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02. 팽성 전투 (6)
눈 내리는 설원을 배경으로 누군가가 나를 바라본다.
누군가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분명 사람의 형체를 띄고 있어도 마치 그림자 드리운 것처럼 새까맣게 물들어 알아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 왠지 모를 익숙한 감각은 무엇일까.
기억은 없다.
하지만 분명 이러한 일을 겪었다. 이 풍경을 보았던 적이 있고, 저 앞에서 이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누군가와 만났던 적이 있다.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나를 따라. 그러면 천하 만민, 그 누구 하나 배 굶주리지 않고 등 따듯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줄 테니까.’
또 이것이다.
전부터 종종 들려오던 목소리.
이것은 언제나 같은 말을 떠들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꿈보다도 더 허망한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 속삭인다.
그 누구도 굶주리지 않는다고?
그런 세상이 말이나 되나.
분명 이룰 수만 있다면 매력적인 세계겠지.
세계에는 여러 불평등과 비극, 슬픔이 넘쳐 흘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인 것은 그 한 줌의 곡식도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으니까.
부디 볼 수 있다면 그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다.
‘분명 가능할 거야. 내기해도 좋아.’
그것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점점 세계가 밝게 물들었다.
그 빛무리와 함께 그 흐릿한 인영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 * *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머리가 멍하기는 한데, 일단은.”
멍한 정신을 깨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지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살짝 시선을 돌렸는데, 그곳에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아 만류하는 유비가 있었다.
“아, 일어나지 마세요. 부상이 조금 심했거든요.”
“몸도 안 움직이는 걸 보아 그런 것 같네.”
그건 그렇다지만 너무 안 움직이는 게 아닌가?
아무리 부상이라도 몸을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인 건 어째서인가. 살짝 시선을 내렸는데, 내 몸이 무언가에 칭칭 감겨서는….
“아니, 이건 또 뭐야.”
사람 몸을 무슨 이렇게 칭칭 감아놔?
“이곳저곳 베인 곳도 많아서 우선 응급처치로 감아뒀어요. 제갈 가문은 의학에도 조예가 있어 량이가 직접 조치했거든요. 조금 나아진 느낌이 드나요?”
그 빌어먹을 꼬맹이가.
이게 무슨 조치냐? 사람 하나 묶어둔 거지.
진짜 무식하게도 감아뒀네. 물론 이곳저곳 많이 베였던 걸 기억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이렇게 무자비한 조치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기껏 구해줬더니 사람을 아예 포박해놨네.
“나아진 느낌은 모르겠고 답답해. 게다가 가려워.”
대체 뭔 짓을 했는지 몸이 가렵다. 손발을 포함해 머리만 내놓고 나머지는 칭칭 감겨서 아예 옴짝달싹도 할 수 없다는 게 유감스럽다.
그 말에 유비가 빙긋 웃으며 답하기를.
“량이 말로는 약효가 강한 것이라고 하던데요. 그 대가라고 하긴 뭣하지만, 환자에게 극심한 가려움을 유발하다 보니 묶어두는 게 좋다고 했어요.”
“……그 꼬맹이 데려오쇼.”
“예?”
나 지금 진지해.
기껏 목숨 걸어 살려줬더니 이런 처사를? 당장 그 얼빠진 꼬맹이의 머리에 꿀밤 다섯 대 정도 때려줄 거니까 빨리 데려와.
두 번언급하여 말하자면 진심으로 진지하다.
“너무 량이를 탓하지 마세요. 그 약은 저도 처방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사흘 정도 지나면 어지간한 자상도 반쯤 아물기 시작하더라고요.”
“약효고 나발이고 몸이 근질근질한데.”
“흉터도 안 남아요.”
흉터는염병.
이미 얼굴에도 몇 새겨진 것이 상처다. 남자 몸에 상처가몇 는다고 뭐 다를까. 그냥 흉터 남아도 되니까 이 근질근질한 것 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나?
“쯧, 댁도 나 풀어줄 생각 없지?”
“빨리 나으시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하여간 저 표정 좀 봐라.
괜히 힘 뺄 생각도 없어 다시 머리를 베개에 눕히니 유비가 빙긋 웃었다. 뭘 좋다고 웃어. 이쪽은 간지러워 미칠 지경이구만.
