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00. 3년의 공백 (4)
유비에게 의탁하여 서주에 머물고도 한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전부 날 아는 듯 구는 걸 보면 진짜 기억이 없어진 게 맞는 것 같았다.
당장 식객 느낌으로 머물게 되었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그 호의에만 기댈 수도 없어 내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돕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유비의 호위 객장이라는 요상한 신분이 생겼다.
서주목인 데다가 내외로 대륙 정세가 어지러운 관계로 호위가 필요하다고는 하던데, 정작 내가 어디까지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 과정에서 관우라는 사람과 대련을 진행했다.
언니를 맡으려면 조금 더 강해지셔야 한다며 끌고 왔는데, 가슴이 무지 커서 기대했던 적도 있다. 그야 유비에 거의 맞먹는 크기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있었다.
지금은? 과거의 나를 뜯어말리고 싶다.
“벌써 끝입니까.”
“아니… 바닥에 지금 세 번째 구르고 있거든?”
이게 인간인가 싶다.
물론 대련이라 조금 긴장을 푼 것도 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벌써 세 번.
진짜 쪽도 못 쓰고 바닥을 구르는데, 다시 일어나 덤벼도 바닥 행. 어떻게든 버티면서 빈틈을 찾기에는 공세가 너무 매서웠다.
“호세 공의 검은 너무 솔직합니다.”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은 없는데.”
이래 보여도 변칙적으로 검을 휘두른다고 휘둘렀는데, 정작 그 모든 게 그녀에게 가로막혀 도리어 반격당하기만 하니 틀린 말도 아닐까.
관우 운장.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여인은 진짜 괴물이다.
가슴만 대단한 줄 알았는데, 실력은 더 대단하다. 분명 내가 먼저 공격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 말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늪에 발부터 천천히 빠져 묻히는 듯한 감각.
“그래도 역시 강하긴 하네요.”
“세 번이나 자빠뜨리고 할 말인가?”
“저를 상대로 이렇게 버틸 수 있는 이도 별로 없습니다.”
와, 진짜 자신감 미쳤네.
그런데 이 정도 실력이면 당연한 거 같기도 하고?
그와 별개로 확실히 나도 놀랐긴 했다.
내가 이렇게 잘 움직였던가? 관우의 공격은 분명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먼저 들어오는 느낌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 신체가 그것에 반응하여 검을 치켜들었다.
확실하게 말해 이전까지의 나랑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기억 없는 사이에 얼마나 강해진 거야.
[ 전호 호세 ]
통솔력 - 87
무력 - 90
지력 - 82
정치력 - 75
매력 – 89
순간 시야에 이상한 허상이 비쳤다.
이것저것 쓰인 하나의 창이었는데, 분명 그 위에는 내 이름이 적혀있다. 통솔과 무력, 지력, 정치력.그리고 매력이라는 단어가 적혀 다섯 개로 나뉜 숫자들.
허공에 너울거리는 것이 마치 아지랑이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호세 공?”
“이거 안 보이쇼?”
“이거라니요?”
나만 보이나.
손을 뻗어 살짝 흔드니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니, 아무것도 아니요.”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목검을 맞대고서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정오에 식사를 같이한 뒤로 유비를 따라 성내 순회에 동참한다고 했던 걸 떠올렸다.
“어우, 삭신이야. 이제부터 일해야 하는 사람을 너무 개처럼 팬 거 아니요?”
“평소의 노력은 보답 받는 법이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 끄덕이고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살짝 복장이 흐트러지며 보인 가슴골이 가려지는 게 조금 안타깝다.
유비도 그렇고 관우도 그랬는데, 다들 가슴이 크다.
그거 하나만은 정말 인정한다.
“우선 호세 공이 속도와 기세에 맡겨 본능으로 움직인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강자와 맞붙을 때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가실 필요는 있을 것 같네요.”
“그런가?”
“전세를 뒤바꿀 힘. 그것은 한 발짝 내딛는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녀는 고개 끄덕이고는 지금껏 대련을 위해 쓴 봉을 내려놓고는 옆에 걸쳐두었던 본인의 언월도를 꺼냈다.
묵직하니 그녀의 손에 들리는 언월도.
