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8
꽤 오랜 이동 끝에 군대는 랑뱅 도시 초입에 도착했다. 그곳에 프랭클린 제국군은 각각 1군단과 2군단으로 나눠 다른 지역에 막사를 치고 머물고 있었다.
항구 도시를 에워싸고 동시에 기습 작전을 펼쳐야 했기에 타이밍이 중요했다. 1군단에서 폭죽을 쏘면 2군단이 그 신호를 확인하고 함께 출발한다는 작전이었다.
어마어마한 병력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작전만 그대로 잘 이행한다면 다니엘의 계획은 틀어질 일이 없었다.
늦은 밤.
병사들은 막사 밖에서 대기하며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약속해 놓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 들려오는 고요 속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얼마 안 가 폭죽 소리가 지척을 뒤흔들었다.
이동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저하, 출발 신호가 왔습니다.”
막사 안에 있던 병사가 조슈아에게 말했다. 급박하게 진군 준비를 하고 있던 병사들과는 다르게 그는 간이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총대를 돌리고 있었다.
“저하.”
재촉하는 말소리에 조슈아는 느릿하게 제복 상의를 챙겨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향을 1군단 쪽으로 돌려서 합류한다.”
“네?”
갑작스러운 명령에 병사는 의문을 표했다.
“총사령관님이 명하셨던 일이 아닙니다. 진군해야 합니다.”
이번 일에 나선 사람들이 모두가 다니엘의 수하였기에 그의 명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 그럼에도 조슈아는 아무 말 없이 막사 입구로 걸어 나왔다.
그는 불꽃이 사라진 까만 밤하늘을 올려 봤다. 그 기이한 행동에 조슈아를 쫓아 막사를 나온 병사는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그때였다.
폭죽이 한 번 더 터졌다. 뒤이어 반복적으로 터지는 불꽃은 까만 하늘을 예쁘게 수놓고 있었지만 병사들에게는 공포심을 자극할 뿐이었다.
그들이 정해 놓은 신호가 있었다. 폭죽 한 번은 진군, 두 번은 진군을 멈춤, 세 번은 도움 요청. 폭죽은 정확하게 세 번 터졌고, 저건 1군단에서 보내는 도움 요청의 신호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막사 앞에 모여 있던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조슈아는 무감한 표정으로 불꽃이 사그라지는 밤하늘을 여유롭게 감상하다가 입술을 뗐다.
“전군, 1군단 쪽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조금 전 내렸던 명을 반복했다.
* * *
1군단 쪽 진영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막사마다 불이 붙어 있었고 요란한 총성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이는 던마크 제국의 총사령관인 레이널이 습격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난장판이 된 진영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레이널은 죽어 가는 적군들을 바라보며 쯧, 혀를 찼다.
“정말 도시 하나를 속수무책으로 뺏길 뻔했군.”
눈앞에 펼쳐진 타국 병사들의 참상이, 잘못 했으면 제 부하들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레이널이 프랭클린 제국이 들이닥친다는 걸 알고 대비를 할 수 있었던 건, 다 조슈아 매킨리가 정보를 준 덕이었다.
곧이어 그는 저 멀리 나무 뒤편에 전쟁을 방관하듯 서 있던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석 달 전에 내통한 사이였다.
조슈아 매킨리는 몬트롤 지역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먼저 만남을 제안했다. 그리고 거절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 놨다.
“저번 전쟁으로 인해 아끼시는 동생분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레이널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이자가 무얼 원하는지, 무슨 속셈인지 전혀 그 속내가 읽히질 않았다.
“한때 적국끼리 위로라도 하려고 부르신 건 아닐 테고, 본론을 말씀하시지요.”
“심심한 위로와 더불어 복수의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도를 펼쳐 든 조슈아는 던마크 제국 구석에 자리한 랑뱅 항구 도시를 가리켰다.
“대공의 동생분 머리를 잘라 간 다니엘 매킨리가 이번에 노리고 있는 도시입니다. 한 달 뒤면 출정 준비가 모두 끝날 겁니다. 이곳에 복수의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이제야 건너편에 앉은 남자의 속이 훤히 보였다. 그에 레이널은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를 띠었다.
“복수는 무슨. 황위 쟁탈전에 저희 던마크 제국을 이용하시려는 겝니까.”
