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1
파랗던 하늘이 붉게 물들었을 무렵, 예상치 못한 손님이 별채를 찾아왔다.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요?”
소희는 반가운 기색과 함께 마주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휴온의 얼굴이 창밖 하늘의 노을처럼 붉게 타올랐다. 오랜만에 대면하니 더욱 부끄러운지 그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리아드 님이 여기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 그렇구나. 몸은 괜찮은 거죠?”
“아무렇지도 않아요. 생각처럼 금방 돌아오진 못했지만요.”
“그래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럼요. 정말 별일 없었어요.”
별일이 없기는. 소희는 태연하게 웃어 보이는 남자를 꼼꼼히 살피며 살아 돌아온 게 용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고생을 한 여파 때문인지 아기같이 뽀얗던 얼굴이 꺼칠꺼칠해져 있었다. 소희가 좋아하던 연예인의 귀여운 이미지와는 살짝 멀어졌지만, 쌍꺼풀 없는 눈이 접히며 웃는 모습은 여전히 상큼했다.
“보고 싶었어요.”
앞에 앉은 최애 연예인의 얼굴을 살피던 소희는 그 말에 번득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 보니 휴온이 여기 있는 것이 영 불안했다. 이러다가 조슈아라도 나타난다면….
더는 그에게 아리아드의 안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겨우 살아난 휴온이 안 좋은 꼴을 당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소희는 초조해져 다급하게 시간을 살폈다. 이맘쯤 되면 조슈아가 오곤 했다. 많은 용기를 내서 찾아왔을 휴온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아리아드 님.”
“네?”
“예전에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었잖아요. 오늘 그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굳게 마음먹은 듯한 언성이 여태껏과는 다르게 또렷했다.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면 하고 싶다던 그 말이 대체 무엇일까. 과거에 그와 했던 대화를 떠올리다가 소희는 왜인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이러다가 갑자기 고백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어떻게 상처받지 않게 거절해야 하는지, 당사자는 아직 입도 열지 않았는데 갖가지 상상을 하며 일어날 대화를 예상하고 있었다.
“아리아드 님은 저한테 참 과분한 사람이세요.”
그런데 그 첫 문장은 예상을 단단히 빗겨 나갔다. 뒤이어 휴온은 뜬금없이 제 과거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는 남들보다 월등하게 잘하는 게 없어서 자존감이 낮았어요. 남자치고는 비실비실해 힘쓰는 일도 못 하고, 그렇다고 머리를 쓰는 쪽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죠. 그러니 항상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쫓기며 살았던 거 같아요.”
잠시 감정이 북받쳤는지 그의 말끝이 잘게 떨려 왔다.
“그런 저에게 매력이 있다고 말씀해 주신 게 아리아드 님이잖아요. 난생처음 들어 본 말이었어요. 개성이 있고, 그게 참 매력적이라는 말.”
멍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희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였다. 본인이 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아리아드가 무슨 생각으로 이 남자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말에 백 번 동의한다는 거였다. 자존감이 낮다는 이 남자는 소희의 눈에도 충분히 매력 있어 보였다.
소희는 어떠한 답을 덧붙이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드 님도 너무 매력적이고 멋있으세요. 지금은 비록 아리아드 님을 모두가 욕해도 저는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쭉 응원할 거고요. 그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희대의 쓰레기, 이기적인 악녀, 남자를 홀리는 요부. 대중들에게 안 좋은 수식어는 죄다 각인된 아리아드가 또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어 줬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가 자꾸 옆에 얼쩡거리는 게 아리아드 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요. 그래서 이걸로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요.”
“아….”
애써 멀리하려 하지 않아도 휴온은 먼저 그녀의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두 팔을 뻗었다.
“마지막으로, 포옹 한 번만 해도 될까요.”
“좋아요.”
웃으며 대답하자 남자는 가볍게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담백한 인사를 전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여태 잘게 떨려 왔던 것과는 다르게 참으로 담담한 목소리였다. 때론 담담하게 전하는 진심이 더 큰 울림을 줄 때가 있는 법이었다. 소희는 지금이 그러했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마지막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당연한 헤어짐이었지만 괜한 아쉬움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별은 역시 몇 번을 한데도 쉽지 않았으니까. 소희는 아쉬움을 티 내는 대신 마른침을 삼켜 홀로 감정을 삭였다.
짧은 포옹을 끝으로 그는 멀어졌다. 소희도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는 그를 배웅하려던 찰나였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는데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짝에 비스듬히 기대어 그들을 구경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둘이 좋아 보이네.”
눈이 마주치자 조슈아는 그리 말했다. 서늘한 눈빛이 그녀의 얼굴부터 발끝을 쓸고 지나갔다.
