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03화 (103/120)

Chapter 103

어여쁜 미소가 떠오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소희는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 찝찝함이 남았지만 이대로 넘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솔직하게 설명한다 해서 쉽게 이해될 리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오히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는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조슈아는 몇 분 전처럼 보랏빛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하나 켜져 있는 작은 등불이 남자의 촘촘한 속눈썹과 높은 콧대를 비춰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소희는 그림자가 내려앉은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뗐다.

“내가 데온에게 간다고 했을 때, 날 정말 쉽게 포기하려고 했어?”

“아니.”

뒤잇는 말은 빠르고 단호했다. 그리고 조슈아는 의외의 대답을 이어 갔다.

“난 지금 네 옆에 계속 있어 주지 못하니까 일단 안전한 곳에 있었으면 했어.”

“….”

“짜증 나긴 해도 그놈이라면 널 확실하게 지킬 테니까.”

데온을 떠올렸는지 잠시 조슈아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가 펴졌다.

“그러다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려고.”

“모든 게 다 정리되면 직접 찾아가려 했어.”

조금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은 강고한 목소리는 묘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소희는 소설 속으로 들어오지 못해 낙담해 있던 때를 떠올리며 이상한 상상을 했다.

“네가 있는 곳으로.”

그가 아리아드가 아닌 한소희를 어떻게든 찾으러 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두 시선이 얽혀 든 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소희는 제 속에서 뭉근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끼며 충동적으로 팔을 올려 하얀 뺨을 쓰다듬었다. 이내 그 손끝은 얼굴의 윤곽을 타고 느릿하게 올라가 눈가에 닿았다.

피곤함에 살짝 나른해진 남자의 눈가를 자분자분 만졌다. 도통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떨어졌던 방향을 따라.

“그땐 별로 아프지 않았어. 난 정말 괜찮아.”

울지 말라고 타이르다가 의식을 잃어 더 하지 못했던 말을 소희는 뒤늦게나마 꺼냈다. 수척해진 얼굴을 보니 그 말이 더욱 하고 싶었다.

“넌 괜찮아?”

남자의 새까만 속눈썹이 잘게 떨려 왔다.

그러자 붉은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조슈아는 제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작은 손을 다급하게 낚아채 제 얼굴에서 떨어트렸다. 뒤잇는 말소리가 목을 긁고 나와 거칠었다.

“그만 자극해.”

“….”

“생각보다 난 인내심이 그렇게 많지 않아. 특히 네 앞에서는.”

그제야 소희는 뻣뻣하게 고정된 몸과 시선이 느껴졌다. 소희가 입은 슬립 원피스는 목둘레가 깊게 파인 디자인에 어깨 위에 놓인 끈 두 개는 작은 힘에도 끊길 것처럼 얇았다. 전부터 애써 눈만 빤히 바라봤던 건 어쩌면 이 이유일 수도 있겠다는 그럴듯한 생각이 들었다.

조슈아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소희가 그의 와이셔츠 옷깃을 잡아당겨 그는 더 이상 멀어질 수 없었다. 놀라 커다래진 붉은 동공이 전보다 더욱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뭘 자극했는데?”

소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옷깃을 천천히 매만졌다.

“나도 네 앞에서는 인내심이 부족해.”

속삭이는 말소리는 간지러울 정도로 나긋하고 자그마했다. 이내 그녀는 힘을 주어 옷깃을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위에 있던 얼굴이 더욱 가까워지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에 조슈아는 당황한 듯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하고 싶다는 소리야.”

담담한 목소리와는 달리 소희의 귓불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굳어 있던 그는 그걸 발견하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그는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삼켜지고 배 아래 뭉근했던 감각은 순식간에 뜨겁게 들끓었다. 어느새 그의 손은 어깨 위에 자리한 얇은 끈을 잡아끌어 내리고 있었다.

* * *

조슈아는 생각했다.

갖기 위해선 때론 멀어질 줄도 알아야 한다고. 계산하여 받은 만큼 마음을 주면 상처받을 일은 없다고 말이다. 그리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때 그제야 이 여자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여겼다.

어지간히 바보 같은 사고였다. 그렇게 계산만 하며 밀다가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그걸 다 죽어 가는 여자를 안아 들고서야 깨달았다.

이 관계에서 셈법은 필요 없었다. 먼 훗날 상처받는 일이 생긴데도 일단은 현재에 충실하고 싶었다. 지금 이 여자는 자신이 좋다고 했고, 또 자신도 그녀가 좋으니까.

