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97화 (97/120)

Chapter 97

대한민국 서울.

소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사레가 들려 한참을 폐 부근을 부여잡고 콜록거렸다.

현실로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주변에 매캐한 냄새가 자리하고 있는 듯 입안이 텁텁했다. 어렵게 몸을 일으켜 욱신거리는 허리와 뒤통수를 더듬었다.

“돌아갔는데 아리아드 몸이 반신불수가 되어 있지는 않겠지….”

설마 그렇겠어.

태평하게 그리 중얼거리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플랫폼에 들어가 보니 꽤 많은 회차가 풀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한 달 전 물에 빠져서 현실로 돌아온 이래로 한 번도 제 방으로 돌아온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현실로 돌아오는 게 힘들었다. 자신이 조슈아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소희는 애초에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쩐지 목구멍이 텁텁하다 했더니, 집주인의 부재로 한가득 쌓여 있던 먼지가 소희를 반기며 휘날리고 있었다. 마우스를 쥐었다가 떼어 내자 손바닥이 잿빛 먼지로 가득했다.

에이, 몰라.

어차피 제 방으로 돌아오기도 힘든데, 먼지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소희는 다시 마우스를 쥐고 스크롤을 내려 제일 최신 회차 내용부터 확인했다.

거기에는 켈리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멈춰!!! 당장 손 떼!!!”

모든 걸 포기한 채로 넋 놓고 있던 켈리는 갑작스러운 고함에 고개를 들었다. 제 몸을 누르고 있던 남자가 사라지고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그제야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니 또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몸이 피로하니 머릿속에서 정화되지 못한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당신 정말 짜증 나. 최악이야.”

알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잔뜩 삐뚤어져 엉망인 말을 내뱉고 있다는 걸.

아무리 밟으려 해도 밟히지 않는 여자를 보면 자꾸만 심술이 났다. 못된 짓을 저지르고 나서도 도움을 주는 곧은 마음가짐에 저 혼자만 자꾸 초라해지는 듯했다.

“날 끌어내릴 거면 끌어내리든가! 일부러 블루앙 래비를 데리고 내 앞에서 얼쩡대면서 사람 피 마르게 하지 말고!”

“사람을 피 마르게 한다고? 겨우 그런 걸로 네가 나한테 큰소리칠 자격이 돼?”

“안 될 건 또 뭔데!”

아리아드의 머리를 쥐어 잡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구르면서도 자신만 엉망이 되어 가는 거 같았다. 저 혼자 진창을 구르는 느낌이었다.

“아리아드와 둘이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다 나가 주세요.”

켈리는 오랜만에 마주한 남자를 피해 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그의 침실에서 있던 사건 이래로 이렇게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술에 취해 저지른 만행으로 도저히 그의 낯을 볼 면목이 없었다.

어떻게 건물을 빠져나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정신없이 두 다리를 움직이니 어느새 까만 밤하늘이 보였다. 사람이 없는 건물 외곽 벤치에 앉자마자 참아 왔던 눈물이 떨어졌다.

외부에 자리한 조명으로 인해 자신의 그림자가 모랫바닥에 그려졌다. 잔뜩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 구겨져 있는 드레스, 눈물을 닦아 내느라 바쁜 두 손. 그림자에 그려진 그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제 모든 게 너무 싫어 미칠 지경이었다. 밑에 드리운 까만 그림자조차도 말이다.

일순 그녀의 앞으로 손수건을 쥔 익숙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뒤를 쫓은 건 아니고…. 저도 잠시 쉬려고 나왔어요.”

나직한 변명에 고개를 드니 브릭스가 있었다. 그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켈리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고는 중얼거렸다.

“인생은 참, 뜻대로 되는 게 몇 개 없는 거 같아요. 갖고 싶은 게 있는데 죽어라 쫓아도 가질 수가 없고, 또 누가 미워 죽겠는데 진짜 죽일 수도 없고. 그렇죠?”

켈리의 상태를 꿰뚫어 보는 거 같은 말이었다. 들춰진 마음이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다가도 사실 지금 이 엉망인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뒤잇는 목소리가 울음과 섞여 형편없이 떨려 왔다.

“…그 여자는 빛이 나는데, 저는 그저 평범해요. 아니, 오히려 볼품없죠. 노력한다 해도 절대 메우지 못할 그 차이가 저는 너무 힘들었어요….”

질투는 제 마음을 좀먹고 끝없이 자라났다. 부러워하는 마음은 비틀려 열등감이 되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그 감정은 증오가 되었다.

모든 걸 아리아드의 탓으로 돌려 버텨 봤지만, 사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를 망친 건 나 자신이라는 걸.

켈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위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울렸다.

“인생은 불공평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갖지 못하는 게 있더라고요. 노력만으로 모든 걸 이룰 수 있다는 건 하얀 거짓말이에요. 저는 그걸 깨닫고 어느 순간부터 커다란 욕심을 내려놨어요. 가지지 못하는 걸 갖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 너무 꼴불견이어서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무뚝뚝한 언성이 이상하게도 그녀를 위로해 주는 거 같았다.

“처음에는 손을 놓고 바라만 보니 허탈했어요. 그런데 점차 시간이 흐르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왜 과거에는 그거 하나에 그렇게 목을 매고 있었나 싶기도 하고. 이 세상에 그거 말고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브릭스가 밤하늘을 올려 보며 말했다.

