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1
소희는 넋이 나간 채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소설의 뒤 내용이 더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겨우 정신을 잡고 마우스의 스크롤을 내렸다.
[혼돈 속에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던 혼란이 조금씩 잦아들자 메리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렵사리 입술을 떼어 기억을 잃은 게 분명한 주인에게 최근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대화를 하다 보니 그녀가 정확히 일 년 동안의 기억이 사라진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기억이 사라졌다고 성격까지 이렇게 바뀔 일인가? 메리는 그러한 의문이 들었지만 차분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해 나갔다.
“내가 도망을 가서 조슈아와 결혼이 깨졌다는 거지?”
“네.”
“정말 잘됐네.”
시원스러운 목소리에는 조금의 후회도 묻어 있지 않았다. 아리아드는 다시 방 안을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조슈아 님 소유의 별채입니다.”
“결혼이 깨졌는데 내가 왜 여기 있어?”
“아리아드 님이 머무실 곳이 없습니다. 피어슨 공작가가 망하였고….”
메리는 부모의 죽음에 주인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어찌 포장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답답하다는 듯 노려보는 연보랏빛 눈동자에 기가 눌려 결국 포장하지 못한 날 것의 문장이 튀어나왔다.
“얼마 전에 피어슨 공작 부부께서 모두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잘됐고.”
그런데 고민했던 순간이 민망스럽게 뒤잇는 대꾸가 참으로 간단했다.
“둘 다 잘 뒤졌어.”
개의치 않아 하는 걸 넘어 그녀는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에 다시 메리는 당황해서 허둥거리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 바뀌어 버린 성격이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당황스러움에 한참을 입만 벙긋거리고 있을 때였다. 조슈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나타난 그가 메리는 몹시나 반가웠다.
“저하, 문제가 조금 생겼는데….”
남자에게만 보이게끔 작게 중얼거리고 있는 메리의 말허리가 잘렸다.
“지난 일 년 동안의 기억이 없어.”
아리아드는 제 상황을 태연한 어투로 설명했다. 그러자 메리에게 닿아 있던 붉은 눈망울이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옮겨 갔다.
눈이 마주치자 반듯했던 남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러한 표정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리아드는 제 할 말만 계속해서 이어 갔다.
“네가 왜 날 데리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갈 곳이 없다고 네 보살핌을 받고 싶진 않거든.”
우아한 발음이 한없이 무정하게 흘렀다.
“난 이만 필트모어 저택으로 가 볼게. 데온을 불러 줘.”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조슈아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말문을 열지 않았다. 언뜻 보면 그녀를 탐색하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아리아드는 남자의 허락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통보에 불과한 말이었으니까. 그래서 하체에 덮어 둔 이불을 내리고 힘없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래.”
간결한 한마디에 침대를 벗어나려고 움직이던 아리아드의 몸이 멈칫 세워졌다. 아래를 향해 떨구고 있던 고개가 올라가며 다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설핏 주름져 있던 남자의 미간이 다시 반듯해져 있었다.
“데온을 불러 줄게. 기다려.”
뒤잇는 말투 또한 반듯했다.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고 흔들림 없이.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그들의 중앙에 자리한 메리만이 혼란 속에 있는 듯했다.]
글을 읽은 소희가 느끼는 감정도 메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갑자기 아리아드가 깨어난 것도 기가 막히는데, 집착 남주 설정을 지워 버린 것처럼 그녀를 쉽게 보내 주는 조슈아의 모습도 놀라웠다.
결국 이렇게 모든 게 엉망이 되어 가는 건가. 이제야 조슈아와의 사이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허망한 심정으로 있던 소희는 무의식중에 스크롤을 더 내려 해당 회차에 달린 댓글까지 확인했다.
[전작 재밌게 봐서 이번 작 개연성 거지 같아도 여태 참고 봤는데 이제 도저히 못 참겠네. 아리아드 캐릭터 대체 왜 저럼? 성격이 이랬다저랬다 캐릭터 붕괴가 너무 심하잖아. 하, 여태 참고 봤던 내 돈이 아깝다.]
[이제 제대로 달달한 로맨스 시작되나 했더니 갑자기 뜬금없이 기억상실이라니…. 회차 늘리려고 수 쓰시는 거 다 보여요.]
[전 여기서 하차합니다. 작가님은 상하차나 하세요.]
그래, 본인도 어이가 없는데 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은 오죽할까. 소희는 날카로운 댓글들에도 상처받지 않았다.
