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2
피어슨 부부는 프랭클린 제국 서쪽에 위치한 항구에 나와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에도 그들의 미간은 짜증이 잔뜩 묻은 듯 푹 패여 있었다.
거대한 무역선 앞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자리했다. 그중에 피어슨 부인의 눈에 익숙한 이도 보였다. 이 주 가까이 엔드로 저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 마주했던 엔드로 가문 시종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아내의 말에 피어슨 공작은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시종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헨리킨 공작님은 왜 엔드로 가문의 물건을 우리 보고 관리해 달라고 맡긴 걸까요?”
“그런 걸 알아서 대체 뭘 할 거야.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하자고.”
성의 없는 대답과 함께 그는 무역선에 오르기 위해 발길을 움직였다. 어쩐지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피어슨 부인은 그의 뒤를 따르다가 멈췄다. 그리고 무역선에 오르는 것이 아닌 도리어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밖으로 옮기고 있는 엔드로 가문의 시종을 붙잡아 세웠다.
“지금 뭘 하는 건가?”
“아, 흠이 있는 물건들을 정리 중이었습니다.”
그 간단한 대답에 피어슨 부인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 도로 발길을 움직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맑은 날씨 덕에 평화로운 항해가 이어졌다. 한동안 느꼈던 불안감은 기우였다며 그녀는 한숨을 놓았다.
* * *
메이컨은 창밖을 응시했다. 달빛이 평소보다 훤해 전령 새가 열심히 날갯짓하며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사업의 최종 승인과 결정은 황태자인 조슈아의 몫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현장에 나가 무역선을 관리하는 건 궁 내부 소속인 그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제 동생에게 전령 새를 보내 사업 현황을 확인해 보고하는 것은 메이컨의 임무였다.
전령 새가 돌아왔다.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들어와 책상에 앉은 새는 뜻밖에 물건을 내려놨다.
“이게 대체….”
천 조각을 집어 든 메이컨은 잠시간 굳었다. 전령 새는 편지가 아닌 누군가의 옷조각을 들고 나타났다.
심지어 검붉은 핏물이 잔뜩 밴 옷조각을.
그것을 조용히 만지작거리던 그는 갑작스레 심장 부근이 꽉 눌리는 압박감을 받아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째가 되도록 메이컨이 보낸 전령 새는 계속해서 아무것도 들고 오지 못했다. 연락이 닿지 않는 답답함에 차라리 핏물이 잔뜩 묻은 옷 조각이라도 챙겨 온 때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메이컨 님!”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남자가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어찌나 다급했으면 예의를 제대로 차리지도 못한 모양새였다.
“로만 항구 쪽에 연락을 취했는데 아직도 배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식이 닿지 않는 무역선과 하루를 훌쩍 넘긴 도착 예상 시간. 조바심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은 곧이어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치달았다.
“사람을 보내서 항로와 로만 항구 인근 바다를 조사하라 하세요.”
메이컨은 창밖을 내다봤다.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붉은 달빛이 옷 조각에 묻어 있던 핏물과 닮아 있었다.
* * *
비보가 전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성당 앞에는 많은 인파로 까만 물결이 만들어졌다. 무역선의 폭발 소식과 함께 그곳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전원 사망이 확정되었다.
성당 안,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도 저들끼리 모여 수군덕거리는 행위는 끊이질 않았다.
대부분이 황태자인 조슈아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이야기들이었다. 모든 행보가 완벽했던 사람에게 생긴 흠은 아무리 작더라도 비교적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 심지어 이번 사건은 수많은 사망자를 낳은 만큼 그의 평판에 아주 치명적이었다.
하얀색 꽃들이 잔뜩 쌓여 있는 제단 앞에 조슈아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옆에 제 동생의 죽음에도 마음껏 슬퍼하지 못하는 메이컨도 함께였다.
메이컨은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고 말했다.
“더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했는데…. 모두 제 잘못입니다.”