“터무니없이 높은 목표를 쫓으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는 말자고요.”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뒤에 이어진 커다란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소희는 한참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켈리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알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미운 건 분명했지만, 이런 식이니 마음 놓고 미워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그녀가 이토록 망가진 건 애초에 자신의 개입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켈리의 대사를 곱씹다가 소희는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며칠 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으며 무기력한 하루를 보냈었다. 그렇게 평소라면 누워 있을 시간에 켈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게 오늘은 기운이 넘쳤다. 오랜 고민 끝에 세운 계획을 오늘은 해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샤워 후에 몸단장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오늘로써 이 방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답답했던 공간이 무언가 달리 보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긴 고민 끝에 그런 결론을 내리니 온몸을 옥죄여 오던 불쾌한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켈리는 황궁으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려 가볍게 움직이는 두 다리가 불청객으로 인해 우뚝 멈춰 섰다.

“어딜 가는 거지.”

다니엘은 거대한 덩치로 앞길을 단단히 막아서고 있었다. 한결 가벼워졌던 몸이 다시 눅진해지는 것 같았다. 켈리는 애써 쪼그라드는 어깨를 펴고 목을 가다듬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굴었다.

“황후 폐하께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지금은 안 가는 게 좋을 텐데.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싫어요.”

황궁에 닿아 있던 적갈색 눈동자가 켈리에게로 돌아왔다.

“지금 가면 분명 후회할 텐데.”

“…왜죠?”

“잠시면 돼. 따라와.”

남자는 그녀의 한쪽 팔을 꽉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둘만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고압적인 어조와 행동에 눌려 결국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다니엘이 머무는 건물이 있었다. 그곳 응접실에 도착해서 다니엘은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에 살갗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거북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간 이어진 침묵 속에서 다니엘은 흉터가 진 왼쪽 눈매를 쓰다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어. 아이를 갖기 위해 꽤 노력하고 있다지. 그런데 조슈아는 그에 응해 주지 않는다고.”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갖고 있던 모든 욕심을 내려놓은 지금,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이야기. 제정신이 아니었던 과거에 들었다면 혹했을지도 모를 이야기.

“이런 건 어때. 나와 관계를 갖고 아이를 가져서 그게 조슈아의 아이인 척하는 거야.”

지금이 되어서야 남자에게서 과거의 제 한심한 모습까지 비쳐 구역질까지 올라오는 그런 이야기였다.

다니엘은 천천히 켈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죽 장갑을 벗어 손등으로 그녀의 하얀 뺨을 천천히 쓸고 내려갔다.

“아니면, 내 옆으로 오는 선택지도 있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목을 조여 왔다. 켈리는 제 뺨에 닿아 있는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땅바닥에 닿아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 망가지고 싶지 않아.”

날카로운 눈빛이 와 닿자 유려하게 올라가 있던 남자의 입매가 단숨에 일그러졌다. 뒤이어 목을 긁고 나와 잔뜩 비틀린 언성이 울렸다.

“이젠…. 너까지 날 무시하는 거야?”

커다란 손이 위협적으로 다가와 금빛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팔을 휘두르자 머리가 뜯겨 나갈 거 같은 고통과 함께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의자 밑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다니엘은 바닥에 널브러진 몸 위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위압적인 힘이 가해지자 켈리의 전신이 달달 떨려 왔다.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지. 도와줄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는데….

켈리는 눈을 꽉 감고 조금 전 제 행동을 후회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리아드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이 남자 앞에서 큰소리치던 아리아드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졌다.

할 수 있어….

나도 할 수 있어, 그 여자처럼.

켈리는 한쪽 다리에 최대한 힘을 실었다.

“악!”

위에서 버티고 있던 남자는 하체 중심부에 가해진 엄청난 힘에 놀라 옆으로 밀려났다. 몸을 웅크리고 바닥을 구르고 있는 남자를 두고 켈리는 방을 뛰쳐나왔다.

두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목적지인 황궁 앞에 다다랐을 때가 되어서야 켈리는 놀라서 발길을 멈춰 세웠다.

맵싸한 연기가 궁전 주변에 뒤덮여 있었다.]

“이놈의 새끼가 또! 저 못된 손버릇을 어떻게 할 거야!”

소희는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마우스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열이 올라 자리에서 일어나 몇 분 동안 씩씩거리다가 머리를 짚었다.

“아우, 진짜 골 아파.”

그리 화를 내고 있다가 문득 자신이 짜 놓은 캐릭터라는 걸 깨닫고는 소희는 급속도로 차분해졌다. 그리고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그래,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이런 구리고 냄새나는 캐릭터를 만든 작가 잘못이지.”

소희는 제 머리를 쾅쾅 내려치며 자책했다. 그렇게 하도 때려 대서 어지러울 무렵에야 머리를 치는 행위를 그만뒀다. 뒤이어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읊조렸다.

“…그래도 다니엘에게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켈리를 생각하면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미워서 분노가 치솟다가도 이미 그녀를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어지러운 감정들이 차분히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자신은 그녀를 쉬이 용서할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에 아이를 잃었던 고통을 생각하면 쉬이 긍정하기도 힘들었다.

괜스레 뒤숭숭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소희는 잡념을 털어 내기 위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빠른 수면을 위해 하나 남은 알약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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