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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07화 (107/120)

Chapter 107

누워 있는 여인을 응시하는 녹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남자의 타깃은 명확해 보였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뒹굴고 있는 데온은 신경 쓰지도 않고 천천히 몸을 틀었다.

소희가 눈을 뜬 것은 그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마주한 건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칼을 든 모습이었다.

피할 새도 없이 커다란 손이 목을 꽉 움켜잡고 내리눌렀다. 숨 쉴 구멍이 막히며 순식간에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 남자는 단도를 쥔 손을 움직였다. 그 찰나가 눈앞에서 느릿하게 재생되며 소희는 잠시 딴생각을 했다.

‘이번에 현실로 갔다가 저번처럼 또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지.’

예전에는 나가지 못할 걸 염려했다면 이제는 그 반대였다. 소희는 죽음의 공포보다 그에 대한 걱정이 컸다. 어차피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그렇게 칼끝이 심장 부근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흐릿한 시야 안으로 익숙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짧은 찰나에 데온은 그 앞을 막아섰다. 문제가 있다면 너무 급하게 움직인 나머지 날카로운 칼날을 맨손으로 덥석 잡았다는 것이다.

“…젠장.”

고통으로 인해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오고 소희의 얼굴 위로 피가 튀었다.

데온은 칼날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다른 쪽 손으로 남자를 거칠게 밀었다. 덩치 차이가 두 배나 날 정도니 데온의 힘이 압도적이었다.

결국 남자가 침대 밑으로 떨어지자 데온이 그를 쫓아 손에 쥔 칼을 발로 거칠게 차 냈다. 칼이 날아감과 동시에 남자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목이 꺾인 듯 남자는 손목을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그 위를 올라탄 데온은 남자의 목을 있는 힘껏 졸랐다.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소희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데온의 오른팔과 왼손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침대 위와 그들의 주변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얼굴에 흠뻑 튄 핏물을 천천히 닦아 냈다. 자신이 죽을 뻔했던 상황보다 얼굴을 흠뻑 적신 데온의 핏물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소희는 데온에게 다가갔다. 그의 밑에 깔린 남자는 이미 의식을 잃은 듯 양팔이 축 처져 있었다.

“데온, 이제 그만. 남자는 기절한 거 같아.”

차분한 언성이 들리자 데온은 손에 힘을 풀고 소희를 걱정스럽게 올려 봤다.

“아리, 괜찮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정작 온몸에 칼을 맞고 피를 뒤집어쓴 건 본인이었으면서 그는 그녀의 안위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손과 팔을 타고 떨어진 핏물이 나무 바닥을 적셨다. 데온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고통으로 인해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던 소희의 입 밖으로 나직한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놈은 구석에 묶어 두고 우선 너 상처 치료부터 하자.”

* * *

약통이 여기 어딘가 있었던 거 같은데….

소희는 급하게 서랍을 뒤적거렸다. 의원을 부르면 금방 치료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별채에 데온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일급비밀이었다. 황실 주치의를 불렀다가 자칫 소문이라도 잘못 퍼진다면 데온이나 그녀에게나 좋지 않을 터였다.

특히 비앙카에게 전해진다면 크나큰 낭패였다. 이제야 미운털을 벗고 겨우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서랍에서 약통을 찾은 소희는 곧바로 소파에 앉아 있는 데온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눈이 마주치자 웃어 보였다.

쯧, 소희는 짧게 혀를 차고는 상처를 살폈다. 칼에 찔린 팔과 손을 자세히 보니 혼자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거 같았다.

“상처가 꽤 깊네. 안 되겠다. 의원을 부르는 게 좋을 거 같아.”

이미지보단 데온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그가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을 열어 의외의 말을 꺼냈다.

“동이 트면 필트모어 저택으로 돌아가서 주치의를 부를게.”

밤이 되면 새벽 다섯 시까지 황성 출입이 제한되었고, 데온이 지금 당장 별채를 떠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황성 출입문이 개방되려면 앞으로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 무리야.”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래.”

“왜?”

“뭐…. 내가 여기에 있단 게 알려지면 좋을 게 없으니까.”

마치 제 머릿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조금 전 생각을 똑같이 읊는 남자 때문에 소희는 조금 민망해졌다.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이미지 타령을 하고 있던 걸 들켜 버린 거 같아서.

