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5
일주일 뒤, 조슈아는 떠났다.
소희는 그 일주일 동안 삼 개월 안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수십 번이나 확인받고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그럼에도 전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라트베아 도시를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성당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참여했다. 출전하는 자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자리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들어온 화려한 빛이 성당을 채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저마다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에 소희도 함께였다.
소희는 이름도 모를 신에게 두 손을 꽉 모아 쥐고 빌었다. 물론 남자 주인공이 그곳에서 비명횡사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몸에 흠집 하나 없이 돌아오게 해 달라고 말이다.
며칠 내내 온종일 옆에 붙어 지내던 데온은 성당에까지 따라왔다. 소희는 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흉내 내듯 똑같이 큼지막한 손을 모아 쥐고 눈을 감고 있었다.
저렇게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이라니. 새삼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해 보이는 모습이 신기해서 소희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데온은 눈을 떴다. 곧바로 눈이 마주치자 소희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넌 무슨 기도를 했어?”
“제발 거기서 뒤졌으면 좋겠다고….”
주어가 없는 문장에도 그 기도 속 주인공이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소희는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올려 그의 널찍한 등을 때렸다. 고즈넉한 장내에 찰싹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주변의 시선이 몰리자 소희는 그제야 멋쩍어하며 괜스레 작은 헛기침과 함께 손을 내렸다.
“아리, 나 너무 아파.”
데온은 엄살이 심했다. 아무리 힘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근육으로 뒤덮인 우람한 몸집에는 조금의 타격도 줄 수 없을 것처럼 보이건만.
가까이 다가와 과하게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귓속을 간질였다. 소희는 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앞에 놓여 있는 석상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름 모를 신의 형상이 놓여 있었다.
“방금 그 말 취소한다고 다시 기도해.”
데온은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변명했다.
“다니엘을 말한 거야, 다니엘.”
잔뜩 흘기는 눈길에 굴복한 듯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진짜 그녀의 말대로 기도를 취소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구석 자리에 있던 소희는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기다리며 모자를 고쳐 썼다. 아리아드가 있다는 걸 티 내 봐야 피곤하기만 하니 최대한 존재감을 숨기고 있었다.
얼마 뒤, 장내가 한산해졌고 밖으로 나가기에 적당한 때가 되었다.
데온과 함께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가는 와중에 누군가 나가는 길목을 막아섰다.
베이지색의 단아한 드레스를 입은 비앙카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낯빛은 그러해 보이지 않았다. 쌀쌀맞던 평소와는 다르게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쉬이 나오지 않는 듯 한참 동안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러다 그녀는 결국 나직한 한숨과 함께 소희를 지나쳤다.
뭐지?
다수의 시종과 함께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희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다시 발길을 움직였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두 다리를 멈춰 세워야 했다.
이번엔 켈리와 마주쳤다. 낯빛이 이전에 만났던 비앙카와 비슷했다. 그녀도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우물거리다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이 사람들이 오늘따라 왜 이래.’
그러한 의문이 들었지만 소희는 그냥 그녀를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정중한 목소리가 뒤따라 두 다리를 멈춰 세웠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 * *
그들은 성당 내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데온이 자리를 비켜 주어 그 안에 두 사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켈리의 작고 가녀린 손가락은 드레스 천을 쥐어뜯으며 한참을 방황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답답해진 소희가 먼저 말문을 열려던 때였다.
“이제 와서 웃기는 이야기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희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때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참나, 머리를 실컷 쥐어뜯고 이제 와서요?”
예전 일을 회상하니 쥐어뜯긴 머리가 다시금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소희는 그녀의 심중을 모두 다 알고 있었지만 괜스레 투덜거렸다.
“그땐…. 아리아드 님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봐요.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거니까…. 늦게나마 말씀드려요.”
“감사 인사는 됐어요. 저도 도와주려고 했던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으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 내용에 조슈아와 켈리의 19금 신을 기획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자신은 연회장에 가지도 않았을 테니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받기에는 멋쩍어지는 부분이었다.
