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5
“…어. 다, 당근 먹을래?”
당근을 쥔 소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먹다 남긴 당근을 내려 보는 눈동자에서 서늘한 기운이 읽히자 절로 수전증이 도졌다.
조슈아의 단정한 눈썹이 찡그려졌다.
“내가 여기 왜 왔을 거 같아?”
“…엉?”
“당근을 먹으러 온 건 아니야.”
“그러면…. 내가 보고 싶어서 왔나?”
소희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무표정한 낯과 마주하자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절로 뻣뻣하게 굳어 내려갔다. 결국 더욱 초조해진 마음에 아무런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요리는 하지 말고…. 그냥 위에 가서 술이나 마실까? 먹다 만 과자가 있는데 그걸로 술안주를 하면 될 거 같아.”
“….”
“그래, 그게 좋겠다.”
소희는 들고 있던 당근을 내려놓고 급하게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분위기상 조슈아는 이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거대한 몸집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순순히 끌려왔다.
그렇게 주방을 등지고 몇 걸음 떼어 냈을 때였다.
우당탕.
갑작스레 창고 쪽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소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쥐…. 쥐가 있더라고 별채에.”
궁색한 변명과 함께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바닥을 구르는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닌 듯 전보다 더욱 커다란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다급하게 덧붙였던 변명이 무색하게 안쪽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쥐가 욕도 할 줄 아네.”
“…하하.”
담담한 말투가 들려오자 소희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영혼 없는 웃음을 흘렸다. 더 어떠한 말을 덧붙인다고 해서 무마될 상황이 아니었다. 눈치가 상당히 빠른 남자는 이미 창고 안에 있는 쥐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조슈아는 별말 없이 계단을 밟아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소희는 그러한 행동에 의아해하다가 다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그때 뒤쪽에서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온이 구겨 넣었던 몸을 펴며 창고에서 빠져나왔다.
“아리,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
이 정도면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너무 답답해.”
소희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원망이 깃든 눈초리를 읽었는지 그는 태연스럽게 어깨를 살짝 들어 보였다.
“이미 저 새끼는 다 알고 온 거야. 어떻게 딱 이 순간에 나타났겠어. 내가 별채에 들어올 때 지켜보던 놈이 있었거든. 아리, 널 감시하던 조슈아의 부하겠지.”
계단에 닿아 있던 조슈아의 눈동자가 천천히 데온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데온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눈치가 없는 건 여전하네.”
“뭐, 인마?”
“쥐새끼처럼 숨어 있다가 그냥 조용히 사라질 것이지. 조용히 넘어가 주려고 했더니, 멍청한 놈들은 꼭 일을 크게 만들어.”
“저 망할 놈이 또 신경을 살살 긁네. 네가 조용히 안 넘어가 주면 뭐 어쩔 건데, 어?”
또 시작됐다. 두 남자는 얼굴을 붙이고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주먹질할 것처럼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가시 돋친 말들이 끝없이 오가며 소희의 귓속을 윙윙 울려 댔다. 조슈아의 등장으로 예민해져 있던 신경에 더욱 날이 서는 듯했다.
“제발…. 그만해….”
소희가 머리를 짚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는 날카로운 언쟁에 그대로 묻힐 뿐이었다.
* * *
불붙은 싸움이 잠시나마 가라앉았다.
기다란 벨벳 소파 위, 소희를 중심으로 좌우에 두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들의 칸막이를 자처한 것이다. 눈만 마주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탓에 그렇게 임시방편으로 상황을 모면하였다.
꽤 오랜 시간 이어지고 있는 정적 속에서 소희는 헛숨을 들이켰다. 사실상 말다툼을 할 때나 지금이나 숨 막히는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하며 뚱하게 앞만 보고 앉은 데온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데온, 조슈아를 도와주겠다고 그랬지?”
“아니.”
“뭐?”
곧바로 돌아온 짤막하고 단호한 대답에 소희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했던 달콤한 말들은 어디로 증발했는지 데온은 한쪽 다리를 떨며 참으로 심드렁한 태도를 하고 있었다.
“널 도와주겠다고 했지, 저 새끼를 도와준다고는 안 했는데.”
“그게 그거잖아….”
“아니, 달라. 단어 하나 차이가 얼마나 큰데. 기분이 많이 달라.”
“그래, 그렇구나. 그럼 다시 물을게. 다니엘 매킨리에게 정보를 빼 와서 나를 도와준다고 했지?”
소희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차분하게 말하고는 영양가 있는 대화를 이어 가려고 했다. 그런데 오른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 애써 가라앉힌 분위기를 들쑤셨다.
