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8
소희가 사라진 방 안.
켜져 있던 모니터 위로 소설의 새로운 회차가 업데이트되었다.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던 다니엘은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쓰라린 감각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다들 아직도 내가 만만한 거지….”
그리고 벌게진 얼굴로 이를 갈며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복도에 열어 둔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이 잔뜩 흥분되어 있던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듯했다. 특히 그 바람에 실린 탄내가.
다니엘은 건물에 제일 높은 층으로 가 창문 앞에 섰다. 이곳에서 황궁이 제일 잘 보였다. 까만 밤, 화려한 조명을 켜 둔 듯 황궁만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누그러졌다. 저 자리에 황궁을 새로 짓고 옥좌에 올라 모든 걸 제 발아래에 둘 것이다.
곧 제 앞에 굽실거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급격히 기분이 좋아졌다. 특히 조슈아, 그놈이 허리를 굽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다니엘 저하!”
갑작스레 방 밖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가 유쾌한 상상을 깨트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다니엘의 수하는 허리를 굽혀서 숨을 헐떡이다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가, 갑자기 아리아드 피어슨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뭐?”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가 살아 계십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잠시 말을 잃은 그는 곧바로 얼굴을 구겼다.
“그게 말이 돼? 아리아드 피어슨이 갑자기 거기에 왜 나타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불길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대체 뭐 하는 여자야!”
화를 참지 못하고 다니엘은 앞에 있는 책상을 거칠게 내려쳤다. 아리아드 피어슨, 요즘 그 이름만 스치듯 들어도 부아가 치밀었다.
옛날부터 자신을 깔보는 듯한 건방진 눈깔을 파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다. 특히 요즘은 그러한 생각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심한 결벽증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여자는 제 기분을 더럽게 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했다. 황성에서 돌아왔을 때 굳이 장갑을 빼고 손을 잡은 것을 보면 분명했다. 그리고 축하연에서도 갑작스레 튀어나와 켈리와 제 사이를 방해하질 않나….
‘두 번 다시 이러지 마. 내가 어디든 찾아갈 거야. 알아들어?’
감히 여자가 어디다 대고 그리 큰소리를 치는 건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다니엘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 콧대를 꺾어 버리고 싶은데 어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제 앞에 아리아드가 서 있는 거처럼 허공을 노려보던 다니엘은 뇌리를 스친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왜 여태 그 쉬운 방법을 생각 못 했지?”
조슈아가 가진 국새를 뺏어 오는 방법. 그 해답은 아리아드 피어슨, 그 여자에게 있었다. 그놈이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제 손에 쥔다면 옥새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두 남녀의 높은 콧대를 한 방에 눌러 줄 최고의 방법이었다. 머릿속으로 꽤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다니엘은 입꼬리를 샐쭉 들어 올렸다.]
* * *
초점이 잡히지 않은 뿌연 시야로 한 여자가 보였다. 게슴츠레한 소희의 눈을 마주하고는 비앙카는 혀를 찼다.
“쯔쯧, 미련하기는.”
“건강해 보이시네요…. 다행이다….”
꽤 오랜 시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건지, 목이 잠겨 입 밖으로 형편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붉은 눈망울에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저도 그쪽 좋아서 살린 거 아니거든요.’
자신을 내려 보는 여자에게 소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할 기운도 없어 다시 무거운 눈꺼풀을 감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던 거 같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제 손에 익숙한 온기가 와 닿자 소희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새까만 머리카락이었다. 두 번째 방문자인 조슈아는 자신이 잡고 있던 작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리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피곤함이 묻어 있던 얼굴이 단숨에 날카로워졌다.
“너 제정신이야?”
정신을 차릴 때마다 쏟아지는 게 타박하는 소리뿐이라니. 몸이 아파 그런 것도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서러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걸 또 예리하게 발견하고는 조슈아는 손끝으로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과는 다르게 말투는 냉랭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뛰어들어 가.”
“살리고 싶었어…. 또 많은 사람이 죽게 둘 순 없으니까….”
“왜 쓸데없이 영웅 행세야. 누가 너더러 살리래?”
짓씹어 뱉는 사나운 목소리에 소희는 생각했다. 그냥 다시 기절하는 편이 낫겠구나, 하고. 그래서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기력이 없는 몸은 금세 다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또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옆쪽에서 자꾸만 들려오는 훌쩍거리는 소음에 소희는 눈을 떴다. 이번에는 그 자리에 데온이 있었다.
