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100화 (100/120)

Chapter 100

어둠 끝으로 형광등의 빛이 어슴푸레 퍼졌다. 소희는 먼지가 낀 듯 뻑뻑한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번에는 현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어찌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다니엘과 적대적으로 대립하게 된 시점에서 조슈아를 도와주려면 그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으니 말이다.

원래 소설에서는 수동적이기만 하던 여주인공이 결말 부분에서 흑화하며 다니엘을 응징하는 내용으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재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은 켈리에게서 복수를 기대하기란 힘들었다.

그렇다면 제 개입으로 비틀린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바로잡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남자 주인공이 다니엘에게 밀리는 슬픈 결말로 끝맺음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소희는 다니엘의 구둣발에 거세게 차였던 입가를 매만졌다. 현실로 돌아왔으니 고통이 남아 있을 리 없을 텐데도 이상하게 그 불쾌한 감각이 또렷해서 미간을 팍 구긴 채였다.

나쁜 놈, 작게 욕을 읊조리며 여느 때처럼 소설의 최신 회차를 확인했다. 중점적으로 본 것은 다니엘의 행보였다. 다행스럽게도 소설 속에는 아리아드를 죽이려고 시도를 한 뒤에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황금빛 도장을 눈앞에 두고 만지작거리던 다니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것이 그 어떠한 값비싼 보석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조슈아가 아리아드에게 홀딱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자신을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던 생경한 눈빛이 떠오르자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일평생 모두를 내려 보며 오연한 자세를 취하던 남자에게서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그것으로 여유롭기만 하던 자태를 망가뜨리고 싶어 했던 제 열망이 단번에 해소되었다.

다니엘은 한참이나 국새를 손에 쥐고 낄낄거렸다. 정말 이제 모든 것이 제 손아귀 안에 있는 듯했다. 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이들은 결국 거대한 권력에 눌려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이다.

이제 예정된 수순 대로 옥좌에 오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황제의 병세가 악화하여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없어지자 몇 달 뒤 즉위식이 잡혔으니 말이다.

다니엘은 앞에 서 있는 비서에게 물었다.

“즉위식이 정확히 언제로 잡혀 있지?”

“내년 2월에 진행될 수 있게 준비 중입니다.”

5개월이 남아 있으니 제 세력을 더욱 견고히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서류 중에 종이 하나를 빼 들었다. 그리고 최근 계속해서 머리에 맴도는 문장을 다시 찾아 읽었다.

‘베르겐 지역까지 설치될 철도가 랑뱅 항만까지 이어진다면 사업 수익은 현재 예상치에서 몇천 배가 뛸 것으로 예측된다.’

해당 내용은 신빙성이 높았다. 그 똑똑한 조슈아 녀석이 정리한 서류였으니까.

베르겐 지역은 던마크 제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지역이었다. 랑뱅 항만은 던마크 제국의 소유로 베르겐 지역 바로 위쪽에 자리해 있었다.

삼면이 바다인 항구 도시까지 철도가 이어진다면 무역 사업까지 고려할 때 커다란 이익이 발생한다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현재 예상 수익에서 몇천 배라니.

몇십 배, 몇백 배도 아니고 몇천 배.

다니엘은 그 유혹적인 단어를 곱씹다가 서류를 내려놨다.

생각해 보면 최대 격전지였던 몬트롤 지역까지 제 손으로 얻어 냈는데, 작은 항구 도시 하나 쥐는 게 어려울 리 없었다. 특히 전력을 다한 던마크 제국은 전쟁 예비 물자가 모두 동나 있었으니 항구 도시를 쥐기에는 기가 막힌 적기였다.

“5개월이면 충분하지. 즉위식 전까지 끝내 놔야겠어.”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서류를 내려놨다. 이 일은 아무도 넘보지 못할 거대한 왕좌를 만드는 일에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다.]

내용을 다 읽은 소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결국 또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말인가? 마음속에 맺혀 있는 열등감의 크기만큼 욕심도 어마어마한 캐릭터다웠다.

“혹시 모르니까 이 내용은 조슈아한테 미리 말해 주는 게 좋겠다.”

소희는 그리 혼잣말을 하다가 여운이 남은 듯 남자의 이름을 다시 되뇌었다.

