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4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데온 혼자만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며 아리아드를 떠올렸다.
며칠 전, 추모식 때 봤던 아리아드만 생각하면 평소에는 단순하기만 했던 뇌의 회로가 복잡해졌다.
그는 성당 안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반가워서 달려가려던 발길을 무의식중에 멈춰 세웠었다.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그 슬픈 눈빛은 한결같이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마 조슈아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 주변을 초조하게 맴도는 모습을, 데온은 너무도 선명하게 보고야 말았다.
애초에 그녀의 마음이 어디로 굽었는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눈으로 이리 뚜렷하게 확인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문제였다.
조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리아드.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자신.
서로 가까워지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는 그 구도가 본인이 느끼기에도 꽤 우스웠다. 하지만 그것을 앎에도 그곳에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온종일 빵 조각 하나에 샴페인만 들이켜서 그런가, 갑작스레 속이 쓰려지자 데온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놨다.
어떻게든 다니엘의 세력과 어울리기 위해 애쓰던 반델리는 데온에게 다가왔다.
“혼자 동떨어져서 뭐 하십니까. 가서 말 한마디라도 더 덧붙여야 나중에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정했어.”
“네? 뭘요?”
“누구의 편에 설지.”
“그걸 여기 와서 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튼 잘 생각하셨습니다. 기류를 보아하니 조슈아 매킨리가 다시 일어서긴 힘들어 보입니다.”
갑작스레 데온은 사나운 눈매를 접어 웃었다.
“글쎄, 그건 해봐야 알지.”
* * *
소희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조슈아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꽤 오래전에 깨어나 떠났는지 침대 옆자리에는 찬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잠에 덜 깬 눈으로 그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벗어났다.
소희가 며칠째 해 오던 오후 일과가 있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눈에 띄지 않는 행색으로 황궁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었다. 건강을 핑계 삼아 메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걷다 보면 해가 저물었다.
그 일과의 목적은 사실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소희는 며칠 동안 기나긴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황제와 황후를 살리기로 말이다.
자신의 개입으로 인해 본래 짜 둔 뒷이야기가 뒤틀린 데도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조슈아가 또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사건이 일어나는 게 이맘때쯤이긴 했는데 정확한 날짜를 모르니 조금 답답했다. 사실 현실로 돌아가 정보를 얻는 게 최고의 방법이었지만, 소희는 그 방법을 떠올렸다가 금방 도로 접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까지 자살 시도를 했다가는 그에게 또 다른 골칫거리를 안겨 주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본인이 들고 있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일이 일어나는 날짜만 명확히 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렇게 차선책을 택한 소희는 오늘도 황궁 주변을 둘러보다가 별채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을 열자 그 안에 예상치도 못한 손님이 와 있었다.
“아리!”
주방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다가 한걸음에 달려온 데온은 망설일 것 없이 소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몸을 한참 웅크려 그녀의 볼에 제 뺨을 비볐다.
소희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라 그의 품에 안겨 눈만 끔뻑거렸다. 곧이어 데온이 그녀를 떼어 놓고는 빤히 내려다보며 대뜸 질문을 던졌다.
“편지 받았지?”
“…무슨 편지?”
보랏빛 눈망울을 보아하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의 부하 말에 따르면, 별채 앞에서 어떤 남자가 대신 전해 주겠다고 중간에 편지를 가져갔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설마 했더니….
망할 조슈아.
데온은 작게 욕을 읊조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일이 마무리됐어. 어느 정도 안정돼서 너와 같이 살 수 있을 거 같아.”
당연히 거절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이미 마음속으로 많은 것들을 내려놨기에 기대도 없었다. 그럼에도 데온은 일단 하고 싶은 말을 대뜸 꺼냈다.
“우리 결혼하기로 했잖아.”
소희는 그 앞에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당혹감이 잔뜩 묻은 눈망울에 마음 한편이 씁쓸해지긴 했지만 데온은 티 내지 않았다.
“농담이야. 아직은 때가 아니지.”
