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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87화 (87/120)

Chapter 87

“언니, 우리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해?”

에리카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로잘린의 사정을 알지 못하기에 가능한 투정이었다. 아리아드의 손아귀에 귀족 인생에 사활이 걸린 로잘린은 제 동생의 불평을 들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조용히 해.”

로잘린은 에리카의 하얀 구두를 세게 콱 밟았다.

‘아리아드가 소문을 퍼트리면 어떡하지? 대체 저 여자는 무슨 속셈인 거야?’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기에 주변 시선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소희는 옆에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과 함께 등장하자 사납기만 했던 눈길은 의아함으로 뒤바뀌었다. 심지어 황태자비인 켈리 유레시아의 언니들이 전 황태자비인 아리아드와 함께 있었으니 이러한 반응은 당연했다.

매섭기만 했던 눈길이 변모하자 메리는 조금 긴장 풀린 듯했다. 잔뜩 위축되어 있던 어깨를 펴고는 그제야 잔치를 즐기는 여유로운 낯이었다.

바라는 대로 되었으니 소희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아직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인 메인 스토리는 진행되지 않았지만, 이제 뭐든 수월할 것만 같았다.

다니엘이 연회장 앞쪽으로 걸어갔다. 악단의 연주가 끊기고 그가 샴페인 잔을 공중으로 올렸다. 환호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렸다.

모든 일은 소희가 짜 둔 내용대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밤이 찾아오면, 기록해 놓은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 * *

다니엘의 일장 연설이 끝이 나고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다. 왈츠곡에 맞춰 그의 구두가 대리석 바닥을 두드렸다. 그리고 오른손은 감미로운 선율을 지휘하듯 공중에서 그림을 그렸다.

헨리킨 엔드로는 그런 그를 유심히 살피다가 옆자리에 앉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주 좋지요. 엔드로 공작님 덕분에 일어날 재밌는 일을 상상하면 흥이 나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 모호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이해한 듯 헨리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뒤이어 잠시간 찾아온 두통에 미간을 좁혔다.

요즘 들어 헨리킨의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피어슨 부부였다. 약혼식이 엉망으로 흐지부지 끝나 버린 뒤로부터 그들은 매일같이 찾아와 결정을 번복해 줄 것을 빌었다.

그들이 붙잡을 줄이라고는 이제 그밖에 남지 않았는지 참으로 절절하게도 빌어 댔었다. 초반에는 과거의 연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동정심은 깡그리 없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이주 가까이 저택 앞으로 찾아와 절규해대는 통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헨리킨의 눈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다니엘은 그 피곤해 보이는 낯을 흘깃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엔드로 공작님은 매우 고단해 보이십니다.”

“어젯밤 피어슨 부부가 또 찾아와 난동을 피워서….”

며칠 전, 다니엘도 함께 목격한 장면이었다. 사업 건에 대해 상의하러 엔드로 저택을 찾아갔다가 커다란 철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부부를 아무런 감흥 없이 바라보고 스쳐 지났었다.

그는 공중에 둔 오른손을 내렸다. 그리고 가죽 장갑 중에 유일하게 비어 있는 자리를 만지작거렸다. 전쟁터에서 새끼손가락이 잘린 이후로, 무언가를 생각할 때마다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었다.

곧이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역선에 같이 태우는 건 어떻습니까.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 준다고 하고요.”

헨리킨이 놀라 그를 돌아봤다. 주름진 눈매 안 동공에는 미약한 두려움이 깃들여 있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하찮은 벌레 하나 없어지는 건데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다니엘의 입 밖으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내 조슈아를 발견한 다니엘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라트베아에 도착한 이래로 그의 즐거움은 모두 조슈아로부터 비롯되었다. 곧 제 손에 무너져 내릴 조슈아의 계획과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조슈아는 누군가를 찾는 듯 연회장 안을 방황하고 있었다. 다니엘이 그 앞을 가볍게 막아섰다.

“많이 바빠 보이네. 같이 술 한잔할 시간도 없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샴페인을 들어 건네자 조슈아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와 눈을 맞추며 다니엘은 입꼬리를 천천히 내렸다. 흥겨웠던 마음에 갑작스레 먹물이 튀었다.

그래, 저 눈빛.

짙은 붉은색 눈망울을 마주할 때면 매번 기분이 더러워지곤 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타고난 자의 교만스러운 눈이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 제 손안에 있으니, 열등감이라고는 느껴 본 적 없을 타고난 자의 여유가 그 눈망울 안에 깃들어 있었다.

