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09화 (109/120)

Chapter 109

차가운 바람에 비릿한 피 냄새가 한가득 실려 불어왔다.

치열한 전투로 인해 이제는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뒤엉켜 있는 병사들은 그저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 보이는 이들을 쏴 죽였다.

그러한 격전지를 버려 두고 다니엘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기습으로 궁지에 몰리자 그는 일찌감치 제 사람들을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총상을 입은 다리 때문에 멀리까지 도망 오지 못했다. 다니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커다란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먼 거리에서 붉은 눈망울과 마주하자 그는 딱딱히 굳었다. 조슈아는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니엘은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감지했다. 주변에 부하들도 없었기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 앞까지 다다른 조슈아는 낮게 중얼거렸다.

“다니엘, 여기 있었네.”

“….”

“아직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꼭 내 손으로 보내 주고 싶었거든.”

뒷걸음질 치던 다니엘은 결국 주저앉았다. 손발이 달달 떨려 왔지만 그는 괜히 악에 받쳐 빈정거렸다.

“군이 거의 전멸했는데, 네가 무사히 돌아간다고 해서 환영받을 수 있을 거 같아?”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고, 목에는 핏대가 솟아 있는 모습을 보며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는 관심 없어. 그냥 널 죽이고 싶을 뿐이지. 똑같이 되돌려 주겠다고 했잖아.”

그 말에 다니엘은 예전 무역선 폭발 사고로 성당에 갔던 일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똑같이 되돌려 줄게. 죽은 사람의 수만큼, 똑같이.’

조슈아는 결국 말한 대로 이루어 냈다. 조슈아를 감시한다며 그의 밑에 전부 제 수하들을 둔 결정이 큰 실수였다는 걸 다니엘은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세력이 조금이라도 껴 있었다면 조슈아는 이렇게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독한 새끼.”

조슈아는 총구를 그의 머리에 갖다 댔다. 다니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봤다. 이대로 정말 끝인 건가. 그리 눈앞이 깜깜해지고 있을 때였다.

조슈아 뒤쪽으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지금 다니엘에게는 무엇보다 굉장히 반가운 사람이었다.

그는 목청껏 그 이름을 불렀다.

“포티어스 후작!”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제 편이 여기에 나타나다니.

그가 총을 든 채로 조슈아의 등을 겨누고 있는 게 보였다. 그제서야 다니엘은 식은땀으로 잔뜩 젖은 얼굴 위에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띠었다.

“자, 조슈아. 이제 어떻게 할래?”

다니엘은 잔뜩 쉰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낮게 웃었다. 그와 함께 반델리는 총을 들고 있던 오른손에 힘을 실었다.

철컥, 방아쇠는 당겨졌다.

* * *

제국군이 뜻밖의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이 라트베아 도시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황자 중 한 명이 죽었다지?”

“총사령관인 다니엘 매킨리가 죽었다던데.”

“아니야, 조슈아 매킨리가 죽었대.”

사실 소희는 처음 이 소문을 접했을 때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아무리 기본 설정이 피폐물인 소설이라고 해도 남자 주인공이 죽는 소설이 어딨냐며 대충 넘겼다. 그리고 똑똑한 조슈아가 자신이 죽는 길을 택했을 리 없다는 확신도 함께였다.

그런데 조슈아의 사망설이 귀에 인이 새겨질 정도로 오르내리자 어느 순간 마음 한구석에 제 믿음에 대한 불신이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작게만 자리해 있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찌나 소문이 흉흉하게 도는지, 조슈아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고사를 지내던 데온도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며칠 전에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소희에게 그놈이 그렇게 죽었을 리가 없다며 위로까지 해 주는 지경이 되었다.

조슈아가 약속했던 석 달에서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무렵이었다. 약속했던 날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안 그래도 지쳐 있던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리고 오늘, 살아남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인을 메리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사람이 정말 많을 텐데 꼭 가셔야겠어요?”

“메리, 나 초조해서 말라 죽을 지경이야. 내 눈으로 빨리 확인해야겠어.”

“아리아드 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 데온 공작님을 불러서 같이 가는 건 어때요? 낮 시간이라 오시기 힘들까요?”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어차피 조슈아가 붙여 둔 기사가 주변을 지킬 거니까 괜찮을 거야.”

결국 메리는 별채를 나서는 소희를 잡지 못했다. 조슈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로 그녀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다.

