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5
“일 년만인가. 그런데 당신, 꼴이 말이 아니네.”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있던 다니엘은 그녀에게만 들리게끔 낮게 속삭였다.
“간간이 소식을 접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사람들 틈 사이에 껴서 땀을 뻘뻘 흘리는 얼굴부터, 실밥이 잔뜩 드러난 허름한 복장까지. 고동빛 눈동자가 그 형편없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소희는 그런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곱상하게 생긴 조슈아와 형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사나운 인상이었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맞추고 있자 다니엘의 미간이 점차 좁혀 들었다. 그와 느닷없이 눈싸움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저 말에 무슨 대꾸가 적당한지 몰라서 골똘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뿐.
아리아드와 다니엘의 관계를 알지 못하니 난감했다. 소설 초반에 처형당해 죽을 조연과 소설 속 최대 빌런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기록해 놓을 일은 없으니까.
백지상태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둘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리아드를 넋 나가 바라보던 보통 남자들과는 다르게 뾰족하게 날 선 눈빛이 그걸 증명했다.
또 소희가 짜 둔 설정도 그 추측에 확신을 더해 줬다. 다니엘 매킨리는 기본적으로 겉보기에 지순한 여자를 좋아했다. 예를 들면 켈리 같은.
자존심이 강한 다니엘은 누구든 누르고 위에 서고 싶어 했고, 특히 여자에게 무시당하는 일은 참지 못했다. 그러니 자기주장이 강하고 기가 센 아리아드와는 상극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이 분위기에 맞는 적당한 대답을 찾은 소희는 입술을 뗐다. 그런데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막히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 신문 앞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아리아드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안 관중들 때문이었다. 유명 인사를 구경하기 위한 열정으로 주변이 더욱 과열되었다.
“악!”
사람들에게 밀린 소희의 몸이 또 휘청거렸다. 사흘째 병상에 누워 있던 허약한 신체는 금방 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렸다.
통제를 위해 기사들이 설치해 놓은 줄을 들이받은 소희는 그렇게 다니엘과 더욱 가까워졌다. 아니, 가까워지다 못해 안기고 말았다.
방금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자에게서 그에 걸맞는 짙은 화약 냄새가 풍겼다. 소희는 놀라서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다니엘은 짜증이 잔뜩 묻은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금방이라도 아리아드를 떨쳐 내고 싶어 하는 손이 그녀의 팔을 꽉 잡은 상태였다.
소희는 두 다리에 힘을 줘 중심을 잡으며 제 팔을 잡은 손을 내려 봤다. 이 더운 날씨에도 고집 있게 낀 두터운 가죽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다니엘의 이런 고집에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결벽증이 매우 심하다는 설정의 캐릭터였으니까. 그런 그에게 이 순간 땀범벅인 아리아드와의 접촉은 아주 최악일 것이다.
불쾌감을 표하듯 다니엘은 제 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거칠게 밀었다.
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밀리는 몸에 소희는 해탈하고 말았다. 다니엘의 주변으로 사람이 몰리지 않도록 기사들이 대열을 정리한 덕에 제 뒤에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순간에도 소희는 담담하게 푸르른 하늘을 응시했다. 뒤이어 이어질 고통에 대응할 낙법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뒤돌아 확인하지 않아도 콧속까지 들어찬 향기 덕에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일까. 내 동생이 여기까지 마중을 다 나오시고.”
다니엘이 갑작스레 등장한 인물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여유로운 낯을 꾸며 냈지만 아리아드를 바라볼 때보다 더 적대적으로 변한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조슈아는 아무런 말 없이 다니엘의 손에 들린 모자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헝클어진 보라색 머리카락 위에 씌웠다.
“아, 나를 보러 온 게 아닌가.”
그에 다니엘은 어깨를 으쓱 들어 보이고는 속삭였다.
“역시 요부인가. 철옹성 같은 황태자 저하까지 꼬셔 내고. 아리아드 피어슨이 대단하긴 해.”
얼굴을 들이밀고 깐죽거리는 모습에 소희는 그의 턱에 어퍼컷을 날리고 싶은 걸 인내했다. 그 대신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이왕 이렇게 악당의 눈에 단단히 찍힌 거, 저 밉상인 낯을 제대로 구겨 주고 싶었다.
조슈아의 품에서 빠져나온 소희가 멀어지려는 다니엘의 팔을 덥석 잡았다.
“잠시만요. 오랜만에 봤는데 반가워서 그냥 보낼 수가 없네.”
“뭐?”
그리고 그가 제 손을 떨쳐 내기 전에 재빠르게 가죽 장갑을 벗겨 냈다. 두꺼운 가죽 장갑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악수나 한번 찐하게 하자고요.”
소희는 다니엘의 맨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남자의 새하얀 낯이 짙은 불쾌감으로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
이를 꽉 물고 뱉는 말이 험상궂었다. 어찌나 혐오감을 느꼈으면 그의 목에 퍼런 핏대가 솟아 있었다. 자신을 찢어 죽일 듯한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소희는 맞잡은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다니엘은 그 손을 떨쳐 내려고 팔을 매섭게 털어 댔지만, 소희도 그만큼 죽을힘을 다해서 버텼다.
