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90화 (90/120)

Chapter 90

분위기에 휩쓸려 무작정 좋아한다는 말을 뱉고 나니.

“네 진심은 변덕이 꽤 심한가 보지?”

꽈배기처럼 잔뜩 꼬인 대답이 돌아왔다. 마주한 눈동자 안에서 혹한의 바람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달콤한 고백에 어울리지 않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소희는 상처받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확신을 얻어서라기보다, 이러한 반응이 당연하다고 여겨서였다.

첫 빙의를 했을 당시, 여주인공의 자리를 꿰차야 한다면서 그에게 쉽게만 뱉었던 고백이 대체 몇 개던가. 아마 열 손가락 안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남발해 댔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쌓았던 업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소희는 제 고백에 대한 달콤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조슈아가 아리아드에게 마음이 있는 걸 확인했으니 이 고백이 그에게 부담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러니 그냥 제 욕심껏 막 저지르는 말이었다.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마주하고 있던 시선이 어긋났다. 조슈아는 그 말을 외면하듯 빠르게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조각같이 날카로운 옆얼굴을 물들였다. 밤하늘의 불꽃들만 응시하고 있던 조각상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래, 이제 그러고 조만간 또 도망가겠지.”

시끄러운 폭죽 소리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에 대해 소희는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초조하게 덤빌 필요는 없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 가듯 천천히 스며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소희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 천천히.

느리게.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가는 걸로.

빤히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그는 끝까지 무심하게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불현듯 소희는 꼿꼿하게 자신을 외면하는 그 시선을 돌리고 싶어졌다.

“조슈아.”

소희가 부르는 소리에 그녀의 바람대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불꽃이 터지며 그 빛이 조각상 같은 얼굴을 밝혔다. 하고 싶은 말을 도저히 눌러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희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좋아해.”

불쑥 그리 뱉어 놓고는 불과 몇 초 전에 했던 다짐을 떠올렸다.

천천히는 개뿔. 이미 서로의 마음이 쌍방인 걸 알았는데 망설일 필요가 뭐가 있냐는 합리화가 이어졌다.

“진짜 좋아한다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나와 이제.”

조슈아가 도망치듯이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소희는 그 뒤를 졸졸 쫓았다.

“좋아해!”

무언가에 쫓기는 듯 다급해 보이는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 우렁찬 고백이 복도에 메아리쳤다.

남자가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나아간 탓에 어느 순간부터 뒤쫓기가 버거웠다. 거리가 꽤 많이 벌어지자 더는 쫓아가지 못할 것을 깨닫고는 소희는 숨을 헐떡이며 속도를 줄였다.

“이러니까 꼭 몹쓸 짓을 한 사람 같네.”

아리아드를 좋아하지만 달콤한 고백을 받고도 정신없이 도망치는 그의 심정을 모르지는 않았다. 또 언젠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기에 상처받을까 두려운 마음이 커서 그러는 걸 테지.

그러니 이제 이 문제의 관건은 그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일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곁에 쭉 남아 있을 거라는 제대로 된 확신을 심어 줘야 했다.

새롭게 설정된 목표는 소희의 의지를 활활 타오르게 했다.

천천히 걸어 연회장 앞까지 온 그녀는 조슈아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연회장 문틈 사이를 보니 어느덧 축하연이 끝나 시종들이 장소를 정리 중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 안쪽에는 없는 거 같아 발길을 돌렸다.

“진짜 혼자 가 버린 거야?”

밖으로 나왔는데도 그가 보이지 않자 소희는 작게 투덜거렸다. 건물 밖에는 아직 떠나지 않은 귀족들이 몇몇 남아 있었다.

서로 분주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스치듯 바라보다가 소희는 익숙한 이를 발견하고는 시선을 멈춰 세웠다.

조명에 빛나는 진하고 산뜻한 남색의 머리카락, 웃음을 짓자 귀엽게 봉긋 올라온 볼살, 그 옆모습만 보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휴온?”

그가 살아 있다. 심지어 사상자가 가득한 그 격전지에서 아주 멀쩡하게 돌아왔다.

전쟁이 아니라더라도 휴온이 위험에 놓일 상황은 많았다. 조슈아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그를 아리아드의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조슈아는 그를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아리아드와 몸을 섞은 남자가 눈에 심히 거슬릴 텐데도 말이다.

소희는 자신의 부탁에 이어졌던 그의 삐뚤어진 대꾸를 떠올렸다.

‘그래, 그럼 적당히 숨만 쉬게 해 주면 되겠네.’

