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6
비앙카는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녀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초조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던 남자는 한결 여유가 있는 표정으로 그녀를 반겼다.
“어머니, 오셨습니까.”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앙카는 그에 아무런 대꾸 없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남자의 적갈색 눈동자에 일순 형형한 기색이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그는 다시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피곤해 보이시니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저에게 힘을 실어 주셨으면 합니다.”
비앙카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머금었다. 시원스러운 대꾸가 돌아오지 않자 다니엘의 낯이 전보다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돌아가는 형세를 아신다면 지금 저의 위치가 조슈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많은 세력과 힘을 쌓아 올렸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어머니께서 저에게 힘을 실어 주신다면 후회하지 않으실 만한 성과를 보여….”
“다른 이가 이뤄 놓은 결과물을 뺏는다고 그게 고스란히 너의 것이 되는 줄 아느냐.”
가만히 듣고 있던 비앙카는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다니엘은 여유롭게 치켜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저리 말하는 것을 보니, 그녀가 무역선 폭발에 관해 그 내막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보이십니까? 저의 노력을 그저 갈취로 취급하시는 거 같아 매우 섭섭합니다.”
투정 어린 말에도 비앙카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가 그녀의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듯했다.
며칠 동안 세상의 중심에 있는 듯 붕 떠 있던 그의 기분이 저 아래로 내려앉았다. 땀을 뻘뻘 흘리는 노력에도 그녀의 기대는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조슈아가 태어난 순간부터 계속되었던 고통이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는 못난 아들이지요.”
다니엘은 기분이 몹시 상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그의 낯에는 여유로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제 방식대로 저의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뒤이어 거칠게 나아가는 발길에 분노가 묻어 있었다. 그는 응접실을 빠져나와 낮게 중얼거렸다.
“…그냥 모두 없애 버리면 그만이야.”
* * *
오늘도 소희는 메리와 함께 궁궐 주변 산책로를 걸었다.
며칠 내내 그리 열심히 탐색해도 다니엘 매킨리의 음험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도 아무런 소득 없이 해가 저물었다.
평소와 다르게 말수가 줄어든 메리는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한참 뒤에 말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엄청 어수선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쪽으로 양손에 양동이를 든 사용인 무리가 지나갔다. 모두가 굉장히 다급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뭐지, 이 불길함은.
아직까지 궁궐의 돔 위로 새까만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거나, 불길이 치솟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저 기분 탓인 걸까. 선선한 바람결에 탄내가 함께 실려 오는 것도 같았다.
“오늘이다.”
“네?”
소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무리 지어 지나가는 사용인의 대열에 합류했다. 어리둥절해하던 메리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급박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아리아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와 메리는 그렇게 수월하게 황제가 머무는 궁궐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궁궐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냄새가 코끝까지 들어찼다. 자칫 새까만 연기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면 늦을 뻔했다. 이미 궁궐 안쪽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으니까.
앞쪽에 사람들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물을 계속 퍼 나르고는 있는데 출입구 쪽 불길이 잦아들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테라스 쪽도 불길이 거셉니다!”
소희는 그 이유를 알았다. 다니엘의 수족이 출입구 쪽에 유독 많은 기름칠을 해 둔 탓이었다. 한마디로 저 입구 쪽만 뚫고 들어가면 안쪽은 이보다 괜찮을 거라는 소리였다.
여기서 황제와 황후가 연기로 인해 질식사한다는 설정을 해 두었기에 소희는 서둘러야 했다.
옆에 서 있던 메리는 어느새 사용인들과 함께 양동이를 들고 물을 뿌리다가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어유, 어떡해요. 아주 난리네.”
“메리, 난 들어가야겠어. 위험하니까 넌 여기에 있어.”
“네…. 네에?”
메리는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앞에서 소희는 지체할 거 없이 허둥거리는 사용인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몸에 물을 뿌리고 젖은 손수건이나 옷으로 코와 입을 가리세요. 걸을 때는 최대한 몸을 낮춰야 합니다.”
본인은 불사의 몸이니 혼자 해결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 그리고 함께 갇혀 있을 시종들까지 혼자서 부축해서 나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녀의 외침에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다들 얼떨떨해하는 낯이었다. 소희는 옆에 놓인 양동이에 있는 물을 제 몸 위에 뒤집어쓴 뒤 몸소 시범을 보였다.