여태 고개를 떨군 채로 말을 이어 가던 켈리가 갑작스레 불쑥 눈을 맞춰 왔다. 짙푸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빛을 띠고 있었다.
“전 떠날 거예요.”
언젠가 소희가 건넸던 말을 이제는 그녀가 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초연해진 태도로. 현실에서 그녀의 심중을 확인하긴 했어도 변화한 모습을 직접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황후 폐하께도 이야기를 드렸어요. 이 자리에 저는 어울리지 않는 거 같다고요. 욕심껏 쥐어 봐도 감당 못 할 자리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소희는 어떠한 답도 내놓지 않고 그저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켈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 저질렀던 만행을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
“평생 속죄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혔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나쳤다. 방을 빠져나올 때까지 뒤편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소희는 이미 그녀를 용서할 준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관용을 베푸는듯한 언행을 취하지 않은 건 제 이기적인 면모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저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소희 또한 그러했다. 제 이익을 위해 여주인공이 되어야 했고, 그래서 그 자리를 뺏었고, 결국 이뤄 냈다.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엔 모두가 이기적이었다.
나중에야 접한 소식인데 켈리는 성직자가 되었다고 했다. 시놉시스 속에 낱말 하나하나 적혀 있던 운명을 그녀는 스스로 바꿔 나가고 있었다.
* * *
쨍한 햇살에도 서늘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이었다. 켈리는 건물 밖으로 나서며 겉옷을 여미고 쾌청한 하늘을 올려 봤다.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쉬자 맑은 공기가 폐부 안에 한가득 채워졌다. 그런데 그 끝에 텁텁한 담배 냄새가 와 닿자 상쾌했던 기분이 빠르게 조각났다.
켈리는 미간을 구기며 연기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건물 외곽에는 브릭스가 있었다.
담배를 몇 모금 빨던 그는 켈리와 눈이 마주치자 일순간 굳은 듯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담배를 빠르게 바닥에 비벼 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켈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예전에 그의 앞에서 잔뜩 울었던 장면이 생각나 머쓱해진 탓이었다.
그렇게 다시 발길을 움직이려던 때였다.
“요즘은 괜찮아요?”
언제 가까워졌는지 바로 뒤편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켈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난날 제 모습이 부끄러우니 그냥 그를 무시할 것인지, 아니면 이에 대꾸할 것인지.
짧은 고민 후에 그녀는 고개를 틀었다. 이미 저의 밑바닥을 전부 본 남자 앞에서 더 부끄러울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떠나려고 마음먹으니 괜찮아졌어요.”
이어진 말에 놀란 듯 마주한 연금빛 동공이 커졌다.
“교황청에서 주최하는 성직자 관련 수업을 들으러 떠나요. 수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요.”
그 뒤에 이어지는 말 또한 남자에게는 충격적인 듯했다. 그는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그럴듯하게 포장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선택한 길이에요. 유레시아 가문과 황태자비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요.”
켈리는 그 앞에서 그저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정말 우습죠?”
마주한 얼굴에 자조가 담기자 그제서야 브릭스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도망간다고 누군가 손가락질 한데도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결국 내 마음만 편하면 됐지. 본인 인생이잖아요.”
“맞아요. 오히려 후련하네요.”
켈리는 자조를 지우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지난번에 그녀가 울고 있던 때, 브릭스가 건넸던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 그냥 다정함이 그리웠나 봐요. 예전에 조슈아 님이 건네준 손수건 하나에 마음을 빼앗겼거든요.”
그녀는 하얀 손수건을 남자의 앞으로 내밀었다. 기어코 그렇게 돌려주고야 마는 자신의 손수건을 브릭스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받아 들었다.
“그럼…. 그때 손수건을 건네준 사람이 저였다면, 켈리 양은 저를 좋아했을까요?”
“글쎄요.”
잠시간 잠잠해진 둘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럼에도 둘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 한참을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브릭스의 얼굴 위로 아쉬운 감정이 담겼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재빨리 갈무리하고 웃어 보였다.
“잘 가요. 인연이 닿는다면 또 만나겠죠.”
그는 악수를 건넸다. 평소처럼 담백한 인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