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04화 (104/120)

Chapter 104

잔잔한 음악이 흐르자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조금 차분해졌다. 여러 사람 틈에 자리하고 있던 다니엘은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발길을 움직였다. 그곳에는 헨리킨 엔드로가 있었다.

헨리킨은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 하고는 다니엘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다니엘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뒤잇는 목소리는 은밀했다.

“보이십니까.”

물건을 확인한 헨리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샹들리에 조명 아래 유독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도장은 자신이 아는 물건이 맞았다.

“이걸….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쉽진 않았지만, 뭐 다 방법이 있었습니다. 조슈아 매킨리와 일종의 거래를 했달까요.”

모호한 답이 이상하게 들리긴 했지만, 얻어 온 과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헨리킨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다니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국새를 다시 제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정말 모든 것을 갖췄다는 듯 여유로운 자태였다. 하지만 헨리킨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작은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원인은 역시나 조슈아 매킨리 때문이었다. 멀리서 보기에 그는 일평생을 추앙받기만 해서 딱히 특별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 황태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여러 사업을 함께 진행해 온 헨리킨은 그가 범상치 않다는 걸 자주 느껴 왔다.

그랬기에 모든 걸 쥐었다고 방심하기엔 일렀다. 특히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욱 촉을 세우고 조슈아 매킨리의 모든 행보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다.

다니엘은 너무 신난 나머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했다. 들떠 매주 성대한 파티를 열고 있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헨리킨이 보기에 다니엘의 부족한 점은 이러한 부분이었다.

“랑뱅 항구 도시를 노리신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생각 끝에 헨리킨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즉위식이 끝나고 파벌을 통합한 뒤에 출발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지금 자리를 비운다면 조슈아 매킨리가 황성에 남아 다른 짓을 꾸밀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쟁에 패배해서 던마크 제국의 국력이 약해진 지금, 이보다 좋은 시기는 없습니다. 시간이 더 흐를수록 뺏어 오기 힘들 것입니다.”

다니엘은 태연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조슈아 매킨리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놈도 이번 일정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해 왔습니다.”

“…정말입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먼저 나선 걸까요?”

다니엘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자신에게 떨어지는 사업 이익이 적어질 테니 먼저 나선 거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그러한 이유일까.

잡다한 상념으로 헨리킨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그러한 표정을 읽었는지 다니엘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조슈아 매킨리 쪽 사람들은 데려가지 않을 겁니다. 그놈 밑에는 제 수하들만 있을 테니 허튼짓은 못 하겠지요. 그렇게 감시하는 편이 저한테도 좋을 듯하여 함께하겠다는 말을 승낙했습니다.”

헨리킨은 그 말을 듣고 제 생각보다 다니엘이 많은 부분을 고려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마냥 어린아이같이 들떠 이 모든 걸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갑작스레 다니엘은 짐짓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제가 국새를 뺏어 오는 과정에서 아리아드 피어슨을 이용했는데…. 죽이려고 했던 자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에 헨리킨의 미간이 설핏 좁혀 들었다.

피어슨 부부를 없애 버리는 방법을 제시해 줄 때 느꼈던 오싹함이 다시 등골을 타고 흘렀다. 확실히 사람 목숨을 벌레처럼 아는 자였다. 이런 자와 한패라는 건 유쾌한 사실은 아니었다. 수가 틀리면 저도 언젠가 그와 비슷한 꼴을 면치 못할 테니까.

심각해진 분위기 속에서 다니엘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찰스 엔드로를 이번 참전 명단에서 빼 드릴 테니, 혹 저희가 떠나면 뒤처리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그 내용은 정중치 못했다. 그저 살인 교사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사람을 죽이라니. 심지어 한때 제 아들과 결혼까지 약속했던 아리아드 피어슨을.

마주한 적갈색 눈동자가 일순 형형하게 빛났다. 무언가를 염려하는 듯한 기색은 깔끔하게 지워진 채였다.

그제야 헨리킨은 이 남자의 속내가 읽혔다.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찰스 엔드로는 계속해서 아리아드를 찾고 있었고, 헨리킨이 제 아들에게 유독 약한 성미를 지녔다는 걸 다니엘은 잘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지금 제 편이 분명한지를 시험하고 있음과 동시에, 훗날 조슈아의 편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길을 완전하게 차단하려는 속셈이었다.

단순하게 보였던 남자에게서 이런 능구렁이 같은 구석이 있을 줄이야. 헨리킨은 그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며 자조했다.

이 점이 꺼림칙하긴 해도, 그들은 이미 같은 배에 올라 있었으니 물러설 방도란 없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다니엘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수밖에.