“아, 그러고 보니 장패 어르신은 어떻게 됐나?”
다치기로는 아마 나보다 더 심각할 텐데.
물론 도중부터 홀로 그 여자를 상대했기에 내 부상도 컸겠지만, 그것도 장패의 부상과 비교하면 아직 나은 수준이었다.
유비는 내 질문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에 지장은 없고, 현재병동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그러면 그 뒤로어떻게 됐고.”
막바지에 그녀가 달려오던 건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이런 멀쩡한 침상에 몸 눕히고 있으니 아마 무사히 끝난 듯싶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됐는지 다소 궁금하기도 했다.
“적장은 철수했어요. 저희도 팽성으로 돌아왔고, 소패로 사람을 보내 항의하고는 있지만, 솔직하게 인정하진 않겠죠.”
“그야 그렇겠지. 누가 미쳤다고 그걸 인정하나?”
근방에 도적이 있었다, 뭐 그런 식으로 퉁 치려 들겠지.
문제는 당장 서주에서 그것에 항의할 저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조군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온 것도 분명 힘으로 묵살할 수 있기 때문이겠고.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건 왜 이렇게급하게 움직이냐는 건데, 나였다면 꾸준히 회유하는 방식을 선택할 것 같았다.
“조조군도 몸이 달아오르기는 했나 봐.”
“최근 원소가 하북에서 승기를 잡기 시작했으니까요. 제아무리 조조라도 하북을 통일한 원소가 상대라면 한 체급 밀리는 감도 있고요.”
그러면서 유비는 살짝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개인적으로 공손 장군과는 선후배 사이였던지라 조금 생각하게 되네요.”
“어쩌면 댁은 원소랑 손잡아야 할 수도 있을 텐데.”
“각오는 하고 있어요.”
이거 참, 난세가 뭐라고 이렇게 되나.
과거의 인연과 별개로 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어야 한다.
유비야 동문이었다고 하니 씁쓸하겠지만, 현 조조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원소와 연합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게다가 공손 사형도 예전과는 많이 변해, 군을 다스릴 장군으로는 적합할지 몰라도 누군가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했고요.”
공손찬이라면 나도 들어본 바는 있었다.
저 멀리 북방에서 이민족을 때려잡는 백마 장군이 있다던가. 최정예 부대를 꾸려 전원 백마에 태우고는 이민족을 짓밟는 전장의 화신.
물론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이렇다 할 평가도불가능하지만.
“난 모르겠수다. 이런 건 군주가 알아서 해야지.”
“그럼요! 저, 이래 보여도 악운 하나는 끝내준다고 자평해요. 어려운 일이 따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면서 팔을 들어 올리며 빙긋 웃는다.
힘을 자랑하는 듯한 자세와 해맑게 웃는 표정이 웃겨 나도 따라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언제나 주변을 편하게 하는 성격이어서 썩 싫지 않았다.
물론 저게 진짜 미소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장 국경을 맞댄 조조와는 적대 관계로 번졌다.
지금이야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유비가 조조와 합칠 것을 거부한 이상 언젠가반드시 중원의 패자와 결판을 내야할 때가 온다.
그러니 저건 분명 겉으로 꾸민 웃음이다.
“거, 뭐냐. 힘내시고.”
“네? 전 언제나 힘내고 있죠.”
“지금은 안 웃어도 돼.”
그 말에 유비가 살짝 멈칫하고는 이쪽을 바라본다.
“복잡하잖아? 조조야 물론 강적이고, 그걸 이겨내려면 원소와 손잡는 게 가장 최적인데, 당장 그래서 그 원소가 중원의 조조를 깨면? 그때는 원소의 천하잖아.”
“……그렇죠.”
“원소에게 패권을 넘겨주는 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수. 그건 당신이 앞으로 쭉 생각하고 고뇌해야 할 문제겠지.”
내가 말참견한다고 해서 변할 건 없다.
단지 제갈량에게 들은 바로 원소 또한 현 황실을 공공연하게 무시하며 황권에 도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들었다.
그건 분명 유비가 생각하기에 올바른 현상이 아닐 터.
“조금이라면 나도 손 보탤 수 있으니까.”
그러니 유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시선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홱 돌렸다. 이런 건 직접 말하기도 부끄러웠고, 당장 조조군과 과거의 내가 무슨 관계였는지 명확하지 않아 확신을 줄 수도 없었다.
