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02화 (102/120)

Chapter 102

한참 동안 이어진 눈싸움으로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데온은 아리아드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듯 관찰하다가 입술을 뗐다.

“전보다 분위기가 좀 밝아 보여.”

생각했던 것보다 데온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무리 기억을 전부 잃었다고 해도 소희와 진짜 아리아드의 그 극명한 차이는 메워지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애초에 눈치라는 걸 키우지 않는 남자가 알아차릴 정도로 말이다.

무어라 둘러대는 게 좋을까, 그답지 않게 예리해 보이는 눈길 앞에서 소희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바심을 태우고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이어지는 뜬금없는 말 때문이었다.

“그만큼 어제 내 밤일이 만족스러웠다는 뜻이겠지?”

데온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정말이지 뿌듯해 보이는 표정에 소희는 실소를 터트렸다.

‘얘는 바보가 맞구나.’

소희는 그런 마음의 소리를 내비치는 대신 간결하게 답했다.

“맞아, 그래서 그래.”

만족스럽게 웃고 있던 데온은 그녀를 꽉 껴안았다. 긴장감에 덜컹거리던 마음이 안정되기 무섭게, 찐한 포옹은 다시금 심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 품속에서 소희는 해탈한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미 일은 저질러졌고 돌이킬 수 없다. 혼란스러움 속에 그 사실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한 번 더 할까?”

데온은 나지막이 물었다. 어느새 욕구가 쌓였는지 흥분으로 인해 꽉 잠긴 목소리였다. 맨 살결에 닿은 그의 물건이 부담스러우리만큼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해서 그 위에 더 잔뜩 쏟아부을 필요까진 없었다.

“아니.”

단호한 목소리에 남자의 목울대가 흔들렸다. 이미 그의 손끝은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고 내려가 꼬리뼈에 닿아 있었다.

간지러운 손길에 소희는 몸을 잘게 떨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저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팔을 최대한 힘 줘 밀었다. 물론, 근육질의 팔은 가해진 힘을 모른 척하며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데온, 나 기억이 돌아왔어.”

소희는 작게 속삭였다.

“별채로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아.”

어쩐지 미안한 감정이 들어서였다. 자신이 빙의함으로 인해 사랑하는 아리아드에게 순식간에 뒷전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널찍한 가슴에 얼굴이 푹 묻혀 있는 소희는 그의 표정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남자의 기분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는 걸 깊은 고요 속에서 유추하고만 있을 뿐.

데온은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거대하고 뜨겁던 몸이 떨어지자 그 틈으로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소희는 그렇게 그가 조용히 멀어지는 순간에 안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보내 주기 싫다면.”

일순 두 팔에서 거센 악력이 느껴졌다. 그는 순식간에 얇은 두 팔목을 움켜잡고 그녀의 몸을 내리눌렀다. 전보다 더한 압박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바로 위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있었다.

“또 묶어 두고 싶다면 어떻게 할 거야.”

마주한 잿빛 눈망울이 짙은 소유욕으로 번득였다. 소희는 그 아래에 깔려 가는 숨만 색색 내쉬었다. 그가 이대로 그렇게 마음을 먹어 버린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서늘하게 굳은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지자 소희는 긴장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숨결이 한참 뺨 위를 간지럽혔다. 뒤이어 농밀한 움직임이 이어질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입술만 맞추고는 떨어졌다.

참으로 가볍고 담백한 입맞춤에 소희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 앞에서 그는 방긋 웃어 보였다. 딱딱했던 표정은 완벽하게 지워진 채였다.

“농담이야.”

손목을 움켜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서서히 약해지더니 그는 완전히 소희를 놓아주었다. 데온은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챙겨입고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런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날카로운 눈매가 어여쁘게 접혔다.

“가자. 데려다줄게.”

데온은 또 그렇게 장난스러운 미소 아래 제 진심을 묻어 버리는 듯했다.

* * *

별채에는 메리뿐이었다.

내부에 있는 물건을 열심히 정리하던 메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갑작스레 등장한 아리아드를 확인하고는 흠칫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당황스러움에 눈만 끔뻑이는 메리에게 소희는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 메리. 나 기억이 돌아왔어.”

그녀는 손에 힘이 풀린 듯 들고 있던 장식품을 놓쳤다. 장식품이 나무 바닥에 떨어져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메리는 발길을 천천히 내디뎠다. 이내 두 다리에 점점 속도가 붙더니 달려와 소희를 꽉 안았다.

“다행이에요. 영영 떠나 버리시는 줄 알았어요.”

