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86화 (86/120)

Chapter 86

최근 켈리의 일상은 판에 박힌 듯 똑같았다.

침대에 누워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음식만 축내는 삶. 황태자비라면 마땅히 들어야 할 교육도 지난 며칠 건강을 핑계 대며 나가지 않았다. 딱히 아픈 구석은 없었지만 일상적인 생활을 해 나가기가 어려웠다.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듯 눅진하고 무거웠다. 일어나 뭔가를 하려고 마음먹어도 축 늘어진 신체가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못했다. 그렇게 눈을 떠서 온종일 누워 있다 보면 중천에 떠 있던 해는 금방 저물어 새까만 밤이 찾아오는 일상이었다.

오늘 하루는 아프다는 핑계로 넘어갈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드레스를 챙겨 입고 코르셋을 조이면서 구역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다니엘 매킨리가 돌아왔다. 버거운 일상에 더욱 감당 못 할 인물이 더해졌다.

전쟁터로 간다고 했을 때 그가 그곳에서 죽길 바랐다. 하지만 하늘은 그런 그녀의 바람을 이뤄 주지 않았다.

몸에 더럽게 아로새겨진 몇 년 전 일이 뇌리에 또렷했다. 매일같이 살결이 뜯길 듯 문질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빛을 잃은 파란색 눈동자가 허공에 무의미한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 시야 안으로 모래 먼지가 일더니, 쨍한 햇살 아래 대열을 맞춘 제국군들이 가까워졌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격전지에서 살아 돌아온 전쟁의 영웅을 반겼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입가에 친절한 미소를 띠고 인사를 하던 다니엘은 켈리의 앞에 멈춰 섰다.

“안녕, 켈리. 오랜만이네.”

그는 몇 년 전과 다를 것 없는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그 날밤도 꼭 이런 표정이었는데….

잠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뒤따랐다. 켈리는 제 모든 것을 헐벗기려는 적갈색 눈동자를 피해 고개를 숙였다.

“아, 이제는 비저하님이라고 불러야겠지?”

다니엘이 제 악수를 받지 않는 켈리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잘게 떨리고 있던 손끝이 이젠 티가 날 정도로 바들바들 흔들렸다.

다니엘은 그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어떻게, 그 자리까지 꿰찼네. 대단해.”

그는 작게 속삭이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곳에서 짙은 즐거움이 느껴졌다. 그저 한순간 유희의 대상, 제 장난감에 불과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켈리는 그런 그와 마주한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여 왔다.

그녀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또 다른 이였다. 그날 밤의 일이 퍼진다면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은 자신뿐일 게 분명했으니까.

신은 왜 이런 자를 살려 둔 것인가….

과거의 그날처럼 켈리는 몸에 힘을 풀었다. 이미 어마어마한 체격 차이로 벗어날 수 없음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구원자 따위는 없었다. 차가운 눈빛을 보내던 조슈아도, 그저 제 아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비앙카도.

다니엘은 손에 힘을 풀고 천천히 눈을 감는 그녀를 만족스럽게 내려 봤다.

그런데 그때였다. 난데없이 누군가가 그사이에 불쑥 제 팔을 끼워 넣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저하.”

갑작스레 끼어든 브릭스에게 따가운 눈초리가 닿았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자약하게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켈리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저에게로 꼿꼿하게 뻗은 손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아르센트 후작, 오랜만이네. 내 동생이랑은 아직도 우애가 두터운가.”

악수 요청을 무시당한 브릭스는 민망한 기색 없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팔을 내렸다.

“그런 소리 마십쇼. 그 재수 없는 자식이랑은 이전에 진즉 연을 끊었습니다.”

다니엘은 브릭스와 조슈아의 사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브릭스 아르센트가 이처럼 능글맞게 아부하면서도 절대 제 편에 서지 않을 인물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다니엘은 피식거리며 그렇게 싱거운 대화를 끝냈다. 그리고 곧바로 그들을 스쳐 지났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잔뜩 옥죄여 왔던 켈리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였다. 그녀는 귀족들이 도열해 있는 틈에서 급하게 벗어나 허리를 굽혀 무릎을 잡았다.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듯 입 밖으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아요?”

“…도와줬다고 생색낼 생각이면 그만 가세요.”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켈리는 대화할 기운도 없어 마른침만 삼켰다. 한참 뒤, 힘겹게 몸을 곧추세웠다. 그 앞에서 브릭스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니엘과의 사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은 얼굴을 한 사람 앞에서 생색낼 정도로 못난 놈은 아니어서요.”

그리고 불쑥 앞으로 건넨 건 하얀 손수건이었다. 그제야 켈리는 제 얼굴이 식은땀으로 잔뜩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손수건은 필요 없습니다.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담백한 말이 끝나자 둘의 눈이 마주쳤다. 연했던 노란색 눈동자가 쨍한 태양 볕 아래 짙은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브릭스는 그녀가 받을 때까지 들고 있을 셈인지 한참을 그렇게 팔을 쭉 뻗은 채였다. 그러한 끈기에 켈리는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얼마 안 가 손아귀에 짙게 자리했던 다니엘의 감촉이 희미해졌다. 그제야 손수건을 쥔 켈리의 손에 힘이 실렸다.

* * *

건물 뒤편으로 축포가 터졌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입구로 향하면서 소희가 걸음을 옮길 적마다 힐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이는 그녀의 등장에 대놓고 핀잔을 주며 불편함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소희는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른쪽에는 블루앙 래비가 있었고, 왼쪽에는 메리가 있었으니까.