띵―
알림 소리가 울리자 소희는 힘없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작품의 저번 달 인세가 입금됐다는 내역이 띄워져 있었다. 여태 욕을 잔뜩 먹어서 망했을 거라는 소희의 예상과는 다르게 놀랍게도 전과 다를 바 없는 수익이 찍혀 있었다.
“이 망작을 욕하면서도 계속 봐 주셨구나…. 감사해라….”
이렇게 이번 작품이 엉망으로 완결이 난다고 해도 소희의 삶이 어려워지진 않을 것이다. 여태 쌓아 놓은 작품 수도 상당했으니까. 이 작품은 심지어 캐릭터들이 알아서 움직이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니 본인은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작품을 새로 집필하면 되는 문제였는데….
이상하게도 진짜 자신의 세상이었던 곳에서 바라던 것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는 어차피 훗날 겪게 될 문제였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 어차피 소설은 무조건 완결이 날 테고, 그 세상 사람이 아닌 소희는 돌아와야 했으니까.
이 자리가 본디 자신의 자리였고 더 이상 저 세계로 갈 수 없는 게 정상적인 건데도. 그 명확한 사실을 곱씹을수록 무척이나 서글퍼졌다.
“…진짜 인생 너무 재미없다.”
앞으로 자신은 무얼 해야 할까.
모르겠고, 그냥 지금 당장 조슈아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소희는 그날 이후로 평소보다 더욱 심한 불면증을 앓았다. 어렵게 잠이 들기 전마다 눈을 뜨면 다른 세계로 가 있었으면 좋겠다며 기도했다.
오늘 그녀는 침대에 여섯 시간 가까이 눈만 감고 누워 있었다. 결국 그렇게 잠들지 못하고 퀭한 눈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이했다. 이쯤 되니 귀찮아서 미뤄 오던 병원행을 결심해야만 했다. 수면 장애가 전보다 더 심해진 거 같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수면제를 처방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소희는 침대 위에 앉았다. 제대로 못 잤던 잠이나 몰아서 자야겠다고 다짐했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볕이 따가웠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잠을 자려는 건 어쩌면 현실 도피일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희는 약을 꿀꺽 삼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 * *
정신이 혼몽한 가운데 보이는 건, 어느 남정네의 태평양같이 커다란 등짝. 근육이 자리 잡힌 탄탄한 뒷모습이 상반신만 드러난 채 이불로 가려져….
잠시만.
뭐지, 이 기시감은?
소희는 희미한 시야에 펼쳐진 광경을 훑다가 눈을 번쩍 떴다. 분명히 익숙한 구릿빛 등짝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손을 들어 오른쪽 볼을 꼬집었다.
“아야.”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저절로 터져 나왔다. 고통이 상당한 걸 보아하니 꿈은 아닌 게 분명했다.
돌아온 것이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세상으로.
어떻게 이곳으로 올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볼 경황도 없었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그만큼 곤혹스러웠다. 처음 빙의했을 때와 비슷한 광경을 보고 전신에 불길함이 감돌았다.
소희의 앓는 소리에 누워 있던 남자가 뒤척이다가 뒤를 돌았다. 당혹감에 콧구멍을 벌렁거리던 소희는 그대로 회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데온은 잠에서 막 깬 나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어났어?”
유려하게 웃어 보이더니 그는 소희를 꽉 안았다. 탄탄한 근육의 굴곡이 맨 살결에 그대로 닿아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래, 둘 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상반신에서부터 하반신까지 모두 맞닿아 있는 아찔한 감각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와 이런 식으로 맞이한 아침은 처음이 아닌데도 이것이 익숙해질 리는 없었다.
소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잤어?”
이 얼마나 멍청한 질문인가. 젊은 남녀가 맨몸으로 침대에 이렇게 누워 있다는 건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문제였는데. 그럼에도 소희는 애써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게 떨려 오는 목소리에 허리를 꽉 조여 오던 남자의 팔이 떨어졌다. 그리고 데온은 소희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아리,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야. 너의 잘못은 아니지.”
합의하에 아리아드와 뜨거운 밤을 보낸 데온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잘못이라면 제시간에 빙의하지 못한 제 탓이요.
소희는 자책과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조슈아와의 사이가 어느 정도 회복된 듯하다가 이로써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잠시간 절망에 빠진 모습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던 데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묘하게 달라진 거 같아.”
나직한 중얼거림에 소희는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뭐가?”
“말투나 행동이….”
그럴 리 없을 텐데도, 그녀를 면밀히 살피는 잿빛 눈동자에 속이 꿰뚫리는 듯했다.
마주한 두 눈동자 주변으로 짙은 긴장감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