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9
그래, 애초에 이러는 편이 속이 시원했는데.
소희는 진즉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뜯을 걸 그랬다며 때늦은 후회를 했다. 머리카락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속에 묵어 있던 체증이 단계적으로 내려앉았다.
물론 제 머리도 함께 잡혀 뜯기고 있는 건 조금 슬픈 사실이긴 했지만.
고통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럼에도 소희는 먼저 놓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마음 한편에 있던 악바리 근성이 치솟자 밤새 이러고 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 몸이 엎치락뒤치락 밑에 깔리고 위로 오르길 반복했다. 한참을 그리 바닥을 구르며 정신없는 몸싸움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쾅.
난데없이 테이블 위쪽에서 요란스러운 몸싸움보다 더한 굉음이 울렸다. 깜짝 놀란 둘은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에도 서로의 머리채를 잡은 손은 여전했다.
그곳에서 나직하고 단호한 말소리가 울렸다.
“그만.”
조슈아가 미간을 한껏 좁힌 채로 그 둘을 내려 보고 있었다.
애초에 이 사건에 조슈아의 등장도 적어 두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등장은 예상치도 못한 터라 소희는 당황스러워 눈을 끔뻑였다.
그 당혹감을 소희만 느낀 게 아닌지 켈리도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어느새 둘은 서로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뗀 채 상반신을 일으켜 대리석 바닥에 앉은 채였다.
“아리아드와 둘이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다 나가 주세요.”
남자의 뒤로 그를 따라온 시녀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밑에 앉은 켈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또렷하게 와 닿는 눈동자에 켈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자의 갈기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적막이 찾아왔다. 둘만 있는 공간에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이틀 전, 황성 앞에 나타난 그녀를 한심스럽게 바라봤던 이래로 처음 마주한 자리였다.
지금의 조슈아는 그때와 다를 거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난동을 피우는 이유가 뭐야.”
짜증이 잔뜩 묻은 문장이 비수가 되어 심장에 콱 박혔다. 뒤잇는 날카로운 말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발 별채에 가만히 있을 순 없어?”
소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쩐지 이 남자 앞에서는 항상 바보가 되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다 제 손아귀에 있어 수월하다고 느끼다가도, 붉은 눈망울을 마주하면 마치 그게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쉽게만 움직이던 행동들을 멈춰야만 했다.
위에서 여전히 따갑게 와 닿는 시선에 갑작스레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켈리와의 싸움으로 잔뜩 격해져 있는 감정에 조슈아의 날카로운 말이 더해지니 더욱 서러웠다.
코끝으로 피가 몰리는 느낌과 함께 참으려 했던 눈물이 떨어졌다. 애들처럼 몸싸움을 했다고 마음도 애가 되어 버린 건지, 유난이라고 생각하며 소희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고개를 수그리고 훌쩍거리자 위에서 흐릿한 물음이 내려앉았다.
“…울어?”
“…왜, 왜 쟤 편만 들어.”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조슈아는 잠시 말을 잃은 듯했다. 한참 동안 침묵 속에 소희가 훌쩍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얼마 뒤 그가 몸을 굽혔다. 커다란 손이 소희의 허리를 안아 올려 테이블 위에 내렸다. 드디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조슈아는 그 앞에서 오랫동안 입술만 달싹거렸다.
괜스레 그 얼굴을 마주하자 더욱 서운함이 밀려와 소희는 울먹거렸다.
“…둘이 잤는데, 오늘 둘이 또 자 버리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래서 왔는데….”
얼마나 서럽게 울었으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띄엄띄엄 끊기는 문장들은 알아듣기가 어려워 거의 암호를 해독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그래도, 그래도 도와주려는 좋은 마음이었는데….”
“아리아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
“안 그래도 속상한데, 네가 걔 편을 들고….”
그제야 웅얼거리는 말을 알아들은 조슈아가 급히 말을 이었다.
“편을 든 게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말이 좀 차갑게 나간 거고….”
덧붙일 말을 생각하다가 그는 나직한 한숨을 뱉었다.
소희가 최근 들어 매번 들었던 한숨 소리였다. 저걸 들으면 또 자신은 한없이 한심스러운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게 또 속상해서 엉엉 울었다.
그 앞에서 커다란 손은 한참을 방황했다. 서럽게 우는 여자 때문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어찌 달래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던 두 손이 이내 눈물과 콧물로 뒤덮인 얼굴로 향했다.
손끝으로는 조심스럽게 눈시울에 맺힌 눈물방울들을 닦고, 손등으로는 콧구멍에 맺힌 콧물을 쓸었다. 아무리 닦고 닦아 내도 쉼 없이 줄줄 흘러 없어지지 않는 눈물을 그는 계속해서 부드럽게 없애 나갔다.