없는 돈을 다 털어서라도 블루앙 래비에게 일당을 쥐여 주고 데려온 건, 혹시나 자신을 건들지도 모를 켈리에게 그저 엄포를 놓기 위해서였다.

오늘 축하연에서 제 목표는 휴온 칼리우드의 생존을 확인하고, 켈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자신이 막아 조슈아가 개입할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물론 켈리에게 일어날 안 좋은 사건을 직접 막는다는 건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 또한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제 아이를 죽인 사람이 당하는 거니까 상관없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상당히 찝찝한 내용이었다. 그 사건에 조슈아의 개입과는 별개로 말이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듯 소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갈라섰다. 과히 배척하는 모양새였다.

“저희한테 무슨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걸까요?”

메리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런 날 선 시선은 처음인지라 기가 한껏 꺾인 듯했다.

전보다 강도만 세졌을 뿐 소희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 옆에 있는 메리까지 무시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

오늘의 할 일 중에 따돌림을 시키는 귀족들과 사이를 원만하게 만든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이왕 이곳에 온 거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소희는 한곳에 몰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수군덕거리는 여자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러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방법이 없긴 왜 없어.”

“네?”

“메리, 잠시만 여기 있어 봐. 아주 잠시면 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따가운 눈길들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소희의 빨간 구두가 다다른 곳은 로잘린과 에리카의 앞이었다.

아리아드의 등장에 슬슬 피하는 귀족 여성들을 따라 로잘린과 에리카도 급하게 등을 돌렸다. 소희는 그대로 멀어지려는 로잘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에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깃털 장식이 바르르 떨렸다.

“반가워요. 우리 오랜만인데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이것 좀 놔주시겠어요?”

로잘린은 돌아서지도 않고 등을 보인 채로 황급히 대답했다. 소희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고 필사적이었다.

소희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로잘린과 에리카는 또래 여자 귀족들 사이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편이었다. 한마디로 이들만 제 곁에 두면 따돌림은 어느 정도 해결되는 문제라는 거였다.

“음, 얼마 뒤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축하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또 겸사겸사 덧붙일 말도 있고.”

시놉시스에서 로잘린의 혼담이 정식으로 확정되는 건 다니엘 매킨리가 등장한 바로 직후였다. 소희가 이러한 부분까지 기억하는 건 이 내용이 여주인공인 켈리와 엮인 꽤 큰 사건이어서였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러시면 서운한데.”

“놔주세요.”

“앨버튼.”

그 이름에 제 팔을 빼내려고 힘을 주던 로잘린이 움직임을 멈췄다.

“유레시아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 앨버튼.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로잘린은 갑자기 급하게 몸을 돌렸다. 그제야 소희의 시야 안에 새하얗게 질린 만면이 들어왔다.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왜 저한테….”

“여기서 이야기할까요?”

소희는 그녀의 팔을 놓고 돌아섰다. 더 이상 붙잡고 있지 않아도 알아서 따라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 예상대로 로잘린은 필사적으로 아리아드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때와는 다르게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연회장 옆에 작게 딸린 방이었다. 소파에 앉은 로잘린은 앞에 마련된 유리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로잘린 양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예요. 저는 로잘린 양이 앨버튼 집사와 어떤 관계인지 알아요.”

“콜록. 콜록.”

사레가 들렸는지 그녀는 기침을 터트렸다.

“그게, 그게 대체 무슨….”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소희는 자신이 쓴 내용을 생각했다.

로잘린과 앨버튼 집사는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술에 취해 벌인 그저 충동적인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에 대해 로잘린은 숨기기 급급했고, 앨버튼은 이 일을 덮고자 하는 그녀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겉보기엔 순탄하게 해결된 거 같던 이 일은, 로잘린이 공작가 자제와 결혼이 확정되며 터지게 된다. 사실 켈리는 그날의 일을 목격했었고 여태 자신을 괴롭혔던 로잘린에게 복수하기 위해 앨버튼을 섭외한다.

그 하룻밤으로 로잘린에게 사심을 갖게 된 앨버튼은, 그녀의 결혼을 망치기 위한 목적으로 켈리를 돕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앨버튼 집사를 기회를 봐서 멀리 내쫓는 게 좋을 거예요. 예를 들면 장부 조작 일을 들추는 게 좋겠네요. 그게 밝혀지게 되면 그의 말은 신뢰를 잃게 될 테니까요. 이제 그 조작된 장부를 찾는 건 로잘린 양의 몫이고요.”

“…네?”

“그 집사를 유레시아 가문에 계속 둔다면, 얼마 안 가 당신과 있었던 일을 주변에 퍼트릴 거예요. 그러면 로잘린 양은 순결한 여자를 원하는 공작가 자제에게 철저히 내쳐지겠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앨버튼 집사와 켈리 양이 뒤에서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어요. 켈리 양이 그날 밤 일을 목격한 모양이더라고요.”

소희는 그냥 그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조금 진부하기는 하지만 엿들었다고 둘러대는 편이 설득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사색이 된 로잘린은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왜 저에게 도움을 주시는 거예요? 대체 뭘 바라고?”

“저희는 비밀 친구잖아요.”

로잘린은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예전에 로잘린 양은 저에게 켈리 양의 일기장을 보여 줬고, 저는 로잘린 양의 비밀을 숨겨 주고. 그러니까 우리는, 비밀 친구.”

소희가 또박또박 친구인 것을 강조하며 천진하게 웃었다.

“제가 바라는 건 한가지예요. 축하연이 진행되는 시간 동안 제 옆에 있어 주세요.”

정말 그게 다냐는 듯 로잘린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어렵지 않잖아요. 비밀을 나눈 친구끼리.”

그 앞에서 소희는 정말 그게 전부라는 듯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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