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0
정무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고위 귀족들이 황성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로 인해 마차의 기다란 행렬이 황궁까지 이어졌다.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평소라면 금방 지나쳤을 길목에서 체증을 빚고 있었다.
“대체 밖에서 뭘 하기에 이렇게 막히는 거야.”
길어지는 기다림에 반델리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히며 거칠게 마차의 창을 내렸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곧바로 마주한 것은 생소한 광경이었다.
많은 사람이 단체로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느라 황궁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낯선 것은 맨 앞줄에 있는 남자의 행색이었다. 위풍당당하던 헨리킨 엔드로가 허름한 차림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엔드로 공작이 사람을 사주해서 아리아드 피어슨을 죽이려고 했던 정황이 드러나 조사를 받고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직접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반델리는 불과 몇 초 전까지 짜증을 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몇 달 전 다니엘 매킨리가 열었던 마지막 파티에 참석했었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어디선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데온은 구석에서 혼자 샴페인을 들이켜고 있던 반델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콩고물은 좀 떨어지디?”
돈과 명예, 모든 것을 쥐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자신과는 다르게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애쓰는 자신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의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델리는 어느 날부터인가 원래 다니엘의 세력이었던 자들에게서 조금씩 배척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결국 그러한 소외감에 속이 타들어 가 빈속에 샴페인을 들이켜는 처지였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뭐…. 나쁘지는 않습니다.”
데온은 그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더니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다니엘의 집무실에서 몬트롤 서약서와 함께 훔쳐 온 편지였다.
그는 그 두꺼운 종이를 휙 내던졌다. 얼떨결에 편지를 받아 든 반델리는 멀거니 서 있다가 봉투를 살폈다.
“다니엘이 즉위식이 끝나고 황제가 되면 조슈아의 편으로 돌아설 수도 있는 사람들을 정리할 거라는 내용이 쓰여 있어.”
반델리는 접혀 있는 종이를 펴서 읽어 내려갔다. 다니엘과 그의 측근이 주고받은 편지로 보였다.
“그중에 우리 둘도 껴 있지 않겠어?”
“그래도…. 조슈아 매킨리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공작님은 그편에 서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렇게 됐던 결정적인 이유가 너 때문이었던 거 같은데. 내 밑에서 일하던 비서랑 네가 황실의 돈을 빼돌려서 내가 몽땅 뒤집어썼었지.”
“그건…. 반성하고 있습니다.”
예리한 말에 그는 고개를 떨궈 시선을 피했다.
“…저는 그럼 어디로 가야 합니까?”
“네가 살 수 있는 쪽에 붙어야겠지.”
데온은 어깨를 툭 치며 그를 지나쳤다.
“줄을 잘 서라고.”
그 당시 나직하게 들려왔던 그의 말이 귓가를 윙윙 맴돌았다. 그의 시야 안에는 편지의 내용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즉위식 이후에 조슈아 편이었던 자들을 모두 정리할 예정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위험 요소를 아예 제거하시려는 선택이 아주 현명하십니다. 반역으로 몰아가는 방법이 제일 편할 듯하오니, 제가 그쪽으로 여러 방법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라트베아를 떠나 랑뱅 항구 도시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반델리의 고민은 계속됐다. 내가 살 수 있는 쪽이 도대체 어디인가.
야속하게도 선택의 순간은 빠르게 다가왔다.
예상치도 못한 기습에 모두가 혼비백산이 되어 있을 때, 총사령관인 다니엘 매킨리는 그 누구보다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려 도망치고 있었다. 반델리는 홀린 듯이 그의 뒤를 밟아 산길을 올랐다.
“포티어스 후작!”
조슈아가 겨눈 총은 정확히 그의 관자놀이에 닿아 있었다. 그 상황에서 다니엘은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하고 반갑게 그를 불렀다.
반델리는 총을 꽉 쥐어 그들에게 겨누었다. 선택의 순간. 훗날, 모든 건 제 손에 달려 있었고 그리하여 그만큼 냉혹한 순간이었다.
반짝거리는 적갈색 눈동자는 이미 결과를 확신하며 기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델리는 그 순간까지 고민을 거듭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방아쇠에 닿아 있는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려 왔다. 총구의 방향이 바뀐 것은 그 순간이었다.
탕―
침엽수로 뒤덮인 푸르른 산속에서 거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활기가 돌아 반짝이던 적갈색 눈망울은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결국 반델리의 선택은 조슈아 매킨리였던 것이다.
반델리는 그러한 과거를 회상하다가 창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번득 정신을 차렸다.
“엔드로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조슈아의 목소리였다. 그는 초라한 행색에 애써 귀족들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헨리킨 엔드로를 정확하게 집어 이목을 모았다.
