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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06화 (106/120)

Chapter 106

신기하게도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다.

처음에는 삼 개월을 어떻게 기다리나 막막하기만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약속한 날의 반절이 지나 있었다. 그렇게 혹한의 칼바람이 부는 계절이 찾아왔다.

요즘 소희는 별채 침실에 있는 윙체어에 앉아 차갑게 얼어붙은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무언가를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던 일 년 전과는 달리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사실 내면이 몹시나 혼란스러운 건 그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편지 한 통 보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분명 전령새가 있을 텐데.”

소희는 멀거니 호수를 바라보다가 뚱한 표정으로 이와 비슷한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을 이렇게 걱정으로 흘려보내고 나면 날이 저물 때쯤 데온이 나타났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반복되어 온 패턴이었다.

그렇게 매번 똑같던 일과에 오늘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황후는 별채까지 친히 발걸음을 했다. 그리고는 메리가 차려 놓은 티 테이블 앞에 앉아 한참 동안 차만 마시고 있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은 만큼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소희가 먼저 입을 뗐다.

“하실 말씀이라도….”

그녀는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조슈아를 좋아하는 감정을 깨달은 뒤로부터 비앙카를 마주하는 게 더 불편해졌다. 아무래도 그의 어머니이니 잘 보이고 싶은 감정이 심중에 자리한 탓이었다.

어려운 건 피차 마찬가지인지 비앙카도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하다가 말을 꺼냈다.

“그때 일은 고맙구나.”

더 덧붙이는 말은 없었지만 화재 사건을 말하는 것임을 소희는 단박에 알았다.

예전에 성당에서 머뭇거리던 게 이 말을 하려던 것이었을까. 자존심이 강한 그녀가 아리아드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이해가 되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뒤잇는 말에 소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기 있지 말고, 궁으로 들어오렴.”

“저를….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허락이 아니라, 현실과의 타협이고 포기지. 아들과 척지고 살 수는 없으니. 무엇보다 난 조슈아가 필요하거든.”

비앙카는 이내 자조 섞인 웃음을 뱉었다.

“첫째 아들은 어미를 죽이려 하고, 둘째 아들은 어미가 반대하는 여자를 죽어도 옆에 두겠다는데. 난 그 둘 중에 딱히 선택지가 없어서 말이야.”

들려오는 말에 소희는 진정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그래도 그나마 제 부모를 죽일 생각은 하지 않는 둘째가 낫지 않겠니.”

비앙카가 화재 사건의 진위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불이 남과 동시에 문이 잠겨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히 이상하긴 했을 것이다.

저렇게 말을 늘어놓고 보니 비앙카의 처지도 참 딱하다 싶었다. 아들이라고는 딸랑 두 명뿐인데, 한 명은 권력에 미쳐 있고 한 명은 여자에 미쳐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앙카는 이제 조슈아의 광기 어린 사랑에 포기한 듯 보였다. 그녀는 입가에 남아 있던 씁쓰레한 미소를 지우고 덤덤하게 물었다.

“내 입장과는 별개로, 넌 버틸 수 있겠니? 사람들의 시선 말이다.”

욕을 잔뜩 먹고 안 좋은 타이틀은 죄다 단 아리아드가 다시 황태자비 자리로 돌아간다면 어떠한 이야기들이 오갈지는 뻔했다. 이는 또한 어느 정도 황실의 권위가 무너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비앙카는 마땅한 수가 없으니 모든 걸 체념한 듯 보였다.

“폐하께서 보시기엔 어때 보이나요. 제가 버틸 수 있을까요?”

그리 물어봤지만 소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여태 많은 작품을 써 오면서 익명의 가면을 쓴 독자들에게 받아 온 악플들에 비하면 아리아드를 향한 모욕적인 말들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소희는 이미 안 좋은 소리에 무뎌질 대로 무뎌져 이젠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고통에 무뎌진다는 건 다소 슬픈 이야기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후에 아리아드를 향해 떠들어 대는 말에도 상처받을 리 없었다. 또 무엇보다 자신은 아리아드가 아닌 한소희였으니까.

“뻔히 독해 보이는 애한테 내가 괜한 걸 물어본 거 같구나.”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마지막 말을 남기고 비앙카는 자리를 떠났다. 분명 아리아드를 향한 말이었는데도 소희의 기분이 묘해졌다.

* * *

저녁이 되고 매번 그랬듯 데온이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식탁 위에 식사가 차려지고 마주 보고 앉을 때면 소희는 꼭 그와 시골 마을에 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매번 이렇게 찾아올 필요는 없는데. 너 바쁘잖아.”

“전혀 안 바빠.”

그와 있으면 이렇게 밀어내고 또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시골 마을 저택에 있던 일이 점차 생생해질수록 미안함이 커져서 더욱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데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데 이 양송이 수프는 내가 예전에 해 준 게 훨씬 낫지 않아?”