“호세 공의 실력으로도 어지간한 이들을 적수가 아니겠지만, 그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 했을 때는 부족함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한 발이라고.”
“강자에게 도전하기위한 한 발짝은 자칫 무모함이 될 수 있지만, 거기서 끌어내는 역전의 가능성도 있는 법. 지키며 수세에 접어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나 그대로 점점 밀려날 뿐입니다.”
솔직히 이렇게 강한 사람을 상대로 싸운 기억이 없었다.
병사로서 전쟁에 임한 게 마지막 기억. 일개 병사가 전장에서 오래 살아남는 방법으로는 가장 먼저 강자를 피하는 것에 있었다.
솔직히 나보다 강한 이랑 싸운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분명 호세 공의 감각은 천부적입니다. 제가 이어갈 공격과 그 흐름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계신 듯하지만, 거기서 한 발짝.”
그녀는 살짝 다가오며 내 검에 언월도를 얹었다.
“그 걸음을 떼지 못하면 자신보다 강한 강자는 이길 수 없습니다.”
밀리고 싶지 않다면 한 발짝을 더 나서라고.
그녀는 고개 끄덕이며 말을 마쳤다.
“그러면 슬슬 가실까요.”
“당신도 그 식사에 꼈나?”
“언니는 식사하실 때도 여럿 모여서 식사하시길 선호하시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전부 다 불러서 드시지는 않지만, 적어도 관청에서 일하는 주요 관료들은 전부 모여서 함께 식사하고는 하니까요.”
난 또 이쪽만 불린 줄 알았는데.
물론 이렇게 다수 모여서 식사하는 편이 낫긴 하다. 그런 미인이랑 단독으로 식사하라는 건 조금 부담스럽긴 하니까.
생각해보면 아름답기는 눈앞의 관우도 마찬가지였네.
따지고 보면 여기에서 일한다는 여자 치고 안 예쁜 사람이 없던 것도 같았다. 유비는 진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관우나 제갈근은 물론.
심지어는 꼬맹이인 제갈량도 그랬다.
“여기는 뭐 관직에 올릴 때 얼굴 보고 뽑으쇼?”
“네? 갑자기 그건 무슨.”
“아니 그냥.”
생각해보니까 이상해서 그렇지.
진짜 외모로 뽑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들 미색이 짙었다. 심지어 남자라던 장비라는 사람도 슬쩍 지나가면서 봤는데, 그 보라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미동이라는 느낌이었다.
그 외견으로 나보다 나이 훨씬 많다고 하던데.
장비라는 사람은 노화가 진짜 빨리 멈춘 거겠지.
“그럼 가시죠.”
“예입.”
관우의 손짓에 고개 끄덕였다.
신세만 지기 뭣해서 이것저것 자잘한 일은 돕겠다고 했지만, 병주 산골짜기에 박혀있던 내가 어디까지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냥 적당히 할 수 있는 일만 하자.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의문으로 남는 게, 과거의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장에 나설 생각을 했을까. 지금도 이렇게 일하기 싫은데, 스스로 전장에 나선다고?
머리에 화살 대여섯 대 꽂히지 않고서야 무슨.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나를 따라와. 그러면 천하 만민, 그 누구 하나 배 굶주리지 않고 등 따듯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줄 테니까.’
순간 목소리가.
환청처럼 그저 홀연히 떠올린 그 목소리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를 그게 돌연.
살짝 눈 따가운 듯한 감각을 느꼈다.
* * *
은발의 여성은 다리를 꼬고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군비가 부족하다.”
“이것도 꽤 한계까지 모은 건데요?”
“원소는 공손찬을 몰아붙이고 있다. 한때 북방의 맹장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북평 인근에 머물며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하북 전체가원소의 손에 넘어간 순간 천하의 판도는 원소에게 크게 넘어간다.
그 발언에 그녀 맞은편에 앉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지만요.”
“봉효, 군비를 더 확장한다. 서주의 건은?”
그녀의 질문에 봉효라고 불린 여인, 곽가가 살짝 표정을 흐렸다.
“그쪽은 여전하죠. 태도를 확실하게 하질 않으니까요. 저희에게 협조적인 듯하면서도 원소와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요.”