그리 말했지만 휴온은 보다시피 사지가 모두 멀쩡했다. 잔뜩 뒤틀린 성정으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조슈아가 얼마나 많은 인내를 했을지가 눈에 훤했다.

자신을 향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휴온이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소희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들려진 팔은 일순 강고한 힘으로 잡아끌려 내려졌다. 불쑥 튀어나온 다른 손은 완벽하게 그녀의 시야를 차단하고 있었다.

남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소희는 놀라지 않았다. 시원한 체취를 느끼며 입매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 봤다. 조슈아가 그녀를 못마땅하게 내려 보고 있었다.

자신에게로 시선이 옮겨 오자 그는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제 얼굴을 빤히 응시하는 그녀를 보며 의아해하는 듯했다.

짧은 침묵 끝에 소희는 눈을 접어 웃었다.

“역시.”

가볍게 생각해 봐도, 또 곰곰이 고민해 본데도, 답은 하나였다.

“역시 네가 좋아.”

그리 말하며 싱글거리자 앞에 선 남자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소희는 휴온에 대한 일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마… 읍.”

그런데 커다란 손바닥이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계속해서 이어질 고백 공세가 두려운지, 숨 쉴 구멍마저 부족할 만큼 꽉 틀어막았다.

뒤이어 그가 뒷덜미를 잡았다. 버둥거리던 그녀의 몸이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소희는 그렇게 입이 봉쇄된 채로 질질 끌려 별채로 돌아가야 했다.

* * *

집무실 한가득 쨍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좋아해, 좋아해, 진짜 좋아해.’

조슈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머리를 짚었다.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계속해서 울리는 저 목소리 때문에 슬슬 머리까지 아플 지경이었다.

개선식 저녁때 켈리와 몸싸움을 하면서 머리를 부딪힌 건지, 분명 뇌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한참을 울더니 갑자기 피식거리며 웃지를 않나, 뜬금없이 불꽃놀이를 같이 보자고 하지를 않나.

그때부터 눈만 마주치면 좋아한다고 쉴 새 없이 말해 대는 여자 때문에 며칠 사이 정신이 없었다. 그녀를 피해 도망을 와도 꾀꼬리 같은 언성은 귓전에서 계속해서 휘몰아쳤다.

처음에는 쉽게만 뱉는 거 같은 그 말에 화가 났다가, 이제는 그걸 넘어서 기가 찰 지경이었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그래도 좋아해!’

그러한 생각에 답하듯 불쑥 이명이 들려왔다. 곧바로 그는 고개를 더 숙이고 깊은 한숨을 뱉었다.

“돌겠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건 본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조슈아가 그렇게 끊임없는 고백 공세 사이에서 어지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울리고 메이컨이 들어왔다. 그러자 다행스럽게도 귓속에서 맴돌던 낭랑한 목소리가 잦아들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저하, 준비해 둔 물건들이 모두 무역선에 실렸다고 합니다. 날이 좋아 내일 오전 열 시경에 로만 항구로 바로 출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세요.”

보고를 마친 메이컨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조슈아는 혼자 남은 공간에서 그간 무역 사업을 준비하며 높게 쌓아 올린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일이 드디어 결실을 보일 차례였다.

서류를 훑어보던 시선이 맨 위쪽으로 닿았다. 그곳에 반듯하게 접힌 편지지가 놓여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 두꺼운 종이를 만지작거리다가 펼쳐 들었다.

[아리, 조만간 일이 모두 정리될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 찾아갈게.]

삐뚤거리는 글씨체를 최대한 정갈하게 쓰기 위해 꾹꾹 눌러 쓴 문장이었다. 그 짧은 문장 하나로도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어떠한 진심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리아드 곁에 붙여 놓은 남자가 오늘 낮에 들고 온 편지였다. 수상한 행색을 한 자가 별채 쪽으로 향해 혹시 몰라 중간에 뺏어 왔다고 했다.

[데온 필트모어.]

그 밑에 적힌 편지의 발신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조슈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막상 손에 쥐기엔 두렵고 뺏기긴 죽어도 싫은 여자. 그러한 모순 가득한 감정이 들어 실없는 웃음이 잇새 사이로 새어 나왔다.

무엇보다 데온에게 두 번이나 제 것을 빼앗기고 싶진 않았다.

‘좋아해!’

다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슈아는 망설일 것 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 커다란 손에 의해 정성 들여 눌러 쓴 글씨체가 더는 알아볼 수 없게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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