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00. 3년의 공백 (1)
머리가 아팠다.
눈을 떠도 보이는 건 그저 눈 내리는 들판. 그저 너른 들판을 기준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들었다.
펑펑 내리는 눈은 세계를 새하얗게 물들일 것만 같다.
손을 뻗으니 손바닥 안으로 차가운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져 녹아내려 흐른다. 그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그냥 그런 생각을 하며천천히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사방으로 분주한사람들의 모습과 주기적으로 무리 지어 움직이는 병사와 그 호송 물자. 이 근방으로는 혹시 전쟁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근래 황건적이다 뭐다 하며 혼란스러웠으니까. 그러니 이런 모습은 그리 드문 게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착잡한 풍경이기도 했다.
세상에 전쟁이란 과연 없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씁쓸한 생각을 들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그런 식으로 며칠에 걸쳐 그저 하염없이 걸었다.
내가 아는 곳도 아닌 듯했고, 무엇보다 같이 움직이던 놈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 세계에 홀로 동떨어져, 마치 다른 세계에 버려진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건 또 귀신이혹할 일이지 않은가.
며칠에 걸친 이게 꿈이라면 지금이라도 깨도 좋다. 이 이상 더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재미없는 농담을 몇 번에 걸쳐 꾸준히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
물론 꿈이 아니라는 건 이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알겠다마는.
그렇게 또 며칠을 더 걸어 다니며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한 성채에 도착했다.
제법 큰 규모의 성. 사람들의 말로는 서주성이라고 하는데, 내가 있던 곳은 병주 끄트머리에 자리한 변방. 그것도 산골짜기에 겨우 자리한 조그마한 산채였다.
병주에 있던 사람이 눈 깜빡하니 서주?
이건 또 무슨.
그래도 당장 돌아갈 방법도 없고, 우선 가려고 해도 여비를 벌지 않으면 곤란할 듯하여 서주성 내부로 향했다.
확실히 안쪽으로 들어서니 이런저런 인간군상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아 이 근방으로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서주라면 나름 평화로운 곳이라고 들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려나.
솔직히 더 전쟁에 나설 마음도 없었고, 어차피 거쳐 갈 곳이었기에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오늘은 묵을 곳이나 알아봐야 할까.
그런 생각으로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중랑장?”
오는 길에 이것저것 소일거리를 해 여비는 조금 확보했지만, 그것도 충분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서주에서 병주까지는 굉장히 먼 길.
당장이 푼돈으로버틸 수 있는 기한이라고 해도….
“중랑장!!”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서주에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돌렸고, 그 뒤로는 잠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갈색 생머리에 청록색 눈동자.
귀가 긴 것이 보였지만, 그런 평범하지 않은 모습을 포함하더라도 내 살면서 이것보다 더한 미인을 본 적이 있던가?
글쎄. 당장 기억나는 얼굴은 없는데.
“아아, 그 청강검에 그 모습. 역시 그랬네요.”
그녀는 내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조금 아려올 정도.
“하지만 당신이 왜. 이미 죽었다고 소문이 파다했는데, 왜 서주에 계신 거죠? 지금 조조와는 어떻게 되신 건지.”
“거 미안한데 말이야.”
당황스러움도 잠시.
대단한 미인이 갑자기 말 걸어온 것도 당혹스러웠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게 하나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 유비 현덕 ]
통솔력 – 82
무력 – 78
지력 – 84
정치력 – 88
매력 – 99
순간 시야에 묘한 게 잡혔지만, 살짝 놀람과 동시에 시야를 가려 걸리적거린다고 생각하니 또 금방 사라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 미인은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사람 잘못 보셨다는 말이지. 나 같은 한량이 무슨.”
복장을 보나 뭘 보나 꽤 높으신 분 같은데, 그런 분이랑 엮일만한 구석이 없다. 왜인지 몰라도 갑자기 서주로 옮겨졌지만, 내 본거지는 병주.
그 눈 펑펑 내리는 산골짜기가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찾는 이가 아닌 것 같수.”
거참, 깜짝 놀랐네.
저런 미인이 갑자기 말 걸어도 곤란할 뿐이다.
“그럴 리가….”
“그러고 저러고가 어딨소.”
“하지만 그 목소리도 그렇고, 그 모습, 무엇보다 그 청강검까지. 당신께서 중랑장이 아니라고 하시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중랑장? 그건 또 뭔데.
이 검은 서주에서 눈 떴을 때부터 허리춤에 차고 있기에 일단 쓰고 있을 뿐이었다. 비싼 검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누구 것인지는 몰라도 내 허리춤에 있으니 일단 썼지.
“아, 혹시 이 검의 원래 주인이쇼? 그럼 미안하게 됐고. 그냥 왠지 모르겠는데, 여기 있을 때부터 내 허리춤에 매였더라고.”
검을 풀어 슬쩍 내밀었는데,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니면 아니지, 소리는 왜 질러.”
그리고 왜 그렇게 이상한 눈초리로 이쪽을 보나.
난 진짜 이런 미인을 알고 지낸 적이 없다. 조금이라도 스쳐 지나갔더라면 이런 미인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나.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시는 거예요?”
“기억이고 자시고, 난 애당초 병주 사람이라니까?”
“조조랑 진소연은, 그 사람들도요?”
조조라면 한때 얼굴을 보았던 기억은 있다.
과거 영천 전투에서 그 휘하 소년병으로 일했던 경험은 있어 이름과 얼굴까지는 기억했지만, 진소연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인데.
“아니, 난 잘 모르겠고.”
“그러면 지금 벌어질 전쟁도 모르시는 건가요?”
“전쟁? 뭐 아직 황건적 잔당이 남았나?”
그 말에 그녀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황건적이라니.”
“아니 뭐, 그 장각이라는 놈이 죽었어도, 아직 뭐 남았잖아? 흑산적도 비슷한 놈들이고. 그게 아니면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물론 그 휘하에서 직접 싸웠고, 그 과정에서 황건적의 중추가 무너졌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만한 민란이었고, 그 잔존 병력도 아직 활개하고 있다고 들은 기억은 있다.
“잠깐만요. 올해가 몇 년도인지 아세요? 197년. 당신의 기억은 이게 맞나요?”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지금 189년이잖아.”
“예?”
아니, 이게 진짜 무슨 소리야?
무슨 197년이 왜 나와.
그녀와 나는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우리 둘 사이에는 이해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서로 이해하는 게 달랐고, 무엇보다 그녀는 나를 아는 듯했지만, 나는 이 여자를 전혀 몰랐다.
그 부분에서는 조금 대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