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9
윽, 머리야.
소희는 미간을 구기며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분명 눈꺼풀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자신이 아직까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려고 몸을 뒤틀자 소희는 그제야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놓였는지 깨달았다. 입에는 천이 물려 있었고, 의자 뒤로 손이 묶여 있었다. 물론 다리도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태껏 정신을 잃으면 현실로 돌아갔었는데 이번에는 기절했다가 눈을 떴는데도 소설 속이었다. 죽을 위기에 처한 건 아니어서 그런가? 소희는 그냥 태평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대체 누가 자신을 납치한 걸까.
정체불명의 남자가 몽둥이로 머리를 후려갈긴 탓에 다 나아 가던 머리가 다시금 지끈거렸다. 애써 아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어둠만 있는 공간에 문이 열리더니 빛이 쏟아졌다. 갑작스레 나타난 인물이 빛을 등진 탓에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
복면을 쓴 남잔가?
갑작스레 시야가 환해지자 눈가를 살짝 찌푸리기 무섭게 다시 문이 닫히고 어둠이 찾아왔다. 뚜벅뚜벅,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 때문에 긴장감으로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앞쪽에서 불이 붙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초를 들고 있는 남자는 다니엘 매킨리였다.
놀란 것도 잠시, 소희는 묶여 있는 몸을 열심히 흔들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남자가 어쩐지 자신에게 심상치 않은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서였다.
발버둥 치니 의자가 그대로 옆으로 기울어 딱딱한 바닥으로 엎어졌다.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자마자 그보다 더한 통증이 찾아왔다.
“역겨운 꼬락서니하고는.”
다니엘은 구둣발로 그녀의 얼굴을 거칠게 걷어찼다. 소희는 입이 틀어막혀 있어 앓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몇 주 전, 이마에 생겼던 상처가 터졌는지 옆으로 피가 고여 떨어지는 게 보였다.
“역시 그쪽이 잘 어울리네. 바닥에 뒹구는 모습이 좋아 보여.”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그녀를 내려 보며 키득거렸다. 뒤잇는 스산한 언성이 장내에 메아리쳤다.
“아리아드 피어슨, 내가 이제 이 지하실에 재밌는 일을 벌일 거야.”
그런 말을 하며 그는 옆쪽으로 걸어갔다. 소희는 옆으로 엎어진 상태로 눈을 도르륵 굴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살폈다.
남자는 라이터로 옆쪽에 놓여 있는 정체불명의 물건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뽀얀 연기가 순식간에 지하실 안을 한가득 메웠다.
그는 다시 소희의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옆에 연기를 피워 놨어. 내가 이 짓을 몇 번 해 봤는데 말이야. 놀랍게도 멀쩡히 살아 있던 사람이 딱 하루가 지나면 시체가 되더라고.”
“….”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허리를 굽힌 그는 소희의 눈앞에서 기분 나쁘게 웃어 보였다.
“조슈아는 과연 24시간 안에 모든 걸 다 버리고 너를 구하러 와 줄까?”
“….”
“시체를 안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조슈아의 모습에 난 한 표를 걸게. 넌 어느 쪽에 걸래?”
다니엘은 다시 허리를 폈다.
“아, 저런. 말을 못 하는구나. 그래도 마지막 소감은 들어 봐야지.”
그리고는 구둣발을 들어 그녀의 입가를 뭉갰다. 기분 나쁜 감각과 함께 물려 있던 천이 옆으로 밀려나자 소희는 입안에 고여 있던 피를 토해 냈다.
“콜록, 콜록.”
이곳에 며칠 내내 갇혀 있던 건지 뒤이어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걸 넘어서 웅장한 소리가 울렸다. 연기가 퍼져 질식하기 전에 배가 고파 아사할 지경이었다.
소희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소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망할 놈아…. 죽일 때 죽이더라도 식사는 챙겨 줘라….”
마지막 소감이 식사 요청이라니. 웃고 있던 다니엘은 잠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입매를 굳혔다. 그는 헛웃음을 내뱉고는 무정하게 등을 보여 멀어졌다.
“행운을 빌지, 아리아드 피어슨.”
남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뒤이어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찾아왔다. 소희는 혼자 남아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니면 물이라도….”
목이 찢어지도록 아파서 더 이상 어떠한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천근만근 같은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 소희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 생각했다. 몸 상태를 보아하니 이번에는 정말 현실로 돌아갈 거 같다고.
* * *
“…저하, 송구하옵니다. 아리아드 님이 납치됐습니다.”