그게 다니엘의 피를 끓게 했다. 저 눈망울 안에 담긴 여유를 꺾으면 그에 대한 미움도 조금은 사그라질 듯했다.

조슈아는 샴페인을 건네받았다. 그 앞에서 다니엘은 용암처럼 들끓는 제 감정을 애써 감추고는 전과 다를 바 없이 입매를 부드럽게 올렸다. 그리고 괜스레 호탕하게 말소리를 높였다.

“내 동생. 나를 그리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어서 조금 서운한 마음이야.”

그저 잔을 들어 샴페인을 머금을 뿐 조슈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다시 마음 한구석이 뾰족해졌다.

“내가 없는 일 년 사이에 일을 많이 벌여 놨더라고. 철도와 무역에 손을 댔다지.”

“….”

“항상 응원하고 있어.”

샴페인 잔을 입술에서 떼어 낸 조슈아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 옅은 웃음이 잔뜩 비틀린 제 속마음을 꿰뚫는 거 같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더 이상 그에 개의치 않았다. 저 여유로운 낯은 일주일 내로 잔뜩 이지러질 테니까.

다니엘은 여유로운 자태를 꾸며내며 샴페인 잔을 돌렸다. 이내 그의 시야 내에 익숙한 이가 보이자 자연스레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샴페인을 한꺼번에 들이키고는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놨다.

“바쁜 황태자 저하를 너무 오래 붙잡아 놨네. 그럼 이만.”

조슈아는 그가 사라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발길이 향하는 곳에는 켈리가 있었다. 그걸 확인한 붉은색 눈동자가 흥미를 잃고는 금방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창밖으로는 작열하던 태양이 힘을 잃고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 * *

눈앞이 점차 뿌예졌다.

근래 들어 켈리는 사람이 많은 공간에 있으면 숨을 잔뜩 헐떡일 정도의 과호흡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이젠 호흡이 가빠질 낌새가 보이면 적당히 쉴 공간을 찾아 헤매었다.

아무래도 지금이 조용한 공간으로 가 쉬어야만 할 시간인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쓰러져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기회를 틈타 연회장을 빠져나온 켈리는 기다란 복도를 정처 없이 걸었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조명이 없는 장내에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또각또각.

나지막한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연회장에서 떨어진 구석진 곳으로 오니 더는 연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한 고요함 속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뚜벅뚜벅.

연주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제야 누군가 제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소리 하나만으로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이와 비슷한 과거의 일이 떠오르자 강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켈리의 두 다리에 점차 속도가 붙고 빨라졌다. 그리고 제일 끝 방에 도착해 급히 문을 열었다. 이대로 방문을 잠그면 휘몰아치는 감정이 가라앉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문은 닫히지 못했다. 작은 틈을 파고든 큼지막한 손에 의하여.

“켈리.”

그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뇌리에 스친 비슷한 경험으로 인해 강한 무력감이 만들어졌다.

켈리의 손에 힘이 빠져나가며 좁았던 틈이 벌어졌다.

다니엘은 몇 년 전 그날 밤처럼 웃었다. 일 년 사이 왼쪽 눈매에 기다란 흉터가 새롭게 자리한 것 말고는, 죄책감 없는 만면은 여전했다.

철컥.

가볍게 문이 닫히고 작은 공간 안에 두 남녀만이 있었다.

“어딜 그렇게 바삐 가. 쫓아오느라 힘들었네.”

“…오지 마요.”

켈리는 뒷걸음질 쳤다. 천천히 두 다리를 움직이며 다가오는 남자는 위협적이었다. 결국 그녀의 등은 차가운 벽에 닿았다. 그와 함께 벽면에 있던 장식품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다니엘은 켈리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그는 두려움에 찬 얼굴을 내려 보며 키득거렸다.

곧이어 그는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어 던졌다. 거친 손끝이 하얗게 질린 뺨을 쓸고 내려갔다.

“이상해. 너에게 닿으면 기분이 좋아져. 넌 다른 사람이랑 달라.”

미약하게나마 반항하던 작은 몸을 커다란 체구가 내리눌렀다.

켈리는 생각했었다. 높은 자리는 자신을 지켜 줄 수 있으리라고. 뒤돌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순진한 사고였다.

아무리 고귀한 자리라고 한들, 자리는 사람을 지킬 수 없다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한없이 나약하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고. 그녀는 이리저리 휘둘리는 제 삶을 반추하며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강한 사람이 아니며, 더는 강한 척도 할 수 없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전신이 다시 눅진해지며 한없이 무력하기만 했다.

이젠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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