눈치가 없는 남자는 아리아드를 한정에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가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잠시 굳어 있던 소희는 다시 데온의 팔을 보다가 미간을 구겼다. 꿰매야 할 정도로 벌어진 상처였는데 자신은 맨살을 꿰맬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소희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데온은 힘없이 말을 이어 갔다.

“내 문제 때문에 그래. 겨우 가문을 살려 놨는데 여기다가 똥칠을 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아리, 대충 붕대만 둘러서 지혈해 줘.”

거짓말.

아리아드 때문에 모든 걸 버릴 정도의 결심을 한 사람이 제 이미지를 챙길 리 없었다. 그러니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는 제 처지를 핑계 대며 소희가 원하는 바를 이뤄 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답도 없이 이기적이었다. 이 순간에도 속으로는 데온의 고집을 핑계 삼아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하고 있었으니까.

“버틸 만해. 지금 당장 전문적인 치료는 필요 없어. 정말이야.”

제 죄책감을 덜어 주려는 듯 이어지는 말에 저도 모르게 붕대를 쥔 손에 힘이 잔뜩 실렸다. 결국 소희는 일단은 임시방편으로 치료해 주는 쪽을 선택했다.

그의 팔을 들어 붕대를 두르기 시작하자 그것에도 고통이 따르는지 짙은 잿빛 눈썹이 일그러졌다. 뒤이어 앓는 소리가 들리자 소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금방 할 테니까 조금만 참아.”

그런데 심각해 보이던 데온은 느닷없이 피식거렸다.

머리도 다친 건가.

위에서 샐샐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소희는 붕대를 두르다 말고 그를 올려 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사나운 눈매를 접었다. 잔뜩 흐르는 식은땀에 앞머리가 흠뻑 젖어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는.

“아, 그런데 너무 좋다.”

“….”

“관심받으니까 기분 좋아.”

정말이지 멍청이가 분명했다.

그의 말에 왜인지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밤고구마를 입안 가득 넣어 삼킨 듯 목 끝이 턱 막혀 오며 속이 답답해졌다.

소희는 그 천진한 웃음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애써 다시 자신이 하던 일에 열중하고 있던 때였다. 한참 뒤에 들려오는 다 죽어 가는 언성이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조슈아가 돌아온 데도, 딱 이 정도의 관심만 주라. 난 이걸로 만족.”

“지금 아파 죽겠는데 그런 말이 나와?”

결국 소희는 왈칵 성을 냈다.

“네가 치료해 줘서 다 나은 거 같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처럼 안색이 파리해져서는 저런 말을 잘도 뱉고 있었다.

과분한 사랑 구걸에 또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토록 울화가 치미는 감정은 사실 데온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자신 때문에 다쳤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데온에게 명확하게 선을 긋지 못하는 본인의 모습에.

정말이지 난제였다. 누군가 선을 명확하게 그어 준다면 그걸 지키는 건 오히려 쉬울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게 제 선택에 달려 있으니, 마음은 도통 정확한 길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난리였다.

결국 또 소희는 비겁하게 선택을 보류했다. 조슈아가 돌아와 명확한 선이 그어진다면 그때 정말 깔끔하게 정리하겠노라 다짐하며.

소희는 괜히 붕대를 감던 손에 힘을 주며 치료를 마무리했다. 그러자 남자의 잇새 사이로 다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다 낫긴 개뿔. 누워 있어.”

웅크리고 있던 몸을 피고 일어나 그의 몸을 밀자, 커다란 몸집이 기다란 소파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가 누워서 눈을 감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희는 침입자를 묶어 놨던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별채의 불청객은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단단히 묶은 줄을 풀어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보나 마나 다니엘의 사주를 받고 온 사람이겠지. 하지만 이건 심증일 뿐이고….”

소희는 벽난로 옆에 놓여 있는 기다란 부지깽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며 남자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그의 입안에 넣어 놓은 천을 뺐다.

남자가 한참 동안 콜록거리는 소리를 배경 삼아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에겐 물증도 필요해서 말이야.”

단순 무식한 방법이긴 했지만 이보다 확실한 건 없었다. 짜릿한 고통은 절로 입을 열게 할 것이다.

“자, 이제 자백을 받아 내 볼까?”

내리꽂히는 서늘한 눈길에 남자의 동공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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