“물론 또 이렇게 개고생은 안 할 거요.”
“……진심이세요?”
과거의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른다.
단지 현재의 나는 이곳이 썩 마음에 들었을 뿐.
유비는 편안하게 포용할 줄 알며 배려심 있고, 무엇보다 제 발밑을 살필 줄 아는 군주였다.
제갈근 선생은 꼬장꼬장하게 굴면서도 속내가 여린 여인이었고, 제갈량 그 꼬맹이는 어벙한 듯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밖에도 여러 사람과 만나며 생각한 게 있다.
유비와 만나기 전 돌아본 서주에서는 생기를 느꼈다. 물론 저마다가 고된 삶에 지쳤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더라.
자고로 백성이란 우두머리에 따라 그 성질을 바꾼다.
무능한 이가 통치하면 사람들은 무기력함에 빠지고, 폭군의 통치는 사람들을 비탄에 빠뜨리며 절망과 좌절을 퍼트리고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비는 나름 괜찮은 지도자가 아닌가.
적어도사람들 눈에서 눈물 빼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썩 괜찮은 군주라고 볼 수 있었는데, 게다가 다소의 은혜까지 입었으니 조금은 도울 수 있었다.
“내가 뭐 능력이나 있겠느냐마는, 아주 조금이라면 어떻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해. 몸이 예전이랑은 진짜 딴판이더라고.”
씩 웃으며 말하니 유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께서 그럴 생각이라면 전 언제든 환영이에요.”
“대신 목줄 쥘 생각은 마쇼. 난 지금 이게 편해.”
“그야 물론이죠.”
기억 잃기 전 내가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조조군에 있었다고 했지만, 기억나지 않는 것에 매달려 그곳으로 가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전쟁사업에 한창인 곳은 내 성미와 안 맞는 부분도 있고.
그런 의미에서는 딱 이 정도가 마음이 편했다.
이 정도라면.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뻗어 악수라도 나누려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온몸이 칭칭 감겨 꿈쩍도 할 수 없다는 걸 잊고 있었다.
* * *
객잔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번에 조조군이 또 움직인다더군.”
“하여간, 잠잠할 날이 없네.”
“게다가 서주 방면으로도 군을 움직였다던데.”
“그러면 서주로 상행을 움직여야 하나?”
최근 세간의 이목은 중원의 조조와 하북의 원소에게 쏠려있었다.
현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둘을 꼽으라면 무조건 손꼽히는 이들이었고, 분명 언젠가는 패권을 놓고 경쟁할 이들이었기에 짐짓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바라보는 여인이 한 명.
그녀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떠돌이였다.
오늘도 어느 객잔 구석에 앉아 멍하니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술병을 기울인다.
한 잔, 두 잔. 그렇게 그녀가 비운 술병이 벌써 십수 병을 넘겼지만, 취기조차 느껴지지 않아 다시금 술병을 기울인다.
“조조라…. 걘 여전하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또 술병을 기울인다.
그러는 와중에도 객잔은 시끌벅적했는데, 그중 유일하게 그녀만이 조용히 술병을 기울일 따름이었다.
한곳에 자리 잡지 않고 천하를 유람하는 떠돌이.
그건 썩 즐거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인생을 되돌아보면 한 곳에 정착했던 적이 드물었기에 그녀 본인은 그걸 불편하다거나 어색하게 느끼지 못했다.
지금은 떠돌이에 불과한 그녀이나 한때 보금자리를 얻어 머물렀던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2, 3년 전 피어오른 불길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사랑하던 이도, 그녀의 소망도 전부.
그녀는 그날부로 천하를 유람하듯 떠돌고있었다.
오늘은 청주 인근의 객잔이지만, 내일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삶. 한때봄을 맞이했던 그녀의 세계는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홀로 술병을 기울이던 여인의 근처로 한 남성이 다가왔다.
“저, 혹시……,”
“꺼져.”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차갑게 끊어냈다.
그와 동시에 멀어져가는 남성.
주변에서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이 주변에서.
어쩌면 천하 전체를 놓고 보아도 상당한 유명인이었으니.
사람들은 그녀를 천하무쌍이라고 불렀으며,
그 이름은 여포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