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02. 팽성 전투 (2)
서주성이 대도시의 기능을 위주로 하는 거성이었다면, 팽성은 정말 말 그대로 전략적인 요새라는 게 딱 느껴졌다.
성 자체가 막 큰 편은 아니지만, 우선 성벽 자체가 높다.
게다가 아래로 호수의 물을 끌어 해자를 팠고, 입지 자체도 고지대에 있어 어지간한 공세에서 완벽히 차단하고자 구축된 게 빤히 보였다.
“거참, 그나저나 이 성은 진짜 살풍경하네.”
“애초에 여기는 전략적인 거점으로 구축된 거라서요.”
유비의 답변을 들어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서주는 전란에서는 항상빗겨나 제법평화로운 곳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황건적의 난 당시 난민도 많이 몰린 곳으로 기억하는데.
“서주가 외세에 대비할 게 있던가?”
“과거 조조의 공세에 한 번 전부 무너졌거든요.”
그녀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조조 이 양반은 어디 안 끼는 곳이 없네. 이것도 조조, 저것도 조조. 말만 들으면 조조가 무슨 악의 축처럼 들렸다.
물론 유비가 아예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뭐만들으면 죄다 조조의 이름부터 거론되니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나.
“혹시 나도 거기에 꼈나?”
“아뇨. 그 당시 호세 씨는 복양성의 성주로 계셨다고 들었어요.”
성주? 내가?
거참 대단한 승진이네.
아니, 생각해보니까 성주보다는 중랑장이 더 높은 위치인가?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너무 까마득한 중랑장 같은 직책보다야 성주님이 더 대단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 그때부터 댁이랑 조조는 사이가 나빴나?”
“아뇨, 그 당시 서주목은 도겸이란 분이 부임하고 계셨거든요. 이게 좀 설명하려면 복잡한데, 그 당시 조공의 부친이 이 서주 출신 관료에게 피살당하는일이 생겨서요.”
“오우.”
그건 어쩔 수 없지.
물론 개인적인 사정으로 전쟁까지 벌이는 건 어떨까 싶지만, 솔직히 말해 내 가족이 누군가에게 죽었다고 하면 나라도 눈깔 돌아가서 다 들이받았을 것 같다.
당장 내게 가족이 없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지만.
이러는 사이에도 유비는 계속 관청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팽성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녀의 일이 끝난 건 아니었고, 오히려 내부에 들어선 이후로는 물자의 보급과 병력의 배치, 그리고 후방에서 이어질 보급로의확보까지.
오히려 행군할 때보다 더 바빠 보였다.
“옆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잠깐 나가 있을까?”
기왕이면 돕고 싶었지만, 군부의 일은 군부에서 처리할 일이라며 그녀는 빙긋 웃고는 혼자 작업하고 있었다.
유비의 객장으로 부임하며 했던 말 중 하나가 군사적인 일에는 끼지 않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저런 행정 작업이라면 도와줘도 괜찮은데 말이지.
“아뇨, 그냥 옆에 있어 주세요.”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어감이 이상하네.”
“혼자 있으면 적적하니까 그래요.”
적적하다면야.
옆에 있으면 괜히 신경 쓰여 방해되지 않을까 싶어 한 말이었는데, 유비가 되려 남으라고 한다면 고용주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름이 옳았다.
그래도 이렇게 멍하니 있으면 심심할 뿐이었다.
이게 옆에서 누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혼자 놀려면 괜히 눈치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게 한 조직의 수장이라면 아무리 나라도 좀 신경 쓰였다.
“쯧, 됐으니까 좀넘겨.”
“네? 하지만….”
“전장에 나가는 게 싫다는 거지 이런 것까지 거절한 적은 없어. 아니면 뭐요, 내가 전직 조조군이라고 못 믿는 거요?”
그러니 유비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뭐 구태여 저렇게까지 하나.
“아니, 아니에요! 그냥 당혹스러워서 그래요.”
“그래?”
“예전 호세 씨는 이렇게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던 거로 기억해서. 아니면 혹시 저한테만 안 다정했던 건가요? 생각해보니까 조금 슬프네요.”
그건 기억에 없는 일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니까 그렇게 보지 마라.
“그런 기억도 못 할 얘기는 됐고 일이나 합시다.”
물론 많은 걸 처리할 수는 없다.
당장 각 분야에서 담당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 그 부분에서 일을 어떻게 돌려야 할지 답도 안 나오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만이라도 하자.
우선 유비가 확인하지 않은 죽간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난 저기서 작업에 맞게 보고서 먼저 정리하고 있을 테니 필요한 대로 부르쇼. 대충 종류별로 정리만 해둘 거니까.”
“헤헤, 그럼 잘 부탁드려요!”
한사코 사양하던 주제 시원하게 맡겨버리네.
뭔가 당한 것 같은데?
물론 저리 밝게 웃으면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어, 그냥 어이없어 헛웃음 한 번터뜨리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서류를 살피며 분류 작업에 들어갔다.
팽성의 기존 방위병 2천에 유비가 데려온 병력이 1만.