그는 가늘게 뜬 눈과 마주하자마자 소희의 몸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아리, 괜찮아? 내가 보여? 제발 정신 차려 봐.”
안 그래도 커다란 구조물을 맞아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데온 덕분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힘 조절을 못 하고 자꾸만 흔들어 대는 통에 구역감이 치솟는 걸 느끼며 소희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나 멀쩡했는데, 네가 하도 흔들어 대서 죽을 거 같아.”
희미한 목소리에 그제야 데온은 그녀의 팔을 잡고 흔들던 손을 떼어 냈다. 곧이어 그는 거대한 몸을 웅크리고 소희의 배 위에 고개를 푹 묻었다.
배 쪽이 그의 눈물 콧물로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소희는 천천히 제 몸 상태를 확인했다. 팔, 다리 모두 멀쩡하게 움직였고 허리가 아프긴 했지만 뒤척이는 게 가능한 거 보면 나쁘지 않았다. 머리도 어지러운 걸 제외하고는 별문제는 없는 거 같았다.
“몸이 생각보다 멀쩡하군…, 좋아.”
그리 중얼거리고 있는데 데온의 뒤쪽에서 갑작스레 사나운 언성이 들려왔다.
“멀쩡하긴 어디가 멀쩡해.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주제에.”
조슈아가 엎드려 있는 데온을 거칠게 밀면서 등장했다.
거대한 몸집이 나무 바닥으로 떨어지며 방 안에 굉음이 울렸다. 데온은 아픈 기색도 보이지 않고 곧바로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우리 아리한테 큰소리야! 당장 안 나가?”
“여기 내 별채야. 너나 나가.”
“내가 계속 옆에 붙어 있을 거야. 네놈은 일하느라 바빠서 챙겨 주지도 못하잖아!”
귓속을 윙윙 울려 대는 언성들은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소희는 어지러운 풍경을 뒤로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그냥 기절하는 편이 좋을 거 같았다.
* * *
소란스러운 이 주일이 지나갔다. 하루 종일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데온은 조슈아의 손에 의해 결국 별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사이 예상치도 못한 사람들이 병문안을 다녀갔다. 로잘린은 꽃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소희에게 제 이야기를 소문내지 않아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떠났다.
메리 말로는 비앙카와 켈리도 조용히 방문했다고 했다. 비앙카는 그녀가 자는 사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고 떠났고, 켈리는 방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고 했다.
수많은 사용인이 양동이로 물을 퍼다 날랐지만, 황궁이 망가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요즘 황궁을 복구하느라 모두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은 모두가 자리를 비워 별채에 소희와 메리만 남게 되었다.
이 주 동안 몸 상태는 점점 회복되어 별채 안을 가볍게 거닐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주치의는 아리아드의 몸 상태를 보더니 천운이라고 말했다. 상반신에 기다란 화상 흉터가 남긴 했지만 뼈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머리가 살짝 패였지만 뇌에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따분하게 소희의 옆에서 하루 종일 병시중을 들고 있던 메리는 불쑥 말을 꺼냈다.
“날도 좋은데 앞에 호숫가를 좀 걷고 오실래요? 제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메리를 밀치고 대신 구조물을 맞아 쓰러진 뒤로부터, 그녀는 전보다 더 충성적인 자세가 되어 아리아드를 떠받들었다. 힘이 잔뜩 실린 말에 소희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정신없는 나날들이 지나가고 나니 가을이 찾아왔다.
소희는 잔잔한 호수와 저 멀리에 자리한 울긋불긋한 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찬 바람에 몸을 살짝 떨었다. 그걸 귀신같이 본 메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방 겉옷 좀 챙겨 오겠습니다.”
“괜찮은데….”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충성심이 가득히 차오른 메리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안 저래도 되는데. 미안함에 그러는 것을 알지만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소희는 다시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몇 분 동안 혼자 남아서 여유롭게 호수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물비늘을 따라 백조 무리가 호수의 정중앙을 지나고 있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소희가 입술을 뗐다.
“메리, 저기 봐. 백조가 있어. 너무 예쁘….”
말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소희는 입을 다물었다. 뒤에 있는 건 메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조차 알 수 없는 거구의 남자가 소희를 내려 보고 있었다.
남자는 손에 든 몽둥이를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희의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