“서로 원하는 걸 가져가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조슈아는 그 앞에서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 습격을 받으면 던마크 제국에 상당히 치명적일 거라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덧붙이는 말은 사실이었기에 레이널은 반박하지 못했다. 몬트롤 지역을 얻기 위해 전쟁 물자를 쏟아부어 대적할만한 마땅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손 놓고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에 빠져 있는 레이널 앞에 조슈아는 종이 하나를 내려놨다.
“몬트롤 지역 관련 서약서입니다.”
레이널은 그 종이를 집어 들어 읽어 내려갔다.
몬트롤 지역이 프랭클린 제국의 소유라는 약속이 담긴 종이였고 던마크 제국이 지켜야 할 조약들이 적혀 있었다. 던마크 제국 쪽도 이 종이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서약서가 진짜임은 알 수 있었다.
레이널이 책상 위에 종이를 내려놓자 그걸 다시 가져간 조슈아는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지포 라이터를 꺼내더니 그 종이에 불을 붙인 것이다.
서약서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리는 과정을 바라보는 레이널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앞에서 조슈아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종이는 없으니 이 서약은 없던 일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또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제 앞에 있는 종이를 들어 다시 읽어 내려간 레이널은 전보다 더욱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거기에는 랑뱅 항구 도시에 진입했을 때 다니엘을 없애 준다면 몬트롤 지역 전부를 양도하겠다는 새로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부를…? 정말입니까?”
“정말이지요. 저는 몬트롤 지역 전부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황위가 간절한 사람입니다.”
그 말과 함께 조슈아는 레이널이 들고 있던 종이를 뺏어 다시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 서약서는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서로 인장을 찍도록 하지요.”
동생에 대한 복수와 몬트롤 지역이라….
심지어 조슈아 매킨리가 기습에 대한 정보도 알려 줬으니 전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물론 이자가 다른 수가 있다면 낭패였지만.
나중에 변수가 생길 점을 생각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역으로 그들을 부르면 될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레이널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놓인 지도에서 한 지역을 가리켰다.
기습에 있어서 상당히 취약한 지역이었다. 이곳 주변을 다 포위하고 있을 예정이었으니 조슈아 매킨리도 그곳에 함께 갇힌다면 함부로 다른 일을 꾸미기는 힘들 것이다.
“군대가 이곳으로 오게끔 유도해 주십시오. 저희가 숨어 있다가 기습하겠습니다.”
레이널은 불과 몇 달 전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다가 거대한 총성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건너편에 서 있는 남자를 다시 유심히 살폈다.
황위 쟁탈전에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발상인가. 결국 제 밑에 있는 사람들의 피해도 막심할 터인데 참으로 독하고 무서운 지도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일이 끝난다면 돌아가서 조슈아 매킨리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훗날 황제 자리를 거머쥘 자이니 미리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었다.
레이널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슈아 뒤편으로 생각지도 못한 상당수의 병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다가 던마크 제국 병사들을 에워싸고 총을 겨눴다.
“이게 대체 무슨…!”
가까이에 있던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지켜보던 레이널은 충격에 굳어 있다가 볼드릭 벨트에 꽂아 놓은 총을 들었다.
이 지역 안에 있는 병사들이 전부가 아니었다니. 군대를 나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레이널의 생각이 간파당한 게 분명했다. 그는 이를 으드득 갈며 제 앞에 달려드는 타국 병사들에게 총을 쐈다.
저 멀리에 있던 조슈아 매킨리는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한참의 격전 끝에 배에 총상을 입은 레이널은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피신해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알려 주신 지역이 습격에 굉장히 약한 지역이었네요.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레이널은 주먹을 꽉 쥐고 그를 올려 봤다. 조슈아가 쥔 총은 이미 그의 관자놀이에 닿아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 있단 말이오….”
그 말에 조슈아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점을 항상 염두에 두셨어야죠. 저희는 애초에 아군이 아니니까요.”
그 웃음이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천사의 것처럼 맑고 해사했다.
“레이널 대공, 저는 몬트롤 지역을 넘길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먼 발길을 하였기에 항구 도시도 가져가야겠습니다.”
“…이미 서약서는 불태우지 않았소.”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앞에서 무정한 언성이 이어졌다.
“죄송스럽게도, 그건 가짜입니다.”
죄책감 하나 묻지 않은 사과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선혈이 이리저리 튀며 동시에 남자의 몸은 흙바닥으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