합산 1만 2천규모의 대군이었지만, 현재 소패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력이 2만을 웃돈다던가.
저것 또한 조조군의 총력이 아니라고 하면 대체 조조군은 얼마나 대규모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확실히 중원의 최강자라 불릴 만하네.
게다가 당장 서주 하나만을 겨우 운용하는 유비군의 사정은 올라오는 서류만 봐도 얼추 가늠할 수 있었다.
이게 웃긴 게, 예전 같았으면 이런 거 하나 몰랐을 내가 이제는 보고서를 전반적으로 훑으며 그 군이 어느 규모이며 상황이어떨지 대충 예측이 간다.
기억 잃기 전 나는 대체 얼마나 똑똑해진 거냐.
두렵다, 나의 재능.
“아, 보급로 관련된서류 모였나요?”
“여기 쌓아뒀어. 아, 관우 장군의 기병대에 댈 보급이 조금 늦어지는 것 같다는데 그 부분은 어떡할 거요?”
“그거라면 아마 미축 선생께서 추가 발주를 넣으신다고 했어요. 그나저나 그런 것까지 전부 확인하신 거예요?”
하는 김에 눈에 들어와서 봤을 뿐이다.
그것 말고도 현 유비군의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보급에 차질을 조금씩 빚고 있다는 것도?
전쟁 준비는 예전부터 했다고 들었으니 이건 아마 서주 내부의 생산량 문제이지 않을까. 사유는 몰라도 얼추 보고서에서 유추되는 것까지는 어림짐작할 수 있다.
와,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 제법 많이 똑똑하네.
혹시 내 재능은 문관에 있던 건가?
유비도 그런 내가 의외였다는 듯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호세 씨는 천생 장군으로 생각했는데 말이죠.”
“아니 무슨 장군이야. 내가 그럴 깜냥도 아니고.”
“예전에는 진짜 늠름하셨다고요?”
늠름?
그거 아마 아닐걸.
아무리 내가 바뀌었다고 해도 기억 잃기 전부터 지금까지 고작 8년에서 9년 남짓이었다. 고작 그 짧은사이에 사람의 근본까지 바뀔 리도 없으니 그건 아마 허세가 아니었을까.
“아마 미인 앞이라고 허세 좀 부렸나 보지.”
“그렇게 직접 말하면 좀 부끄러운데요.”
그럼 대충 흘려 넘겨라.
왜 괜히 되짚어서 나까지부끄럽게 만드나.
“아무튼, 난 장군감은 아니요. 그건 내가 알아.”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야 난 내 명령으로 죽는 이들의 생명을 책임질 수 없으니까.
단순하게 그 죽음을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내가 천성이 그렇게 태평하질 못했다. 당장 전쟁에서 전우 하나가 죽어도 계속 눈에 밟히는데, 직접 죽으라는 명령까지 내린다면 그걸 어떻게 감당하나.
나 자신이 먼저 망가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난 그런 대단한 책임을 질 정도로 강하질 못해서.”
“그런가요.”
그 뒤로는 잠시 말이 끊겼고, 다시 묵묵히 작업에 착수했다.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책임질 인간이 아니었다.
과거 기억을 잃기 전 장군이 되었다면, 그건 아마 태연한 척 애써 이 악물고 버틴 게 아닐까 싶다. 죽음의 무게는 언제나 숙연하게 받들어야 하는데, 그 숙연함은 나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더 과거가 궁금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버렸던 이름인 전호를 다시 주워서 쓰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야 장군이라는 그릇에도 맞지 않는 직책에 올라 병사를 호령하나.
혹시 진짜 내게 그런 쪽으로도 재능이 있나?
……아니지, 아니야.
다시 생각해도 난 그럴 그릇이 못 됐다.
기껏 해도 일개 병사. 잘 쳐줘도 앞선에 나서 싸우는 장교 정도가딱 적당했다. 그 이상으로 책임을 짊어진다면 분명 어딘가 어긋나기 시작할걸?
그런 생각을 이어갔을 무렵,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군사님이 오셨습니다.”
“아, 들어오라고 해요.”
그 말과 동시에 문 열리며 들어오는 것은 제갈근과 제갈량 자매.
서로 회색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는데, 언니 쪽은 조금 쾌활하게 생겼다면 동생 쪽은 여전히 맹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의외라는 듯한 제갈량의 표정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는 사이 제갈근이 유비에게 다가갔다.
“유비님, 조금 전 전령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전령이요?”
“소패에서 보내온 조조군의 전령이에요.”
그야 서주에서도 병력을 움직였으니 반응은 보이겠지.
싸우지 않고자 한다면 저것은 아마 무력시위.
그리고 유비가 그것을 힘으로 맞받아쳤으니 분명유비를 불러 대화하자는 내용이 아닐까. 그것은 그녀도 얼추 예상했던 모양인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를 부르는 거죠?”
“황제 폐하까지 들먹이며 황족의 의무를 다하라고 적혔네요.”
“언제부터 조조가 황제 폐하의 권리를 대행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어요. 그래서 회담 장소는 어디로 하자던가요?”