“아리아드.”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언성 하나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던 쓸데없는 오기가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이름만 불렀을 뿐 그 이후 어떠한 말도 없었지만, 그 말에 숨겨진 그만하라는 의미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소희는 손에서 힘을 뺐다. 기다렸다는 듯 다니엘은 다른 쪽 손으로 거칠게 그녀를 밀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그는 극심한 공포와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그에게 매섭게 내쳐진 몸이 균형을 잃었고, 그런 그녀를 조슈아가 또 감싸 안았다.
다니엘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아마 소희의 행동으로 인해 심한 메스꺼움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 정도로 그의 결벽증은 심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소희와 맞닿은 손을 벅벅 닦아 냈다. 어찌나 거칠게 문질러 댔으면 금세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곧이어 들고 있던 손수건을 내던지고는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며 바닥에 떨어진 장갑과 손수건을 구둣발로 거칠게 짓밟았다.
마주한 적갈색 눈동자가 험악하게 빛났다. 한동안 그렇게 매서운 시선을 보내던 남자는 돌아서 자신을 뒤따랐던 기사들과 함께 황성 앞으로 향했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소희는 시끄러운 주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뒤쪽으로 그들의 얼굴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가 상당했다.
소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남들이 보기에 썩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닌 거 같네.”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바로 뒤에서 단호한 질책이 이어졌다. 허리를 감싸 안았던 손이 풀리고 조슈아가 소희를 돌려세웠다.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보다 더 따가운 시선이 닿았다.
“…미안.”
고의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그에게 민폐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이혼한 남녀를 눈앞에 두고 어떠한 사담이 오갈지는 뻔했다.
와닿는 날카로운 눈길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위에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데리고 별채로 돌아가세요.”
조슈아는 제 주변에 서 있던 남자에게 명령했다. 고개를 숙인 남자는 곧바로 소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제서야 그는 시끄럽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벗어나 발길을 옮겼다.
* * *
“제가 가지 말자고 했잖아요. 진짜 깔려 죽을 뻔했어요.”
별채로 돌아오니 메리가 있었다. 압사당할 위기에 겨우 빠져나와 잔뜩 지쳐 보이는 얼굴로도 그녀의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근데 아리아드 님, 정말 큰일 날 뻔했다니까요. 그 상황에 모자가 날아가다니. 밖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아무 기사 내용이나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리아드 님 욕을 아주 험악하게 한다고요. 찢어 죽일 년이네 뭐네 하면서. 어유,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랬으면 아리아드 님은 지금 두 발로 못 걸어 다녀요.”
소희는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리다가 메리가 건넨 물을 마셨다. 찬물을 들이켜니 조금 전까지 온몸을 뒤덮던 후덥지근한 열기가 가시는 듯했다.
옷을 대충 벗어 던져 놓고는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소희에게 메리가 종이를 건넸다.
“조금 전에 황궁에서 온 시녀분이 전달해 달라고 했어요.”
“이게 뭐지?”
화려하게 꾸며진 편지지를 뜯자 정갈한 글씨체가 적혀 있었다. 이틀 뒤 열리는 승전 기념 축하연 초대장이었다. 맨 밑에는 매킨리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걸 왜 나한테 보냈지?”
그 중얼거림에 메리가 힐끗 종이의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무래도 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아리아드 님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초대한 게 분명해요. 조슈아 님이 보셔도 가지 말라고 하실 거예요.”
메리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초대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애써 부른다는 건 그만한 더러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승전 기념 축하연은 소희가 시놉시스에 기록해 놨던 주요 사건이었다. 사실상 내용을 다 알고 있기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아리아드의 등장으로 전개가 뒤틀렸다고 해도 큰 틀은 변함이 없을 테니까.
이 축하연의 메인은 켈리와 다니엘의 이야기였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찌해야 얻는지 모르는 다니엘은 켈리를 쉼 없이 괴롭히고, 축하연에서 제일 큰 사건이 터지게 된다. 본래 소설 대로라면 그렇게 위기에 처한 켈리를 조슈아가 구해 주게 되는데….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그 상황에서 둘의 사랑은 더 불타올라 뒤이어 진한 19신이 등장할 예정이었다.
문득 소희의 뇌리에 켈리와 조슈아가 함께 침실에서 나왔던 장면이 스쳤다. 그리고 그에 관한 질문에 침묵으로 답했던 남자의 모습 또한.
지금까지 삶을 살아온 경험에 빗대어 볼 때 보통 침묵은 긍정에 가까웠다. 소희는 갑자기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거 같아 찬물을 들이켰다.
“난 가야겠어.”
“…네?”
느닷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희를 바라보며 메리는 눈을 끔뻑였다.
“내가 가서 막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고 그곳에 결연한 언성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