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93화 (93/120)

Chapter 93

깊은 밤이었다.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던 소희는 일 층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얼마 안 가 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들어와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그렇게 그곳에 멈춰 있었다.

소희는 눈을 끔뻑거렸다. 말을 걸지도, 그렇다고 고개도 돌리지도 못해 멀거니 천장만 바라봤다.

성당에서 추모식이 있던 이후로 며칠 내내 그녀는 그에게 어떠한 말도 건네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다. 이 상황에 대체 어떤 위로를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동안 멀거니 서 있던 남자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소희가 누워 있는 침대 옆쪽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잠든 척을 하려 빠르게 눈을 감았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을 조명 삼아 남자는 술잔을 기울였다. 테이블 위에 유리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조슈아가 입술을 뗐다.

“잠이 안 와서. 그래서 왔어.”

“….”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게 아니라. 그냥…. 잠이 안 와서….”

보고 싶어서 와 놓고 계속 도망만 칠 거냐는 말에 며칠이 지나서야 그는 그렇게 대꾸했다. 술에 취한 듯 흐릿한 언성이 뚝뚝 끊겨 나갔다.

자고 있지 않다는 걸 들킨 게 분명했기에 소희는 그냥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도 여전히 소희만 응시하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조슈아의 눈이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내렸다가 뜨길 반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젠가부터 맨정신에는 잠들 수가 없어.”

그는 입매를 살짝 올렸다.

“네가 떠난 뒤부터였나.”

술에 취한 남자는 나직한 말을 늘어놓았다. 소희는 그 앞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왜인지 갈증이 나며 속이 타들어 가는 거 같아 그의 손에 쥐어진 술잔을 뺏어 들어 제 입에 한 번에 털어 넣고 싶어졌다.

그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자 다행히도 그러한 충동을 삼킬 수 있었다. 조슈아는 느릿하게 발길을 옮겨 어느새 침대 가장자리로 다가왔다.

“겨우 잠들어도 악몽을 꿔. 그래서 잠들고 싶지 않아.”

바로 앞에서 아름다운 저음이 부드럽게 흘렀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소희를 마주 본 채로 한참 동안 눈만 느릿하게 깜빡거리길 반복했다. 평소보다 더욱 순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소희는 또 다른 충동이 잇달아 드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거대한 몸집의 남자를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이 느리게 오르내리는 게 느껴졌다. 바로 위에 와 닿는 뜨거운 숨결은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한참 뒤, 조슈아는 소희의 작은 어깨 위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그 왜소한 체구가 마치 하나 남은 버팀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느새 주변에는 진한 브랜디 향이 퍼져 있었다. 소희는 남자에게서 풍기는 그 향만으로도 취해 가는 듯했다. 그래서 추모식 내내 참고 있던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죽은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어쩌면, 내 잘못이지.

한평생 실패라고는 모르던 남자가 이번 일로 얼마나 자신을 책망하고 있을지 눈에 훤했다. 소희가 짜 둔 이야기에서도 그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꺾여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어두운 밤과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그녀의 품에 이렇게 안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갔다.

조슈아는 여전히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당분간은 안 돼.”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떠나면 안 돼.”

“….”

“지금은 아무 데도 가지 마.”

그는 커다란 몸을 더 웅크리며 같은 문장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런 그를 달래듯 소희는 차분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무 데도 안 가.”

네 곁에 쭉 있을 거야.

소희는 그리 말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저런 말을 과거에도 반복했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신뢰가 잔뜩 떨어진 문장 대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결 고운 모래처럼 부드러운 칠흑빛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손길을 내려 너른 등을 토닥였다. 마치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는 듯 조심스럽게.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살결에 와 닿는 호흡이 전보다 더 느릿해지고 보듬어 안은 몸에 힘이 빠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소희는 힘을 실어 천천히 거대한 몸을 떼어 냈다. 그러자 조슈아가 옆으로 툭 쓰러졌다.

소희는 규칙적으로 가늘게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잠시간 그가 잠든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마주 보고 누웠다.

달빛이 드리워 보얀 얼굴을 밝혔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름다운 곡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이마에서부터 시작해 미간과 콧날을 지나 턱 끝까지.

그녀의 시선이 꽃잎처럼 붉은 입술에서 멈추었다. 충동적으로 그곳에 천천히 제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잘자.”

오늘만큼은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푹 잠들길.

소희는 진심으로 그렇게 소원했다.

* * *

궁궐 안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데온은 축제 분위기인 장내에 들어와 초대받은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본래 다니엘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중심에 있었고, 그 주변으로 데온과 같이 새롭게 추가된 인물들이 있었다.

데온은 사실 이곳에 올 생각이 없었다. 조슈아가 꼬꾸라진 거야 속이 시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누구의 편에 붙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비서가 다니엘 매킨리에게 찍혀서 좋을 게 없다며 어찌나 법석을 떨던지 결국 발길을 해야만 했다.

“필트모어 공작, 어서 오시게.”

다니엘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 왔다. 데온은 샴페인 잔을 건네받고 영혼 없는 끄덕거림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사람들과 짤막한 대화를 나누다가 그는 구석에 서 있는 반델리 포티어스를 발견했다. 데온은 성큼성큼 다리를 움직여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언제 이쪽으로 붙었대?”

갑작스럽게 나타나 말을 거는 목소리에 반델리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매번 위협적인 인상에 절로 기가 죽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조슈아 매킨리에게 얼마나 많은 협박을 받았는지. 좋은 감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조슈아 매킨리? 엊그제까지만 해도 빌빌 기더니 이제는 말을 막 놓네. 뒤에서는 나하고도 맞먹겠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고개를 돌렸다가 사나운 눈매와 마주치자 그는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그리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중심에 서 있던 다니엘이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뗐다.

“제 부족한 동생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보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시작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다니엘은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저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습니다. 그 시작을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다니엘 매킨리의 이름을 연달아 부르며 사람들이 환호했다. 유일하게 데온 만이 삐딱하게 서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니엘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 데온이 당연하게 그의 편에 설 거라는 착각 말이다.

이 중에 조슈아에게 제일 크게 당했던 인물이 데온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슈아 매킨리의 흥망에 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잿빛 머리통에 든 생각은 온통 아리아드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벽면에 기대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흘려보냈다.

“그때 조슈아 매킨리의 표정 보았습니까?”

“여태 본인 능력만 믿고 그리 오만방자하던 자가 손도 쓰지 못하고 뒤통수를 맞았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정말 속이 다 시원합니다.”

“이제 조슈아 매킨리의 몰락만이 남아 있습니다. 무역 사업은 무역선이 터져 복구할 수도 없는 수준이 되어 버렸고, 철도 사업 또한 엔드로 가문의 땅이 없으면 완성하지 못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좋습니다. 이번 기회에 다니엘 저하께서 철도부설권까지 손에 쥐면 아주 완벽할 듯합니다.”

“그리고 국새까지 뺏어 오면 더할 나위 없지요. 이 모든 게 조슈아 매킨리보다 다니엘 저하께 더 잘 어울립니다.”

아부하는 자들이 득실거렸다. 그 중심에서 다니엘은 입꼬리가 내려오질 못했다.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찬양 세례들에 데온은 미간을 설핏 구겼다.

‘왜 저러고 살지?’

명예 욕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데온은 그런 그들이 이해될 리 없었다. 잿빛 눈동자 안에는 지루하기만 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열망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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