“공손찬으로부터 시작한 여인이 원소의 손을 잡겠다고.”
우습다는 듯 몇 번 웃는다.
하지만 그 표정이. 무엇보다 그녀의 붉은 눈은 전혀 웃기지 않은 듯 선명한 붉은 빛을 발하며 날이 선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서주를 압박한다. 진소연은?”
“상서령이라면 형주 방면으로 방비를 강화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원소와의 결전을 준비하려면, 그쪽을 확실히 해둬야만 할 테니까요.”
“그런가.”
현 천하는 조조군과 원소군의 양강체제.
조조군의 입장에서는 황제를 등에 업은 시점에서 확실하게 사방을 진정시키고 싶었고, 원소는 중원 일대가 평정되기 전에 빠르게 하북을 손아귀에 잡으려 했다.
의지와 의지의 싸움.
이 전장에서 정해지는 것은 천하의 패권.
“자비는 없다. 서주목에게도 슬슬 확실히 정하도록 해야겠다.”
“그래도 조금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조공.”
곽가의 말에 그녀, 조조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천하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격류다. 이런 상황에서 모호한 태도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도태를 의미하지.”
“너무 압박했다가는….”
자칫 잘못했다가는 반발이 생길 수 있었다.
서주가 작은 땅덩어리도 아니었고, 만약 그곳과 전쟁이라도 벌어지게 된다면 쉽게 끝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게다가 천하 전체가 조조와 원소의 행보에 눈을 두고 있었다.
여기서 명분 없이 유비를 공격하게 된다면 그 반발은 어떻게 대처할까. 안 그래도 조조의 군비 확장에 위협을 느낀 군벌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조조는 여전히 단호하게 답했다.
“고작 이 정도로 본인을 등질 것이라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겠지.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고 예주 국경으로 하여 소패 인근으로 병력을 돌리도록.”
“예, 대장군.”
조조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허도 염상으로부터 2년 반.
원소의 공작으로 내부에서 큰 진통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이들도 있었고, 그 사후처리에만 거의 1년 넘게 허비했다.
“원소. 드디어 너에게 가까워진다.”
그 생살을 씹어 삼키겠다.
조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날 이후 그녀는 잠도 잘 자지 못했다.
그 허도 염상으로 순욱과 전호를 잃었다. 순욱의 경우에는 여러 구설수도 있었지만, 전호 같은경우에는 그 과정에 휘말려 전사했다고 보는 게 좋을까.
그는 화마에 집어 삼켜져 시체도 찾지 못했다.
“원소의 목을 그의 묘소에 올리면 좋아할까.”
“중랑장이라면….”
“됐다. 사자의 의향을 어림짐작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지.”
조조는 손짓으로 곽가를 자리에서 물리고 혼자 집무실에 남았다.
자신은 그를 사랑했을까.
분명 가지고 싶은 사람이었고, 마음으로부터 굴복시키고 싶었다. 그녀 본인과는 정반대에 가까운 남자이니만큼, 그를 힘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따르게 하고자 했다.
그녀는 그걸 사랑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 몸을 겹치면서도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남자가 죽은 이후 뻥 뚫려버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무엇인가.
“본인은 언제나 제 욕망을 알아채는 게 느리군.”
그렇기에 언제나 떠나보내고 후회한다.
조조는 탁자에 엎드려 쓸쓸히 웃었다.
미련한 남자. 본인의 것을 눈치도 없이 훔쳐가고는, 그 대가를 치르기도 전에 먼저 떠나는가. 장차 천하를 지배할 이 조조 맹덕의 마음을 이리 뒤흔드는가.
“참 부질없는 짓이다.”
그녀는 잠시 탁자에 엎드려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 빈 듯한 감각을 느끼며, 그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것은 남겨진 자의 의무이자 숙명.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길이없었다.
하여 조조는 그렇게 잠시 침묵한다.
천하 정세는 이미 누구도 걷잡을 수 없다.
그녀 또한 그 격류의 정중앙에 선 인물로, 언젠가는 다시 움직여야 할 터. 하지만 아주 잠시라면 그 그리움에 젖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