혹시라도 기다란 원피스에 불이 붙을까 옷도 벗었다. 그러자 얇은 슈미즈 속옷만이 드러났다. 주변에서 놀라 탄식을 터트렸지만 소희는 신경 쓰지 않고 젖은 드레스로 코와 입을 막았다.
“아리아드 님!”
메리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와 함께 소희는 그대로 발길을 움직여 출입구 쪽으로 직진했다. 그렇게 앞장서자 허둥거리던 사용인들도 하나둘씩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침실의 위치는 잘 알고 있었기에 앞장설 수 있었다. 한때 유럽 여행을 가서 감명 깊게 봤던 궁전을 똑같이 상상하며 쓴 덕이었다. 서양풍 소설을 쓸 때마다 모조리 그 궁전을 상상하며 묘사해 뒀으니 황제의 침소 방향이야 뇌리에 인이 새겨질 정도로 외우고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안쪽의 불길도 꽤 거셌다. 죽지 않는 몸을 가졌대도 고통은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과 똑같았으니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용기 내서 피부를 아릿하게 만드는 열기를 헤치고 나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떼어 내어 긴 복도를 지나 사람들이 갇혀 있을 문 앞에 다다랐다. 그 앞쪽에는 누군가 기다란 쇠막대를 앞에 두어 문을 단단히 막아 둔 채였다.
딱 보아도 뜨겁게 달궈져 손을 대기가 힘들 거 같았다. 소희는 몸을 뒤로 뺐다가 있는 힘껏 막대를 찼다.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굴하지 않고 여러 번 발길질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힘에 의해 고정되어 있던 쇠막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자 열기로 일렁이는 시야 안에 황제와 황후를 포함한 네 명의 시녀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희는 코와 입을 가리고 있던 드레스를 바닥에 던지고 맨 앞쪽에 있는 비앙카를 끌어안았다.
“콜록, 콜록. 다들 빨리 사람들을 부축해서 나가세요!”
지독한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뻑뻑해진 눈을 반사적으로 깜빡거릴 때마다 고통 때문에 맺힌 눈물이 떨어졌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애써 눈을 크게 뜨려고 노력하며 쓰러진 비앙카를 안고 복도를 걸었다.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물을 뿌린 덕에 출입구에 거센 불길은 어느 정도 진화된 듯 보였다. 안쪽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온 소희를 보고 사람들이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은 아리아드보다 황후의 안위가 훨씬 중요한 자들이었기에, 단숨에 소희의 품에 위태롭게 몸을 맡기고 있던 비앙카만 부축해 사라졌다.
흐릿해진 시야로 방에 갇혀 있던 인물들이 모두 건물 밖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모두를 살렸다는 안도감이 밀려오자 소희가 애써 힘을 주고 버티고 있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아리아드 님!”
대자로 뻗어 있는 몸 위로 메리가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기운이 빠져 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소희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난 안 죽어. 아주 멀쩡해.”
달래려고 하였으나 다 죽어 가는 목소리에 오히려 울음소리가 더욱 커져 갔다. 한참을 그렇게 칠흑빛 하늘에 저 혼자 평화롭게 반짝거리는 별을 보고 누워 있었을 때였다.
투둑.
갑작스레 건물 외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메리는 우느라 정신이 없는지 그 소리를 못 들은 듯하였다. 소희는 불안감에 몸을 일으키려고 상체에 힘을 주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고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바로 위쪽에서 불 때문에 약해진 외벽이 부서지는 것이 소희의 두 눈에 실시간으로 보였다.
그때 어떻게 그런 초인적인 힘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맥없이 늘어져 있던 팔에 힘이 실리고 소희는 제 위에 엎드려 있는 메리를 거칠게 밀쳤다.
쾅.
그 순간은 부서진 구조물이 떨어질 때와 맞물렸다. 온몸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며 정신이 점차 아득해졌다.
소설의 내용은 바뀌었다.
이것이 훗날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소희는 고통보다 훨씬 큰 안도감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뒤잇는 건 새까만 어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