그 말에 제갈근이 살짝 낯빛을 흐렸다.
“우선 저쪽에서는 소패에서의 회담을 제의했어요.”
“먼저 국경으로 군을 돌렸으면서, 회담도 소패에서 하자고요? 예주로 절 불러들인 뒤에 습격할 생각일까요.”
“그건 아님.”
유비의 질문에는 제갈량이 먼저 나서 답했다.
“그쪽에서는 아직 서주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음. 그럴 여유도 없음. 회담 자체에서는 일이 터지지 않을 것.”
“회담 자체라고 하면?”
“결렬되는 순간 그 전제도 끝. 서주 결속력 저하를 위해 목을 노릴 가능성도 있음. 여러모로 위험한 선택.”
꼬맹이의 말에는 나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야 군사 대 군사로 대치한 상황에서 평화 회담까지 결렬된다면 그 이후에는 잠재적 적으로 전락하는 것인데, 그러면 유비를 살려둘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명분은?
아무리 황제를 끼고 있더라도 그리 함부로 행동할 수 있나?
“그게 가능한가?”
의문이 생겨 참견하지 않으려다가도 입을 열었다.
“타군의 군주를 제 영지로 불러놓고 습격? 그런 짓을 벌이면 조조라는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거 아니야?”
“이미 천하는 2강의 체제로 굳혀짐. 조조는 원소와 겨루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상황. 일정 부분의 악명을 감수할 수도 있음.”
“난 잘 모르겠네.”
그렇게까지 해서 뭘 얻을 수 있지?
조조라는 여자는 황제를 끼고 어떤 미래를 바라고있는가. 설령 그런 수단으로 한 번의 승리를 거둔다고 해서 그게 대국적인 승리가 될 거로 보이지는 않았다.
승리의 영광은 잠깐이지만, 악명만은 그 사람에게 남아 떨어지지 않는 꼬리표로 남는 법이니까.
“일단 만나는 보죠.”
“그래도 되는 거요?”
“황제 폐하를 모신 대장군의 군이니까요. 게다가 정말 절 죽이려고 해도 쉽게 당할정도로 약하지 않은 걸요?”
유비는 거기까지말하고는 오른팔을 들며 배시시 웃었다.
“그 강한 의남매는 어디에 팔아먹고.”
“둘에게는 혹시 모를 적의 추격에 대비해 군을 맡아 대기하게 하려고요. 사실 소수의 추격대보다는 병사를 풀어 추격하는 게 더 문제니까요.”
군주라는 이가 제 신변을 이리 쉽게 결정지어도 괜찮은가?
“거참, 이러면 나도 목숨 걸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네? 아뇨, 호세 씨는….”
더 말하려는 것 같아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위라며? 그 정도는 해야지.”
전장에 나서는 것은 싫다.
그녀에게 받은 은혜라고 해도 목숨을 걸 정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평소였다면 분명 여기서 발을 뺐겠지.
하지만 도울 수 있는 것을 일부러 무시하고, 그 결과 이 여자가 죽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잠자리가 사나워질 것 같았다.
일이 잘 풀린다면 위험할 일도없을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저들이 정말 직접 손을 대리라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호위라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위험한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살짝 초과업무 했다고 치지 뭐.
“그러면 호세 씨는 성 바깥에서 대기해주세요.”
“응? 따라가도 되는데.”
“아마 소패성 내에서부터 공격하진 않을 거예요. 최소한으로 무마한다고 해도 바깥에서 습격하지, 아예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을 만들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도 그런가.
하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 없이내가 옆에서 지키면….
“호세 씨는 죽은 사람으로 되어있어요. 게다가 과거 직책이 황제 폐하의 직속 중랑장이었는데, 지금 조조군이 황실 측 인사를 다루는 걸고려하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게 나으실 수 있어요.”
유비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언젠가 다시 평범하게 살고 싶으실 때, 이미 조조군과 엮였다면 어떤 방식으로건 그 희망도 무색하게 빛 바랄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을 들으며 잠시 고민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진실은 둘.
하나는 내가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
듣기로는 허도 내 대화재가 있었고, 그걸 수습하는 과정에서 죽었다는 게 조조 측의 정식 발표라고 했다.
그들은 내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했지만, 정작 난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상황.
둘로는 조조가 황실 측 인사를 대거 좌천시키는 중이라는 것.
나는 과거 황실 인사 중에서도 황제의 직속인 중랑장으로 부임했다고 하니, 그 부분에서 조조군의 현 상황으로 판단하자면 그들에게 있어 달갑지 않을 우려도 있었다.
내 과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많았고,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죽음이라는 게 조조군 내에서의 숙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
어떤 방식으로건 나는 당분간 노출되지 않는 게 좋을까.
“쯧, 거참 일 한 번 더럽게 복잡하네.”
“그래도 소패성 바깥에서부터는 잘 부탁할게요.”
어쩔 수 없이 고개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아무 일도 없으면 좋으련만.
허리춤에 찬 청강이라는 검이 오늘따라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