“다니엘 매킨리가 전쟁터에서 죽어 공작님을 지켜 줄 이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말에 헨리킨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핏발 선 눈으로 제 앞에 선 남자를 노려봤다.
“당신이 죽였으면서 뻔뻔하군.”
“억측이 과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혈육인데, 제가 어떻게 그러했겠습니까.”
조슈아는 그 앞에서 소리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금방 다시 마차에 올랐다. 다수의 인원이 빠져나가자 길목이 트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반델리가 타고 있는 마차도 천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멀어지는 헨리킨 엔드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창을 닫았다.
그리고 닭살이 올라온 두 팔을 손으로 쓸며 중얼거렸다.
“어휴, 역시 줄을 잘 서야 해.”
* * *
황성 앞에서 했던 조슈아와의 입맞춤 때문에 며칠간 아주 난리였다.
돌아온 제국군들을 찍기 위해 몰려 있던 기자들은 더 흥미로운 화제로 눈길을 돌렸다. 결국 일간지 맨 앞을 장식하게 된 건 정신 나간 황태자와 희대 악녀의 키스 장면이었다.
더불어 갖은 억측도 함께였다. 본래 켈리 유레시아는 자의로 황태자비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사실은 아리아드 피어슨 때문에 쫓겨난 것이 아니냐는 구설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소희는 그러한 세간의 시선에 언제나 그랬듯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보다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건 그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비앙카의 반응이었다.
소희를 황궁으로 불러 얼마나 호되게 꾸짖던지. 파리하게 질린 낯으로 두 번 다시 이런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는 말을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들어야 했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에 소희는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 반복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억울한 부분이었다. 물론 처음 시작한 건 본인이었지만 그에 응해 조슈아도 같이 입을 맞췄는데 왜 저 혼자 그리 쓴소리를 들어야 했던 건지.
소희는 굳이 별채까지 와서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남자를 노려봤다. 그땐 정말 그 많은 인파를 모조리 지워 버린 듯 이 세상에 단둘만 있는 느낌이었다. 조슈아도 그런 기분이었을까.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며 그때 기분을 회상하는데 갑작스레 조슈아가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그의 눈은 예쁜 곡선을 그렸다. 소희는 그 말간 웃음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로 사람을 홀리는데, 역시 그날의 입맞춤은 제 잘못이 아닌 게 분명했다.
문득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희는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널 죽이려고 했던 게 엔드로 공작이 시킨 일이라는 걸 어떻게 털어놓게 했어?”
그 질문에 소희는 별채에 들이닥쳤던 침입자를 손봤던 때를 떠올렸다.
“음…. 그냥 좋게 달랬더니 털어놓던데.”
말을 얼버무리며 머쓱한 미소로 마무리하자 그는 더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소희는 이 이상 말해 줄 수 없었다.
부지깽이를 벽난로에 달궈 그걸 휘두르면서 협박했다고 어찌 말한단 말인가. 자신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을 더는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소희의 대답이 석연찮은 듯 빤히 바라보던 눈동자가 얼마 뒤 그녀의 뒤편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는 느른하게 몸을 기댄 채 앉아 있는 데온이 있었다. 일순 조슈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필트모어 공작, 이제 적당히 하고 나가.”
“손이 너무 아파. 아직 아리의 간호가 필요해.”
“너희 저택으로 돌아가서 치료해.”
“어허,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대우가 너무 박하다.”
“대우가 박해? 내가 돈을 상당히 많이 챙겨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난 돈은 필요 없어.”
“그럼 뭐가 필요한데.”
“아리.”
“그건 못 줘. 당장 나가.”
“그럼 어쩔 수 없지.”
한 달 전에 다쳤던 데온의 팔은 아직도 붕대로 감겨 있었다. 그는 그 두 팔을 허공에 흔들어 보이면서 소파에 팔자 좋게 털썩 드러누웠다.
평소 속을 알 수 없는 여유로운 낯만 보이던 조슈아는, 데온을 마주할 때면 제 감정을 곧잘 드러내 보이곤 했다. 이를 으드득 갈고 있는 지금처럼 말이다.
소희는 조슈아가 오면 데온과 제 사이에 명확한 선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데온과 멀어지는 과정이 자연스러울 것이라 여겼지만 그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건 제 선택에 따른 게 아니었다. 그는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아주 제멋대로였으니까. 자신 또한 부드럽게 달랠 수는 있어도 쓴소리는 뱉지 못했으니 결국 이렇게 같이 별채에 머무는 이상한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
“다들 저녁 식사 하세요.”
날 선 분위기 속으로 메리가 끼어들었다. 양손에 들려 있던 접시를 내려놓자 빛깔 좋은 음식들이 보였다.
그 앞에 앉아 있던 소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 나 화장실 좀.”
갑자기 미친 듯이 속이 울렁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