귓가에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희는 그녀를 살짝 떼어 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정말 돌아오지 못할뻔했던 상황도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그럴 리가. 그런데 뭘 하고 있던 거야?”

“저하께서 별채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라고 명하셔서…. 돌아오신 거죠? 그럼 정리를 안 해도 되겠죠?”

“정리하라고 했다고?”

메리는 손끝으로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앞에서 소희는 잠시 벙쪄 말을 잃었다.

뭐야, 정말 이대로 아리아드를 영원히 보내 줄 생각이었던 걸까.

떠난다는 말에 쉽게 보내 주던 조슈아의 행동 묘사를 떠올렸다. 그렇게 슬프게 울고는 이렇게 쉬이 놓아 줄 리가 없는데. 혹여 소설이 비틀리면서 캐릭터도 비틀려 버린 건 아닌지, 소희는 무척이나 심란해졌다.

“조슈아를 불러 줄 수 있을까.”

소희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메리는 별채를 나섰다. 그렇게 그녀가 이야기를 전달하고 돌아온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저물어 사위가 어두워지고 별채 안 조명이 켜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창틀이 흔들리고,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에도 소희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혹여나 조슈아가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자정이 다 되도록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소희는 창밖만 바라보다가 결국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일이 많이 바쁜 거겠지, 그리 결론 내려도 괜스레 초조해지는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꽉 차 있던 머릿속은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계속된 긴장감에 지쳐 온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노곤해진 상태로 눈을 감았다가 일순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지자 소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토록 기다려 왔던 남자와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조슈아는 문 앞에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볼 뿐 더 다가오지 않았다. 결국 먼저 말문을 연 건 소희였다.

“왔네.”

“….”

“오늘은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침대에서 빠져나온 소희는 한걸음에 그에게 다가섰다.

“메리한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나 기억이 돌아왔거든.”

주절거리는 말소리가 민망할 정도였다.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 대화의 틈을 메울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계속 네 옆에 있고 싶다고….”

이어지는 대꾸는 없었지만 그는 한쪽 손을 올려 제 아래 있는 여자의 머리카락 쓰다듬었다. 느릿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 심장을 간질였다. 이상하게도 그 손길 하나에 초조했던 마음 한구석이 점차 안정감으로 변화하는 듯했다.

마음이 영영 떠난 게 아니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손길은 참 따스했으니까.

한참 동안 이어지는 기분 좋은 감촉에 소희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려는 걸 꾹 참아 냈다. 뒤이어 머리에 닿아 있던 손이 떨어졌다. 아쉬움이 남아 입맛을 다시는 소희를 조슈아가 가만히 내려 보다가 한 발자국 내디뎠다.

“궁금한 게 있어.”

오랜만에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더욱 낮게 깔려 있었다. 호수처럼 깊은 눈빛으로 인해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한 분위기에 압도된 소희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의미 모를 행동에 그녀가 눈을 끔뻑이며 계속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기다란 그림자는 결국 침대 가장자리까지 닿았다. 소희는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결국 몸 위는 묵직한 무게감으로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그렇게 소희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있는 와중이었다.

“넌 누구야.”

일순 그의 붉은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혼란스럽던 머리가 새하얘졌다. 소희는 그를 마주한 채로 콧구멍이 커졌다.

데온도 잠시나마 이상하게 느낀 사실을 조슈아가 몰랐을 리 없었다.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무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문득 작년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연회장에서 술을 음료수로 착각해서 들이켰던 소희에게 건넸던 말들이.

‘아리아드, 이거 술이야.’

‘어? 아, 그래? 뭐 어때. 나 술 잘 마셔.’

‘너 못 마셔.’

또 뒤잇는 장난스러운 말들이.

‘술에 깨서 시녀들한테 화냈잖아. 왜 거기다가 보드카를 뒀냐고. 기억 안 나?’

‘어…. 맞다, 맞다. 기억났다, 하하.’

‘거짓말이야.’

‘…뭐?’

‘술에 깨서 화낸 적은 없어.’

대충 둘러대는 그녀의 말에 그저 웃으며 넘어갔던 표정들이 머릿속에 한가득 담겼다. 소희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난….”

“….”

“…아리아드지.”

그 어물거리는 대답에 조슈아는 또 웃었다. 그때와 비슷한 웃음이었지만 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당황스러워 얼버무리는 대답에 비웃는 것도 같았던 그때와는 달리, 사실 정답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렇지, 넌 아리아드지.”

그는 입매를 부드럽게 휘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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