주인의 앞에서 최대한 슬픔을 감추려 하는 목소리가 단조로워 오히려 더욱 구슬프게 들렸다. 그에 조슈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제가 무능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비보가 전해지고 그는 생각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무역선이 폭발할만한 이유를.
곧바로 다니엘 매킨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 하나밖에 없었다.
조슈아가 무역선의 폭발까지 예상치 못한 것은, 그 배에는 소수의 인원이더라도 다니엘의 세력이 함께 탑승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는 하지만 제 사람들을 함께 죽일 정도로 무모한 짓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얕은 판단이 결국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변명할 여지란 없었다.
“쓸데없는 적을 만든 것 또한 제 무능입니다. 모두 제 탓이에요. 죄송합니다.”
조슈아는 갈라진 목소리로 사과를 이었다. 곧이어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그 자리에 유족들이 목멘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 서글픈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성당의 입구에서 다니엘과 그의 지지자들이 들어섰다. 검은 양복을 입어 그나마 격식은 차리고 있었지만 그와 상이하게 그들의 낯빛은 밝았다.
“안타깝네. 황태자 저하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참 많이 죽었어.”
다니엘은 하얀색 국화꽃을 제단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희열이 섞인 맑은 목소리였다.
이내 그는 조슈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망울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잠시간 빤히 응시하던 남자는 입꼬리를 샐쭉 올렸다.
“네가 이번에 몬트롤 지역 전쟁 물자로 보급해 줬던 폭탄 기억나? 워식스 왕국에서 들여온 그 폭탄 말이야. 성능이 아주 끝내주는 거 같아.”
다니엘은 조슈아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유골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없애 버린 걸 보면.”
마주한 붉은 눈동자가 잠시간 번득이자 그는 조슈아에게 얼굴을 더 가까이 붙이고 귓가에 속삭였다.
“뭘 그렇게 노려봐. 내 동생은 정말 위아래도 없다니까.”
“똑같이 돌려줄게. 죽은 사람의 수만큼, 똑같이.”
짓씹어 뱉은 낮은 말소리에 다니엘은 그것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유족들의 애통한 울음소리와 그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조슈아의 귓속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기대하고 있을게.”
다니엘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조슈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그 자리를 가볍게 벗어났다.
* *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소희는 암담한 분위기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처음 메리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메리는 피어슨 부부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아리아드를 위로해 줬다. 그 앞에서 소희는 도저히 이 사건의 영문을 알 수 없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자신은 이런 에피소드를 만들어 둔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남자 주인공을 지지하는 세력 대다수가 죽는 큰 사건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도 없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제단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조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희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 주변만 맴돌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정답을 찾아냈다. 성당을 빠져나가는 다니엘의 세력들과 마주했을 때였다.
아리아드를 하찮게 바라보고 지나치는 다니엘 매킨리.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인물.
헨리킨 엔드로.
본래 소희가 이 소설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조슈아의 지지자였을 남자가 다니엘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한때 가문끼리의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헨리킨은 그녀를 투명 인간 취급하듯 빠르게 지나쳤다. 그와 다르게 아직까지 찰스는 미련이 남았는지 그녀를 힐끔거리며 작게 이름을 부르길 반복했다.
“…아리아드.”
물론 아버지의 손에 뒷덜미가 잡혀 볼품없이 끌려 나갔지만.
찰스 엔드로의 손가락뼈를 조슈아가 모조리 조각을 냈을 때부터 이 사건은 예견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조슈아가 아리아드에게 사랑에 빠졌을 때부터인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확실한 건, 처형당해 죽었어야 할 아리아드가 살아남아 많은 사람이 죽었단 사실이었다. 그 사소한 변화 하나가 전체 줄거리에 막대한 변화를 만들어 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음에도 소희는 자책했다. 이러한 사건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 것이 당연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본인이 쓴 이야기였기에 제 손으로 통제되지 않는 이 상황이 힘겨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희는 조슈아에게 가까워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못하고 그 주변을 배회했다. 어두워 보이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깊은 절망감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