* * *

짹짹, 새소리와 함께 아침이 찾아왔다.

폭신한 이불이 목까지 올라와 꼼꼼하게 덮이는 감촉에 소희는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눈으로 곧바로 마주한 건 붉은색 눈동자였다. 조슈아는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어젯밤부터 느꼈지만 저 웃음에 적응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최근 날카롭게만 보이던 눈매가 순식간에 저렇게 순해지다니. 예전에 자주 봐 왔던 웃음인데도 불구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괜스레 간질간질해지는 마음에 소희는 이불을 꽉 끌어안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달콤함에만 젖어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소희는 현실에서 보고 왔던 다니엘에 대한 정보를 조심스레 읊었다.

“어디서 들었는데 말이야. 다니엘이 전쟁을 준비하려는 거 같아. 랑뱅 항만이었나, 그게 탐이 난다고 그러던데.”

“누구한테 들었는데.”

“그…. 필트모어 저택에 있을 때 스치듯이 들어서 그건 잘 기억이….”

언제나처럼 스치듯 들었다며 대충 얼버무릴 생각이었지만, 예리한 눈길이 닿자 말끝이 흐려졌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귀신같이 눈치챈 듯해서.

잠시간 이어진 눈싸움에 소희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서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뒤따르는 건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다.

“알아.”

“그렇구나…. 가 아니라, 안다고?”

“내가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어.”

소희는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거처럼 멍해졌다.

도움을 주려고 결국 현실로 나가야 하나 머리 아프게 고민하던 게 문득 바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소설이 뒤틀려서 남자 주인공이 다니엘에게 당하는 새드 엔딩을 걱정하던 순간도 바보처럼 느껴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래, 사실 저보다 더 똑똑한 남자에게 자신의 도움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그런 큰 깨달음을 얻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소희 앞에서 조슈아는 나직한 말을 뱉었다. 그건 더한 충격을 가져다줬다.

“나도 전쟁터로 갈 거야.”

“…왜?”

“황성 안에서는 다니엘을 없애 버릴 명분이 없어. 사람을 시켜 죽이려고 한다 해도 자칫 잘못돼서 실패하면 상황이 더 안 좋아져. 범인은 무조건 나로 몰릴 테니까.”

물론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터라니. 전쟁터가 어떠한 곳인가. 신중에 신중을 가한다고 해도 까딱 잘못하면 목숨을 잃는 곳이었다.

그래도 조슈아는 무사하겠지. 그 어디에도 남자 주인공이 전쟁터에서 덜컥 죽어 버리는 로맨스 소설은 없으니까. 그렇게 위안 삼던 소희의 뇌리에 갑작스러운 생각이 스쳤다.

‘아니지. 이 소설은 피폐물이었잖아.’

그걸 인지하자 소희는 목이 졸린 것처럼 헛숨을 들이켰다.

“안 가면 안 돼? 우리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다니엘이 발로 걷어차 입가에 남은 상처를 부드럽게 만지고 있던 남자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이내 그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급하게 덧붙인 말이 어린아이의 투정이라도 되는 양 태연스러운 미소였다.

“안 돼. 이미 준비는 다 끝났어.”

어쩜 저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단호하게 답하는지. 심각해져 있던 소희도 해사한 미소 하나에 저도 모르게 똑같이 입꼬리를 올렸다.

입가에 닿아 있던 큼지막한 손이 소희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마주한 얼굴에 잠시간 웃음기가 없어졌다.

“삼 개월 안에 돌아올 거야. 약속할게.”

“….”

“그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야 해.”

조금의 간절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예전에 쉽게만 뱉었던 약속들이 떠오르자 소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힘을 줘 말했다.

“그래. 나도 약속할게.”

조슈아는 그제야 유려하게 웃어 보이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예전에 했던 말 있잖아. 그걸 지금 다시 들으면 이 약속에 대한 신뢰가 조금은 생길 거 같아.”

“예전에 했던 말?”

“불꽃놀이 보면서 처음 했던 말.”

“아.”

그가 바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소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좋아해. 정말 정말.”

한참 동안 뺨을 쓸던 남자는 갑작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소희는 되물었다.

“너는?”

조슈아는 아무 대꾸 없이 피식거리며 보랏빛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가운을 둘렀다.

뒤따르는 대답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아침 먹자.”

갑작스레 드러난 남자의 빛나는 나체에 홀려 멍하니 앉아 있던 소희는 뒤늦게 찝찝함을 느꼈다. 번득 정신을 차렸을 땐, 조슈아는 어느새 멀어져 방문을 열고 있었다.

소희는 그 뒷모습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야! 너는 왜 대답 안 하냐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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