제 할 일을 끝낸 휴온은 눈치를 보다가 방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그렇게 당혹감 속에서 소희 혼자 남아 있었다.
“아니….”
벌떡 일어난 소희는 두 손을 빠르게 저어 보였다.
“이건 진짜 오해야….”
억울해. 너무나 억울했다. 하필 이 남자는 나타나도 꼭 이러한 상황에 나타나서는.
이렇게 또 쓸데없는 오해만 쌓여 가고 있었다. 소희는 머릿속으로 방금 전 일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정리 중이었다. 대뜸 정돈되지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간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아서였다.
그 앞에서 조슈아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얼굴을 기울였다.
“오해긴 무슨 오해야. 아주 좋아 보이던데.”
“마지막 인사였어. 마지막 포옹이었고.”
나름 정리해서 뱉은 말인데도 상당히 엉망처럼 느껴졌다. 사실상 이 상황에서 덧붙이는 말은 변명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소희는 그것을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냥 전쟁터에서 죽으라고 내버려 둘 걸 그랬어.”
조슈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날 선 목소리가 스산했지만 소희는 어쩐지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뭐야, 그 표정은?”
변태같이 웃고 있는 소희를 보며 그의 눈썹이 날카롭게 각이 졌다. 소희는 그의 앞까지 다가가 얼굴을 바싹 붙였다. 그리고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을 이었다.
“설마 그건 질투?”
“…아니야.”
“아니긴. 그게 바로 질투야.”
“아니라니까.”
“맞아. 질투라니까.”
소희는 갑작스레 뒤돌아 서둘러 발길을 움직이는 조슈아 뒤에 찰싹 붙어 조잘거렸다.
“표정부터 말하는 투까지 완전 질툰데.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완전 질투야.”
당황했는지 그는 소희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그도 그렇게 힘을 쓸 건 아니었는지 밀어 놓고도 놀란 기색이었다. 그 완력에 균형을 잃은 몸이 휘청거리다가 뒤로 쏠렸다.
“…어!”
몇 초 뒤 이어질 쓰린 감각을 예상하고 소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고통은 이어지지 않았다. 조슈아가 날랜 몸놀림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소희가 한쪽 눈을 슬며시 떴다. 곧바로 마주한 붉은 눈망울에 언뜻 짜증이 묻어 있는 거 같기도 했다.
“까불지 마.”
조슈아는 그 나직한 말과 함께 한쪽 손으로 소희의 이마에 콩, 딱밤을 놨다. 그리고 허리를 잡고 있던 팔에 힘을 풀어 그녀를 그대로 나무 바닥에 내렸다.
그렇게 뒤돌아 다시 떠나가려는 뒷모습이었다. 더는 그를 쫓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서 소희는 말했다.
“보고 싶어서 와 놓고 계속 도망만 칠 거야?”
그 말에 멈칫 발길이 세워졌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금세 별채를 빠져나갔다.
소희는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한여름에 나무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피폐물인 소설 속에서 넋 놓고 제 사심만 챙기고 있을 순 없었다.
본인이 짜 둔 다니엘 매킨리의 이야기가 상당히 거슬렸다. 다니엘이 켈리를 괴롭히는 에피소드가 변하지 않고 진행됐다는 건, 그 후에 다니엘이 벌일 이야기도 어김없이 등장할 거라는 소리였다.
[“어머니, 아버지. 전 부서진 자리라도 가져야겠어요. 그럼에도 제가 가지지 못할 자리라면, 아무도 갖지 못하게 없애 버릴 겁니다.”]
다니엘이 불타오르는 황궁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다.
황제와 황후는 둘째 아들을 황태자 자리에 올릴 만큼 조슈아를 아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마음이 변치 않자 다니엘은 황제와 황후를 죽이는 계획을 세운다.
황궁에 사람을 심은 뒤 침소를 잠가 불을 질렀다. 사고로 위장된 사건은 결국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렇게 조슈아의 커다란 버팀목을 없애 버려서 둘 사이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에피소드였다.
“…곧 많은 사람이 죽을 거야.”
자신이 짜 놓은 이야기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물론 이 이야기의 끝에서 승리자는 무조건 남자 주인공이겠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개입한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뒤틀릴지 몰랐다.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맞는가? 자신을 매우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사사건건 괴롭히려 들던 비앙카를 떠올렸다. 아리아드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녀가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 그런데 조슈아의 어머니잖아.”
소희의 입 밖으로 다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미래를 안다는 건 이토록 머리가 아픈 일이었다. 일어날 불행을 그냥 두고 본다면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테니까 말이다.
또 막으려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하면 마찬가지였다. 알면서도 막지 못했다는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소희는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에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