조슈아….

그러자 울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선연히 펼쳐졌다. 일 년 동안 참 다채롭게 많은 표정을 봐 왔었다. 다정하고, 싸늘하고, 무심했던 표정들 말이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는 조슈아라니.

마주한 눈동자 속에서 크게 일렁이던 파도는 하나의 방울이 되어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투명한 뺨 위를 흘러 날카로운 턱 끝에 맺혀 있던 것은 이내 소희의 얼굴 위로 툭 떨어졌다. 그 뜨겁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심장 부근이 저릿해졌다.

아리아드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소희는 빨리 돌아가서 그를 안심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무의식중에 수면제를 먹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빈 통을 확인하고는 그냥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애써 눈을 감고 한참을 뒤척였다. 잠이 들면 조슈아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을 안고서 말이다.

짹짹.

긴 어둠 끝에 새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졌다. 소희는 단번에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데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먼지가 가득한 자신의 원룸 방 안이라니.

좁은 원룸 벽면에 놓인 컴퓨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소희는 눈곱도 떼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소설 플랫폼을 확인해 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주말에는 소설이 연재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평소와 다른 상황에도 분명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여태 그래 왔듯이 다시 잠을 자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방 청소나 해야겠다.”

그래서 소희는 애써 덤덤하게 쌓여 있는 먼지를 빡빡 닦아 내며 몸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청소를 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또 다음 날이 되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확신은 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자고 일어나 눈을 뜰 때마다 여전히 자신은 서울의 작은 단칸방에 있다는 사실이 온몸에 힘을 쭉 빠져나가게 했다. 소희는 무기력하게 주말을 보내고 고대해 왔던 월요일을 맞이했다.

급하게 의자에 앉아 플랫폼에 들어갔다. 대체 왜 소설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예기치도 못한 답이 나와 있었다.

[아리아드는 눈을 떴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삼키지 못한 입안이 퍼석하게 말라 있었다. 그녀는 원인 모를 고통에 미간을 구기고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상체를 어렵게 일으켰다.

“아리아드 님!”

초면인 여자가 달려와 자신을 끌어안자 아리아드의 미간은 더 깊숙이 패였다. 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울먹거렸다.

“…제가 자리를 비우면 안 됐는데. 다 저 때문이에요. 정말 죄송해요.”

“뭐야, 넌 누구야.”

한껏 날이 선 목소리에 몸을 꽉 끌어안고 있던 여자의 손이 잘게 떨려 왔다. 아리아드는 개의치 않고 정체불명의 여자를 거칠게 밀었다.

“내 옷에 더럽게 콧물 묻히지 말고 저리 꺼져.”

“…네?”

침대 밑으로 떨어진 여자는 그 상태로 멀거니 그녀를 올려 보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린 모습이 덜떨어진 바보와 같다고 생각하며 아리아드는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멍청한 여자와는 대화가 통할 거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스로 답을 찾아내야 했다.

“…여긴 대체 어디야.”

아리아드는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이며 낯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에 멈췄다. 창밖으로 맑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필트모어 저택 앞에 저렇게 거대한 호수가 있었던가?

분명 자신은 어젯밤까지 필트모어 저택에 있었다. 데온과 함께 침대 위를 뒹굴다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데온이 나를 다른 방으로 옮겨 둔 건가. 그건 그렇고 머리는 왜 이렇게 아픈 거야.’

아리아드는 이마를 짚었다가 그제야 제 얼굴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들어 있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무래도 혼자서 추측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여전히 멍청하게 바닥에 앉아 있는 여자의 허름한 행색을 보아하니 이 저택에서 일하는 시종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아리아드는 명령했다.

“데온을 불러와 줘.”

“…데온 공작님을요? …여기 안 계시는데.”

여자는 난감하다는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대신 조슈아 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조슈아? 걔를 왜 불러.”

“네?”

“그 재수 없는 놈을 여기로 왜 부르냐고.”

단호한 목소리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런 아리아드를 마주한 메리는 다시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소희는 찬찬히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가 메리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리아드가 깨어나다니. 말도 안 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소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과 깨어난 진짜 아리아드. 드디어 모든 게 제대로 된 자리를 찾아간 것이었는데도 소희는 이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