복잡하게 재고 따지는 일은 이제 그만둘 것이다. 오히려 제 감정에 최선을 다했기에 훗날 후회도 없을 터였다.

그는 새하얀 살결에 끊임없이 제 흔적들을 새겨 나갔다. 여태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을 터트리듯 모든 움직임이 맹렬했다.

붉게 팬 잇자국을 따라 다시 올라가다가 고개를 들어 살짝 물기 어린 눈과 마주칠 때면 그는 웃어 보였다.

싸늘했던 표정을 모두 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 * *

데온은 사방을 꼼꼼하게 훑으며 조용히 움직였다.

그가 위치한 곳은 다니엘이 머무는 궁궐이었다. 흥청망청 돈을 쓰며 끊임없이 진행되는 파티에 데온은 또 초대받았다. 조슈아에게 당해 빈털터리가 된 그가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을 조용히 빠져나와 벽면에 기대섰다.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눈앞에 자꾸만 아리아드의 모습이 어룽거렸다.

“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별채 안으로 급하게 들어가던 그녀의 뒷모습이 유독 뇌리에 깊게 남아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짜증 나.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냥 잡아 둘 걸 그랬어.

그리 쉼 없이 중얼거리던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벽면을 쾅 내리치고 싶은 걸 인내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를 보내 줄 만큼 한순간 마음이 너그러워졌던 이유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주일 전 자신은 조슈아의 술수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데온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와 했던 대화를 곰곰이 되짚었다.

별채에 있는 침실에 들어갔을 때 조슈아는 엎드려 있었다.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아리아드의 손을 꽉 잡은 채로.

그들에게 가까워지며 데온은 빈정거렸다.

“무능한 자식.”

“….”

“이거 봐. 애초에 내가 옆에 있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어.”

조슈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게도 불과 몇 시간 만에 잔뜩 야윈 듯했다.

“당분간 아리아드 옆을 지키고 있어.”

그는 호위 기사에게 쉬이 건네는 말처럼 자연스럽게 명했다.

“어디서 명령질이야….”

그 오만한 태도에 샘솟는 살인 충동을 억누르려고 데온은 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 말끝을 흐린 건 붉은 눈망울에 번득이는 기운을 읽어서였다. 피곤해서 힘이 풀린 것으로 보이는 눈동자는, 또 다르게 보면 묘한 광기가 읽히기도 했다.

“죽여 버리고 싶은데 봐준다 내가.”

데온은 헛기침을 하며 괜스레 딴소리를 했다. 덤비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닌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다.

눈을 피하고 있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조슈아는 말을 덧붙였다.

“곧 전쟁이 일어나.”

“뭐?”

“넌 내가 참전 명단에서 빼 줄 거야. 대신 아리아드를 지키고 있어.”

“그럼 넌 전쟁에 나간다는 이야기야?”

의아함에 질문을 해도 조슈아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서늘한 말만 덧붙일 뿐이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 이 몸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넌 내 손에 죽는 거야.”

아리아드를 옆에 두고 이 지경을 만들었으면서 누가 누구보고 큰소리인지. 코웃음을 치던 데온은 살짝 비틀린 눈망울과 마주하자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번 주에 다니엘이 주최하는 파티에 초대받으면 집무실에서 서류 하나를 빼 와.”

“내가 왜 네 명령을 따라야 하는데.”

“너도 다니엘을 없애고 싶잖아.”

조슈아의 고개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에게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데온도 같은 곳을 바라봤다.

“죽이는 건 내 손으로 할 테니까, 넌 서류만 챙겨 와.”

속 모를 나직한 목소리가 재수 없긴 했어도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었다. 그에 대답하는 대신 데온은 조용히 기도했다. 다니엘을 죽이고 전쟁터에서 저놈도 같이 죽기를.

데온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살피고는 집무실 쪽을 바라봤다. 이제 나올 때가 됐는데….

일순 인기척이 느껴지자 그는 벽면에 몸을 붙였다.

집무실을 빠져나온 다니엘은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주변 사람들과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데온은 몸을 움직였다.

좀도둑처럼 움직이는 제 모습을 깨닫고는 잠시 자괴감이 들었지만 빠르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주변을 뒤적거리며 그는 계속해서 욕을 뱉었다. 그러다 익숙한 단어를 발견하고는 급하게 종이를 빼 들었다.

“이건가.”

자세히 읽어 보니 조슈아 놈이 챙겨 오라고 했던 문서가 분명했다. 다니엘이 몬트롤 지역에서 승리하며 얻어 온 서약서였다.

데온은 종이를 접어 재킷 주머니에 넣고는 그곳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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