집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던 조슈아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난투의 흔적인 듯 기사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는 주인을 바라볼 염치도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굽혔다.
그 앞에서 남자는 잠시간 넋을 놓고 있었다. 아리아드의 납치 소식은 너무 갑작스러웠으니까.
대체 누가, 왜?
평소라면 답을 쉽게 찾아냈을 사고가 그 여자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지러이 뒤엉켰다. 그는 애써 멍해진 정신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사람을 풀어 라트베아 도시 전체를 수색하세요.”
대대적인 수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라색 머리카락 한 올조차 발견하기 어려웠다. 조슈아는 미친 사람처럼 도시 곳곳을 직접 헤집고 다니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며칠 뒤.
엉망이 된 몰골로 집무실에 들른 조슈아는 그 안에서 범인과 마주했다. 가죽 소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은 다니엘 매킨리는 샐샐대는 낯으로 그를 반겼다.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렸나 봐. 찾아 헤매는 모습이 좋은 구경거리였어. 덕분에 며칠 내내 꽤 즐거웠다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조슈아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왜 여태 이 남자를 떠올리지 못한 건지. 가까이에서 이런 짓을 저지를 사람은 다니엘밖에 없었는데. 너무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사실, 곧바로 알았다고 해도 다니엘이 쉽게 아리아드를 풀어 주지도 않았을 테지만.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남자 앞에서 다니엘은 태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과자를 집어 입에 물더니 말을 이었다.
“거래 하나 할래? 네가 갖고 싶은 것과 내가 갖고 싶은 걸 교환하는 거야.”
“….”
“네가 갖고 싶은 건 아리아드, 내가 갖고 싶은 건 이 집무실에 있는 국새.”
병약해진 황제가 침대에 누워 있어 모든 힘을 상실한 지금, 직접 물려받은 국새를 가지고 있는 조슈아가 황제를 대신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직접 국새를 넘긴다는 건 황태자 자리를 포기한다는 소리였다.
그렇지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갖고 싶었던 건 이까짓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조슈아는 다니엘을 지나쳐서 잠겨 있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서 화려하게 조각된 금빛 도장을 꺼낸 그는 다리를 꼬고 있는 다니엘 앞에 섰다.
“위치를 말해.”
“국새를 먼저 넘기면 알려 줄게.”
다니엘은 오른손에 쥔 작은 쪽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에 조슈아는 망설일 것 없이 테이블 위로 국새를 내려놨다.
그걸 들어 찬찬히 살핀 다니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신이 그렇게 열망하던 물건이 확실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쪽지를 내려놨다. 그것을 낚아챈 조슈아는 다급하게 종이를 펼쳐 안에 쓰인 내용을 확인했다. 라트베아의 건물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그는 황급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까짓 계집 하나 때문에 결국 모든 걸 버리는구나. 널 휘두를 이렇게 좋은 열쇠가 있다는 걸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몰라.”
뒤쪽에서 비웃음이 울렸다. 다니엘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그를 조롱했다.
“아, 그런데 조슈아. 아리아드가 살아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분명 그 목소리가 귓속에 정확히 꽂혀 들었지만, 두 다리에 힘을 실어 더욱 속력을 높일 뿐이었다.
뒤따르는 호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말을 타고 정신없이 달려 쪽지에 적힌 곳에 도착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헤매는 과정에서 그의 속은 이미 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곳에도 없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밑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하고는 그는 다급하게 밟아 내려갔다. 문틈 사이로 연기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잠겨 있는 문을 거칠게 차서 부셨다. 지하실 안에 가득히 차 있던 연기가 남자의 전신을 뒤덮었다. 숨이 꽉 막힐 듯한 냄새에도 그는 연기를 뚫고 들어갔다.
사방으로 하얗게 연기가 깔려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그렇게 한참을 걷던 그의 발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찾고 있는 여자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슈아는 곧바로 허리를 숙여 팔을 뻗었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아리아드를 들어 올렸다.
곧바로 그는 지하실을 빠져나와 계단을 밟았다. 시선을 살짝 내리니 피투성이가 된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곧 숨이 끊긴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파리한 모습이었다.
조슈아는 그녀를 품은 팔에 힘을 실었다.
마음을 적당히 주고받으며 우위를 점하겠다고?
웃기는 소리.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조슈아?”
밑에서 가느다란 언성이 이름을 불러 왔다. 품 안에서 게슴츠레 눈을 뜬 여자를 마주 보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끊겨 사라질 거 같은 말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졌다.
다니엘은 틀렸어.
난 시체가 될 리 없거든.
정말이야.
그러니까 울지 마.
울지 말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