한참 뒤에야 조슈아는 꽉 조이고 있던 타이를 밑으로 끄르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난, 그 여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차갑던 평소와 달리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상냥한 어조였다. 그제서야 소희는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똑같은 무표정이었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소희는 느끼는 바가 달랐다. 무감하게 씌워진 가면 안에 붉은 눈망울이 부드럽게 물결치는 듯했다.
“그냥 네가 걱정되니까 한 말이야.”
눈물이 흠뻑 쏟아져 공허해진 마음이 금세 분홍빛 망상으로 차올랐다. 소희는 급격히 변화하는 제 심리가 이해되질 않아 스스로도 웃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자 갈기같이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손길은 참을 수 없이 부드러웠으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정리해 준 남자는 보랏빛 머리카락에 두었던 눈길을 내렸다. 엉망이 된 얼굴을 천천히 살피던 그는 다시 콧물이 흐르는 인중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 손길이 떨어지자 소희는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널 따라왔지.”
참으로 간결한 문장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거 하나에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소희가 써 놓은 소설은 뒤틀렸다. 켈리와 다니엘의 이야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지만, 그 뒷이야기는 분명 바뀌었다. 아직까지 아리아드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 조슈아로 인해서.
“계속 널 찾고 있었으니까.”
잠시 조슈아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뒤이어 구차한 변명을 덧붙였다.
“사고 칠까 봐. 그래서 찾고 있었어.”
갑작스레 차가워진 목소리에도 소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확실하게 그의 속내를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도 모를 정도로 본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조슈아는 아리아드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 있다. 소설 밖으로 나가 그의 심경을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조슈아 혼자만 바뀐 소설의 흐름이 그것을 증명했다.
여태껏 그려 왔던 분홍빛 망상은 확신이 되어 심장을 간질였다.
울다 웃고 있는 괴상한 얼굴을 바라보며 조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순간 소희는 두피가 뜯길 거 같은 고통도 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으니까.
때마침 굳게 닫혀 있던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저하, 이제 가셔야 합니다.”
메이컨의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조슈아는 내렸던 타이를 위로 올려 조였다.
“최대한 정리를 했는데도 머리가 너무 엉망이야. 그러니 이제 별채로 돌아가.”
“몇 시간 뒤에 불꽃놀이를 한 대. 나 여기 있을 테니까, 같이 볼래?”
그리 말하고 소희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조슈아는 그 얼굴을 잠시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런 모습을 외면하듯 황급히 몸을 돌려세웠다.
뒤잇는 답은 없었지만, 소희는 그가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 * *
“와, 이 몰골로….”
방 안에 있는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한 소희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정도 사그라질 것만 같은 볼품없는 꼴이었다. 하도 울어 눈은 팅팅 부어 있었고 코끝은 빨갰다. 그뿐이면 다행이었다. 눈물 자국이야 둘째치고 콧물이 흘렀던 자국이 코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맹구야 뭐야….”
소희는 두 손으로 살갗이 빨개질 정도로 코 밑을 문질렀다. 이거에 비하면 조슈아가 계속해서 쓰다듬었지만 가라앉지 못하고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은 양반이었다.
이 모양 이 꼴로 해맑게 웃었다니. 조슈아가 빠르게 등을 보였던 건 어쩌면 웃음을 참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그럴듯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소희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주먹으로 쿠션을 팡팡 때렸다.
별채로 돌아가라 할 때 갈 걸 그랬나. 이 몰골로 무슨 불꽃놀이를 본다고 그리 분위기를 잡았는지.
그리 의미 없는 후회를 하며 한 시간 정도를 흘려보냈을 때였다. 불꽃놀이는 이미 시작이 되었는지 창밖으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올린 소희는 창문 쪽을 응시했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방의 조명을 껐다. 그러자 이곳에서도 화려한 불꽃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자 선선히 불어온 바람에 부풀어 있던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볼을 간질였다. 뒤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체취가 번졌다.
소희는 폭죽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뒤돌았다. 곧바로 그녀의 뒤쪽까지 걸어온 남자와 속절없이 눈이 마주쳤다.
이 분위기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소용돌이치던 여러 감정이, 색색으로 터지는 불꽃들과 함께 터져 나왔다.
참으로 우스운 몰골인지라 참으려 했건만, 소희는 결국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뱉었다.
“…좋아해.”
한참을 울어서 그런가,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려 왔다.
“진심으로.”
그럼에도 꿋꿋이 말을 덧붙였다. 그 서툰 고백 뒤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나름 용기 내어 한 말에 그 어떠한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조슈아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창밖으로 폭죽이 터지며 빛이 번졌다. 어둠 속에서 잠시간 번득인 빛은 남자의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 얼굴 안에는 고백을 받은 자의 설렘을 느끼는 감정 따위 담겨 있지 않았다.
저 아름다운 얼굴에 담긴 건 약간의 비소였다.
“그놈의 진심.”
차갑게 굳은 언성에 소희는 느꼈다.
“네 진심은 변덕이 꽤 심한가 보지?”
아무래도 이 남자를 꾀려면 한참이 걸릴 듯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