소희의 걸음걸음마다 하얀 발자국이 찍혔다. 오늘 새벽, 올겨울 첫눈이 내렸다. 첫눈은 그녀에게 항상 좋은 소식을 들고 오곤 했다.

대학 합격 소식, 공모전 대상, 월매출 1위. 그 좋은 소식들은 눈꽃 바람과 함께 찾아왔다. 그러니 제 인생 속 이론대로라면 조슈아도 살아 있어야 했다.

소희는 소복이 쌓여 가는 눈을 밟으며 황성 앞에 다다랐다. 추운 날씨에도 꽤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고 앞줄을 차지하기 위해 그사이를 정신없이 뚫고 들어갔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렸다. 눈발만 휘날리던 시야 안으로 제복을 입은 제국군들이 점점 선명해졌다.

맨 앞줄에 들어서고 있는 건 하얀 관이었다.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관이 유독 눈에 띄었다. 소희는 그곳에 단숨에 시선이 사로잡혀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초인적인 힘이 생겨났다. 시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줄을 넘어서고 제 앞을 막는 기사의 몸을 밀쳐 냈다. 소희의 머릿속에는 온통 저 관 속에 있는 인물이 누군지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단숨에 관 앞까지 도착한 소희는 그 앞에 주저앉을 뻔한 것을 버텨 냈다.

석 달 전 조슈아를 배웅해 줄 때 봤던 제복의 휘장이 관 안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얼굴은 까맣게 일그러져 알아볼 수도 없었고, 하얀 제복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건 그 금빛 휘장뿐이었다.

소희가 관을 붙잡고 울자 기사들이 몰려들며 소란스러워졌다. 한참 뒤, 그곳에서 소희를 떼어 내기 위해 힘을 주던 남자들은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느닷없는 침묵에 소희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관 속에 있는 시체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뭐야…. 가죽 장갑을 끼고 있네….”

뒤늦게 그런 깨달음을 얻었을 때였다.

그때 누군가 소희를 돌려세웠다. 곧바로 눈에 들어온 건 관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금빛 휘장이었다.

“왜 여기서 통곡을 하고 있어.”

나직한 목소리에 소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자는 소희의 모자 위에 쌓인 눈을 털어 주다가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뺨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손끝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조슈아.”

“응.”

그는 추위로 코끝만 살짝 빨개졌을 뿐 전과 다를 거 없는 아주 멀쩡한 얼굴이었다. 또 그 얼굴로 저 혼자 속 편하게 유려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소희는 전보다 감정이 더욱 복받쳐 올라 엉엉 울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

“왜 이제 왔어. 삼 개월이면 온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지금 일주일이나 더 지났다고….”

울먹거려서 알아듣기도 힘든 말소리였다. 그런데 조슈아는 그걸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울고 있는 소희를 놀리는 듯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미안. 일주일이나 더 늦어서. 근데 지금 너 얼굴 진짜 웃긴 거 알아?”

“훌쩍, 그게 지금 할 말이냐고오….”

조슈아는 제 가슴을 때리고 있던 그녀의 주먹을 잡고는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소희를 달래 주는 듯 꽉 끌어안았다. 차가운 날씨에 얼어 있던 몸이 점차 따스한 체온에 녹아 흐물흐물해졌다.

한참 뒤에 조슈아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을 많이 했어.”

소희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그냥 그 품속에 파묻혀 훌쩍거리기만 했다.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꿀이라도 바른 듯 달콤했다.

“난 좋아한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돼. 이 말이 적당한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거보다 더 좋은 단어는 없는 거 같아서….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한참을 망설이던 조슈아는 뒤늦게 본론을 꺼내 놓았다.

“사랑해.”

얼굴에 닿아 있는 가슴에서 쿵쿵, 불규칙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제야 소희는 남자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예전에 자신이 좋아한다고 했던 말에 대한 대답이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너는?”

이번에는 조슈아가 물었다.

소희는 예전 일에 복수하듯 아무런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대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눈을 마주하다가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조슈아는 이번에도 놀란 듯 눈이 커다래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붉은 입술이 벙긋거렸지만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가 그 입술을 금방 삼켜 버렸으니까. 당황한 듯 굳어 있던 남자는 금방 그 입맞춤에 응하며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한 입맞춤은 소희의 눈물로 인해 짭짤했고,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 달콤했으며, 또 그 마음의 온도만큼이나 뜨거웠다.

사랑한다는 말에 그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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