저 남자가 원소군의 사자로 유비와 협상한 인물인 것처럼도 보였다.
이름은 아마 저수라고 했던가?
그는 잠깐 이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유비와 몇 마디 더 나누고는 먼저 자리에서 떠났다. 그녀는 그런 저수를 잠시 배웅하고는 곧장 이리로 다가온다.
“기다리시기 지루했죠. 그러니까 방에서 쉬셔도 된다니깐.”
“놀면서 봉급 받기 좀 그렇잖아.”
게다가 방안에만 있어도 괜히 궁금하기만 하고.
“그래서, 얘기는 어떻게 됐어?”
“원소군은 아군과 동맹을 희망하고 있었고, 그 첫 번째 요구로 청주 공략에 힘을 보태어 줄 것을 요구했어요.”
“염병하네.”
량이 꼬맹이가 말해서 대충 예상은 했지만, 정말 단도직입적으로 청주 공략을 부탁했다는 건 너무 염치가 없는 거 아닌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자니 유비가 빙긋 웃으며 손을 가로저었다.
“이쪽에서도 많은 걸 얻었어요.특히 군마라던가, 값어치로 환산하기 힘든 재화랑 물자를 지원받기로 했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이렇게 하면 조조도 반응을보일 테니까요.”
평소 유비답지 않은 다소 음울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 시선의 끝자락에 존재하는 게 무엇인지까지야 알 도리도 없었지만, 조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청주로 간다고 치고, 병력은 어느 정도로?”
“저희도 서주 방위군을 유지해야 하니까 많이 파견할 수는 없고, 적어도 오천 정도로는 꾸려서 육로를 통해 청주를 흔드는 방향으로 가려고요.”
군의 전쟁은 잘 모른다.
안타깝게도 내 마지막 기억은 병사로 싸우던 것에 국한되어 있었고, 기억을 잃기 전 장군으로 일했다고 들었으나 그건 이미 기억에서 지워진 일.
하여 오천의 병력으로 어디까지 가능할지도 모른다.
“뭐, 그거야 관우나 장비 어르신께서 알아서 해주실 일이겠고.”
“네?호세 씨도 같이 갈 건데요?”
아니, 나는 왜.
“서주성은 관우가 일임할 거고, 총사령관의 역할은 제가 맡을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제 호위인 호세 씨도 당연히 따라와 주실 거죠?”
“아니 무슨 군주가….”
어이가 없네.
아니 서주목이라는 양반이 서주에서 자리를 비워도 돼? 따라가는 것 자체야 뭐 어렵지 않다마는, 그래서야 본진을 비우는 꼴 아닌가.
“그렇게 보셔도 안 돼요. 이번 일은 원소군의 강한 요청이었거든요.”
“원소가?”
“아무래도 조조에게 과시하고싶은가 봐요. 서주가 본인의 손을 들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거겠죠.”
어이구, 진짜 가지가지 하네.
물론 병력만 보내는 것보다는 유비 본인이 직접 움직이는 게 더 확실하게 동맹을 공고히 발표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조조랑은 아예 끝장일 건데.
게다가 서주의 공백을 노리고 덤벼들지 않을까?
유비가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조는 당장 형주 방면으로 손을 뻗어 이쪽까지 공략해오긴 힘들 거에요. 게다가 서주 방위군도 전부 건재하고, 무엇보다 우리 운장이 서주를 지킬 테니까요. 그렇지?”
“언니, 그렇게 바라보시면 부끄럽습니다.”
저 여장부가 부끄럼도 타네.
평소에는 그저 딱딱한 표정만 짓는 줄 알았는데, 유비가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 돌리는 모습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그러면 난 또 청주로 달려가게 생겼다는 소리?
물론 그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유비가 천하 정세에 말려들어 이리저리 치이는 듯한 느낌도 들어 솔직히 불안한감이 있었다.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빙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직 발버둥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 활로도 열려요. 물론 지금 당장에야 원소와 조조가 너무 강대하긴 하죠.”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유비가 한 발짝.
그렇게 이쪽으로 다가와서는 내 손을 붙잡았다.
바깥에 오래 머물러 차게 식은 손 위로 부드럽고 따듯한 손이 얹어진다.
“하지만.”
그 손길에 조금 힘이 들어갔을까.
“영원한 승자란 없는 법이잖아요?”
여기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유비라는 여자의 강함은 포기하지 않는 것. 그렇게 끈질기게 상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버텨, 마지막까지 버텨낸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런 부분은 조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