그는 제 진심 어린 욕구를 그저 장난스럽게 묻어 버렸다. 쫙 찢어진 눈매를 곱게 접고 입꼬리를 잔뜩 올려서.
그렇다고 해서 아리아드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하늘이 두 쪽이 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자신이 살아 숨 쉬는 이유와 모든 욕망이 전부 아리아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것을 알아 버린 뒤로부터 포기란 단어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리, 그런데 말이야. 그 어디에도 나를 버리는 선택지는 없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옆에 붙어 있을 거니까.”
능글맞게 웃고 있던 눈매가 갑작스레 진지해졌다. 뒤잇는 말은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하는 것이었다.
“너도 내가 필요할 거야. 너는 조슈아를 돕고 싶어 하는 거 같으니까 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거고 나는 그 정보를 줄 수 있어. 다니엘 매킨리가 나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였거든.”
이는 사실상 버리지 말아 달라 비는 짓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포장을 잘해 냈다. 갑작스러운 말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한 고요 속에서 데온은 아리아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에도 내쳐지면 어쩌지. 그런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다행히도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네가 조슈아의 편이 되어 주겠다는 거야?”
“아니, 그런 끔찍한 소리는 마.”
그런 말은 듣는 것만으로 진저리가 난다는 듯 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곧이어 데온은 윤이 나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참을 그리 간지러운 손길 끝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입매에는 옅은 미소를 띤 채였다.
“난 네 편이야.”
“….”
“네가 가는 방향이,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야.”
훗날 이러한 제 결정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조슈아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편에 속해 그를 없애 버리고 제 욕심껏 아리아드를 독차지하는 게 나을 뻔했다며 땅을 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지금 당장은 그녀의 울상인 얼굴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니까. 데온은 일단 그 바람을 이루고자 했다.
* * *
소희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거대한 남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마치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데온은 별채 안에서 그녀의 뒤를 계속해서 쫓아다니고 있었다.
예전에는 분명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누구보다 아리아드에게 진심인 남자들을 마주하면 괜히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거 같아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특히 데온을 마주할 때면 더더욱 그랬다.
조슈아가 올 수도 있으니 돌아가란 그 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소희는 괜한 방황을 하는 중이었다. 아리아드를 위해 제 전부를 건 남자에게 그런 말이 쉬이 나올 리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실컷 이용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소희의 속마음에는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렸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만히 있기에는 초조한 마음에 괜히 주방 쪽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소희는 데온 때문에 정신이 없어 누군가 별채의 현관문을 열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 문소리.”
들려오는 태연스러운 말소리에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니 데온은 웃고 있었다. 어째 그 미소 하나에 전신에 불안감이 감돌았다.
나무 바닥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곧 등장할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뚜벅뚜벅,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어 댔다.
소희는 데온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주방 옆쪽에 딸린 창고로 그를 밀어 넣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순순히 움직인 데온은 창고 안으로 들어가 천진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 앞에서 소희는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가 두 손바닥을 싹싹 빌기를 반복했다. 조용히 있어 달라는 간절한 몸짓이었다.
돌아오는 긍정의 신호는 없었지만 황급하게 먼저 문을 닫고 봤다. 다행스럽게도 주방 테이블 쪽에 섰을 때, 때마침 조슈아가 나타났다.
“여기서 뭐 해.”
그는 잠시간 소희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주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창고의 문 쪽에 그의 눈길이 닿았을 때, 그녀의 심장은 롤러코스터가 하강하는 순간처럼 덜컹 내려앉았다.
그의 눈길을 돌리기 위해 빠르게 답했다.
“요, 요리?”
무작정 뱉고 본 대답이 불안정하게 떨려 왔지만 남자의 시선을 돌릴 수는 있었다. 조슈아는 테이블 위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음식 재료를 바라봤다.
“당근으로?”
하필 그 위에 올라가 있는 건 당근 하나였고.
“…어. 다, 당근 먹을래?”
당황스러움에 잘 살피지 못하고 불쑥 집어 건넨 것이, 또 하필이면 메리가 먹다 남긴 것이었다.
조슈아가 잇자국이 적나라하게 새겨진 당근을 가만히 내려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