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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88화 (88/120)

Chapter 88

황후 폐하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처음 연회장에 발을 들였던 날.

‘연회장에서 나가서 복도 오른쪽으로 쭉 걸어가면 방이 하나 있어요. 거기에 드레스가 몇 벌 마련되어 있으니 꺼내 입으세요.’

켈리는 건네받은 보드라운 손수건을 꽉 쥔 채 복도를 걸었다. 처음 받아 본 호의에 심장이 고장 난 듯 끊임없이 쿵쾅거렸다. 괴롭힘으로 온몸이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 복도에서 술에 취한 남자를 만났다. 제 몸 하나 주체못하고 휘청거리던 그는 어둠 속에서 그녀와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 그때도 웃으며 이런 말을 했었지.

“이상해. 너에게 닿으면 기분이 좋아져. 넌 다른 사람이랑 달라.”

그 당시, 이 남자가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묵직한 몸에 사지가 눌렸고 그에 대한 반항을 이어 갔다. 하등 보잘것없는 몸부림이었지만.

단순히 술에 취해 벌인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오늘도 다니엘은 또렷하게 빛나는 적갈색 눈동자로 그때와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으니까.

기다란 손가락이 뺨을 쓸다가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모든 걸 체념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앞으로 습한 숨결이 와 닿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쾅.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느닷없이 누군가가 튀어 들어왔다. 그러한 소란에 다니엘의 고개가 돌아가고, 켈리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리아드가 무릎을 붙잡고 숨을 고르다가 힘겹게 허리를 세웠다. 그 얼굴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켈리를 벽에 몰아세운 채로 서 있는 다니엘과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소리부터 내질렀다.

“멈춰!!!”

* * *

다니엘과 켈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소희는 그리 단순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본인은 그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까지 기록해 두었으니까 말이다.

‘연회장 복도 오른쪽에 있는 방 중 하나’ 정도로 기록해 두었기에 정확도가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방이야 뭐 얼마나 많겠냐는 생각이었다. 대충 가서 문이나 한 번씩 열어 보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래서 여유롭게 마카롱을 씹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에 신이 나 이것저것 집어 오는 메리와 실없이 떠들면서 말이다.

모든 건 제 손안에 있다고 여겼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켈리와 다니엘이 어느 순간 제 시야 안에 보이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저기 있었는데?”

그들이 보이는 거리에서 디저트를 먹고 있던 소희는 벌떡 일어났다. 연회장 끝에서 끝까지 열심히 걸으며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깨달았다. 창밖으로 해는 이미 저물어 있다는 걸.

소희는 급하게 연회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에 즐비해 있는 방문들을 보고서는 그대로 제 이마를 세게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여기 방이 왜 이렇게 많아.”

‘연회장 복도 오른쪽에 있는 방 중 하나’라는 서술만 믿고 있었는데, 그 애매한 묘사 한 줄이 이렇게 많은 방을 탄생시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번째 방인지까지 명확하게 서술해 두는 거였는데.

소희는 그리 뒤늦은 후회를 하며 열심히 방문을 열었다. 가끔가다 문을 열어젖힌 곳에 입맞춤하는 귀족 남녀와 눈이 마주쳐 열심히 허리를 접어 사과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지나갈 때마다 초조해졌다. 이제 와서야 자신이 서술해 놨던 대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불안감이 커지고 있었다. 사실상 다니엘과 켈리의 이야기가 비틀릴 일은 없는데도 말이다.

처음에는 그저 조슈아와 켈리의 19신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발길을 급하게 움직이는 지금, 머릿속에는 그저 켈리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하였다.

아무리 피폐물이라고 해도 그런 장면은 써 두는 게 아니었는데.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마지막 방문을 열어젖혔을 때였다.

쾅.

다급함이 묻어난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소희는 허리를 꺾고 잠시 숨을 골랐다. 곧바로 상체를 펴자 놀라 커다래진 적갈색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뒤틀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소희는 황급히 손을 뻗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멈춰!!!”

갑작스레 나타난 여자 때문에 다니엘의 얼굴이 제대로 일그러졌다. 심지어 땀에 흠뻑 젖은 모양새라니. 또 그 더러운 몸으로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하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다니엘의 눈에는 그것만 느릿하게 확대되어 보였다.

“당장 손 떼!!!”

소희는 켈리의 드레스 목둘레에 닿아 있는 커다란 손만 보였다. 그걸 뚫어져라 바라보며 돌진하자 다니엘이 주춤주춤 옆으로 물러섰다.

“오, 오지 마.”