“아리아드, 짐승이랑 말 섞지 마. 대화가 될 리 없잖아.”
“짐승?”
왼쪽에서 다리를 떨던 움직임이 멎었다. 이내 데온은 주먹을 꽉 쥐고 한마디 한마디 짓씹어 뱉었다.
“아리, 옆에 앉은 정신병자한테 똑똑히 전해 줘. 이렇게 경솔하게 굴면 정보고 뭐고 없다고.”
“아리아드, 내 말도 전해 줘. 너같이 멍청한 애가 주는 정보는 필요 없다고.”
“죽고 싶냐고 전해 줘.”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라고 전해 줘.”
다시 날카로운 대화가 이어졌다. 그 중심에 앉아 있는 소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꽤 많은 인내 끝에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제발 그만해애애애!”
앞쪽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게진 그녀의 낯을 보고는 다행히도 그들은 무의미한 말싸움을 멈췄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데온은 본론을 꺼내 놨다.
“다니엘 매킨리가 엔드로 가문 땅을 빌미 삼아 철도부설권까지 뺏어 오려는 모양이야.”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있던 조슈아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담담했다.
“그게 뭐 대단한 정보라고. 네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이야기야.”
“저 재수 없는….”
욕을 읊조리는 남자를 제쳐 두고 조슈아는 앞에 서 있는 소희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아리아드, 난 저놈이 주는 정보 같은 건 필요 없어. 오늘부로 당장 연 끊어.”
“너 지금 네가 망하길 바라는 적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기나 해? 사람 아쉬운 줄 모르고, 저 새끼가.”
“네가 내 편에 붙는다고 해서 내 처지가 딱히 좋아질 거 같지도 않아.”
한마디도 지지 않자 고개를 돌려 조슈아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던 데온은 갑작스레 경로를 틀었다. 그는 일어서 있는 소희의 팔을 끌어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간 몸이 거대한 품 안으로 폭 안겼다.
앞쪽만 바라보던 조슈아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옮겨 갔다.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앉아 있던 몸을 뻣뻣하게 세우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그 앞에서 데온은 소희의 몸을 더 꽉 끌어안은 채로 활짝 웃었다. 조슈아의 신경을 긁을 방법을 제대로 찾았다는 듯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놔.”
“먼저 안은 사람이 임자야.”
“임자?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이 별채에 있는 건 전부 내 거야.”
이게 대체 무슨 대화일까.
사람이 아닌 그저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소희는 피곤함에 넋을 놓았다.
계속해서 소유권을 주장하던 조슈아는 그녀의 한쪽 팔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끌고 오려고 손에 점점 더 힘을 실었다. 데온도 빼앗기지 않으려 소희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몸이 분리될 거 같은 고통 속에서 소희는 그저 전신에 힘을 푸는 것을 택했다. 해탈한 눈동자가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밤이 참 길겠구나….’
* * *
조슈아는 충혈된 눈을 비볐다.
간밤에 별채에 머무른 쥐 때문에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이느라고 난리였다. 결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곳에 버티고 있던 그는 다음 날 후폭풍을 맞아 밤을 새워 가며 일 처리를 해야 했다.
데온의 수작이야 뻔했다. 저를 도와준다는 핑계를 대며 어떻게든 아리아드 곁에 머물려고 하는 거겠지.
잠을 자지 못해 예민해진 머릿속은 자꾸만 아리아드 옆에 붙어 있던 쥐새끼를 떠올렸다. 어떻게 치워 버리지, 그러한 궁리를 하며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넘기고 있는 남자 앞으로 메이컨이 다가왔다.
“엔드로 공작 쪽에서 철도 사업과 관련한 땅을 내어 주기 힘들 거 같다고 완고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철도부설권을 다니엘 저하 쪽으로 내주면 이익을 떼어 주겠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견 조율이 힘들 거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 땅을 포기하기엔 저희 쪽에도 손해가 막심하여….”
메이컨은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머리를 짚고 서류를 넘기던 조슈아에게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부설권을 넘기겠습니다.”
시원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던 마지막 서류를 테이블 구석에 쌓여 있는 종이들 위로 올렸다. 그리고 눈짓으로 밤새 정리해 놓은 서류를 가리켰다.
“이 서류들을 모두 다니엘 매킨리에게 넘기세요.”
그 앞에서 메이컨은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잠시간 할 말을 잃고 서 있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조슈아가 고개를 까딱이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하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갖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나는 것입니다.”
곧이어 남자는 손에 쥔 펜대를 가볍게 돌렸다.
“모두 완성되면, 그때 되찾아 올 겁니다.”
그 말과 함께 그의 안광이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