“글쎄다….”

그는 오늘도 자신이 발휘했던 음식 솜씨가 제법 괜찮았다고 추억 보정을 시도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음식을 차린 메리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었다.

소희는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데온도 음식을 남기고 그녀를 졸졸 따라왔다.

“아리, 잠시만. 입에 뭐가 묻었어.”

불쑥, 앞길을 막은 그는 느닷없이 가까워졌다. 이내 큼지막한 손이 턱 끝에 와 닿고 뜨겁고 물컹한 감각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놀라 밀어내기도 전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자가 떨어지자마자 소희는 제 입가를 옷소매로 문지르며 그를 흘겼다.

“손으로 할 수 있잖아.”

“그냥. 나도 모르게.”

데온은 씩 웃었다. 그 능청스러운 얼굴 앞에서 그녀는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어느 정도까지 받아 줘야 하는지 그 선을 재는 게 몹시나 어려웠다. 하지 말라고 쌀쌀맞게 굴자니 몹쓸 사람이 될 거 같고, 그냥 마음껏 받아 주자니 그 또한 몹쓸 사람이 된 거 같고.

그러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다 보면 결국 소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어정쩡한 표정이 되었다.

오늘도 매번 그랬듯 멍청한 표정이 되어서 고개를 돌렸다. 소희는 급하게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는 몸을 뒤에 있는 남자는 긴 다리로 순식간에 쫓아왔다.

침실 문을 열면서 소희는 그를 돌아봤다.

“오늘도 자고 가게?”

“응. 진짜 잠만 잘게.”

간단한 대답과 함께 데온은 문을 밀고 먼저 들어가 버렸다.

힘에 밀려 우두커니 서 있던 소희는 오늘따라 유독 고집스러워 보이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결국 방으로 들어섰다.

그의 과한 보호는 정확히 조슈아가 떠난 뒤부터 지속됐다. 호위 기사들을 제치고 직접 경호원을 자처한 것이다.

조슈아가 떠난 첫날, 데온이 같은 침대에 누우려고 할 때 소희는 경악했다.

하지만 그는 조슈아가 허락을 해 줬다는 논리를 펼치며 밤새 함께 있으려고 했다. 우람한 몸집이 버티고 꿈쩍도 하지 않으니 그녀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신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항목을 넣었다.

스킨십은 금지.

처음 이 말을 꺼냈을 때 데온의 얼굴에서 서운함이 한가득 느껴졌다. 사납게 찢어진 눈꼬리가 축 처지는 게 하마터면 그를 불쌍하게 여겨 포옹까지만 합의를 보자고 할 뻔했다.

소희는 마음 한구석의 떳떳함을 위해 여태껏 데온과 관계는 일절 하지 않았다. 조금 슬픈 사실이라면, 진짜 아리아드와 한소희가 한 일을 구분하여 결백을 증명해 줄 사람이 존재치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누운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옆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소리였다.

사실 납치를 당했던 이래로 어둠이 찾아오면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곤 했다.

그런데 데온과 함께한 날이 한 달 이상 쌓이자 그의 존재만으로 큰 위안이 됐는지 더 이상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밀어내야 한다지만 그녀도 점차 이 상황이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소희는 스탠드의 불을 끄고 옆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그의 코골이를 배경 음악 삼아 점차 잠이 들었다.

* * *

데온은 잠결에 뒤척거렸다.

무의식중에 아리아드 쪽으로 손을 뻗어 끌어당긴 그는 그녀를 꽉 안았다. 팔 안에 가둬 둔 몸이 심하게 발버둥 치는 게 느껴졌다. 그러한 격한 움직임에 점차 정신이 들자 데온은 입술을 삐죽였다.

너무하네. 포옹도 싫다 이건가.

며칠 밤을 필트모어 저택에서 뜨겁게 보내 놓고는 아리아드는 갑작스레 스킨십 거부를 선언했다. 이상하다 느낄 만도 하건만, 데온은 그저 그녀에게 서운하기만 했다.

결국 그는 제 팔에 점점 힘을 풀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리….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팔뚝이 튼실했어…?”

그는 중얼거리며 다시 제 품에 있는 팔뚝을 더듬었다. 튼실한 근육이 자리잡힌 굵은 팔이었다.

“뭐야, 이거.”

그제야 이상함이 인지되자 데온은 눈을 번쩍 떴다. 곧바로 마주한 건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녹색 눈동자였다.

복면을 써서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남자가 데온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한 손에는 단도를 들고.

상황 파악이 끝났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정체불명의 남자는 단도를 든 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데온이 막으려고 급하게 손을 뻗었으나 살갗을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가 이어졌다.

날카로운 칼날은 그의 팔을 찌르고 빠져나갔다.

“윽.”

데온은 찔린 팔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칼을 고쳐 잡은 남자가 응시하는 곳은 아리아드가 있는 방향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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