그 짧은 순간 그의 낯은 빠르게 파리해졌다. 허옇게 질린 그는 두 팔을 공중에 들어 올렸다. 완벽한 항복의 표시였다.

그럼에도 계속 진격하는 소희 때문에 다니엘은 반사적으로 두 다리를 움직였다. 그 어떤 적진의 장수보다 무서운 기세였다. 땀에 젖은 장수가 달려오면 닿기 전에 베어 버리기라도 하면 되지, 다니엘에게 이 상황은 정말 답도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을 둘러볼 경황도 없이 다급해진 몸이 옆쪽에 있던 소파에 부딪히고 그는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소희는 그 앞까지 와서 그런 남자를 내려 봤다.

“두 번 다시 이러지 마. 내가 어디든 찾아갈 거야. 알아들어?”

얇은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다니엘의 얼굴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으악!”

장갑을 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급하게 쓸어내린 다니엘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날랜지 하마터면 위에서 내려 보고 있던 소희의 얼굴과 부딪힐 뻔했다.

소희는 호들갑을 떠는 남자를 피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작은 틈으로 다니엘은 이미 몸을 구겨 넣어 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휴.”

그 급박해 보이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희는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벽면에 주저앉아 있는 켈리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힘이 풀린 눈동자였다. 괜한 연민이 몰려와 소희는 그녀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쭉 뻗은 팔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켈리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하나도 안 고마워요.”

지친 기색으로도 얄팍한 자존심을 부렸다. 그 위에서 민망스러워진 소희는 뻗었던 팔을 도로 내렸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예요?”

“그거야….”

잠시 적당한 말을 고르려고 머리를 굴렸다. 당신이 걱정되어서 찾아왔다고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제 얄팍한 자존심도 허용치 않았다.

“참, 내가 이쪽에 볼일이 있었지. 그래서, 그래서 찾아왔는데! 누군 좋아서 도와준 줄 아나. 정말 어이가 없네.”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빤히 올려다보던 켈리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버려 둘 걸 그랬어. 참나.”

그녀는 한참 내려가 있는 옷의 목둘레를 끌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고맙다고 할 줄 알았어요?”

“하, 고맙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네요.”

소희가 팔짱을 끼고 코웃음 쳤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모두 정리한 켈리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푸른빛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옅게 요동치는 듯했다.

그러다 켈리는 불쑥 화를 냈다.

“당신 정말 짜증 나. 최악이야.”

소희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내가 짠 내용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대로 방관할 수도 있는 것을 굳이 힘을 써 도와줬더니 돌아오는 건 짜증이라니.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르다가 소희는 빠르게 손을 내려 그녀를 노려봤다.

“와, 고맙다는 말은 못 해도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지. 말은 바르게 하세요. 최악이라는 단어는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사람 막 죽이려는 사람한테 붙이는 말이고!”

언성이 점차 높아졌다. 그 앞에서 켈리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하얗던 얼굴이 둘 다 시뻘게진 지는 오래였다.

“날 끌어내릴 거면 끌어내리든가! 일부러 블루앙 래비를 데리고 내 앞에서 얼쩡대면서 사람 피 마르게 하지 말고!”

“사람을 피 마르게 한다고? 겨우 그런 걸로 네가 나한테 큰소리칠 자격이 돼?”

“안 될 건 또 뭔데!”

날카로운 두 목소리가 방 안을 한가득 메웠다. 켈리는 갑작스레 옆에 있던 물건을 아무거나 집더니 앞으로 내던졌다. 공중에 날아오른 뾰족한 촛대가 소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릿한 감각과 함께 소희는 눈을 끔뻑였다. 손을 대고 쓸어 확인하자, 땀으로 축축했던 뺨 위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너, 지금 나한테 물건을 던진 거야?”

“그래. 던졌는데 뭐 어쩔 거야.”

아이의 죽음 이후로 분노를 꾹 눌러 참아 겨우 이어지고 있던 이성이 뚝 끊긴 기분이었다.

“야!!!”

소희는 주먹을 꽉 쥐고 냅다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뛰어갔다.

그 이전에 바라 왔던 소원은 어느 정도 이뤄졌다. 응접실에서 마주했을 때, 켈리의 저 금빛 머리카락을 죄다 뜯어 민머리를 만들고 싶다는 그 소원 말이다.

두 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서 뒤엉켰다. 각자의 손이 자연스럽게 머리채로 향하고 머리카락을 모두 뜯을 기세로 힘을 잔뜩 실었다. 그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테이블이 밀리고 그 위에 있던 물건들이 떨어졌다.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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