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4
온 세상이 핑글핑글 돌았다.
소희는 사흘 내내 고온의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겨우 눈을 떠도 어지러움과 두통 때문에 금방 다시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끔 정신을 차릴 때마다 침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바뀌어 있었다.
묽은 수프를 건네는 메리, 서류를 보고 있는 조슈아.
차가운 물과 약을 건네는 메리, 신문을 펴서 읽고 있는 조슈아.
그리고 또 조슈아, 조슈아….
살결에 서늘한 기운이 와 닿자 소희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남자는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려 두고 있었다.
소희는 천근만근 무겁게 여겨지는 팔을 들어 제 이마 쪽에 닿아 있는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대로 멀어지려던 손이 멈칫 세워졌다.
“…미안해.”
잠결에 뱉은 말이 작고 흐릿하게 번졌다. 그 손을 전처럼 사납게 뿌리치는 대신, 그는 그 상태로 가만히 소희를 내려 봤다. 열 기운에 마주한 붉은색 눈망울이 용광로의 불처럼 일렁이는 듯했다. 그러다 한참 뒤에 그의 입술이 떼어졌다.
“뭐가.”
“그냥 다….”
소희가 다시 눈을 감자 팔은 원래 자리를 찾아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런데도 이마에 닿아 있는 온기는 여전했다. 그렇게 조슈아는 오랫동안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잡을 만한 기운은 없었다. 소희는 그저 그렇게 또 몰려오는 어둠 속에 몸을 맡겼다.
시간이 흐르고,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더 이상 한기를 느끼지 않을 때쯤이었다. 납덩이 같던 몸이 가벼워진 걸 느끼며 눈을 떴다.
오늘 제 앞에 있는 건 메리였다.
소희는 천천히 눈꺼풀을 끔뻑이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엉성하게 수를 놓고 있던 메리는 무릎에 그것을 내려놓고 협탁 위에 있는 물을 건넸다.
“아리아드 님, 괜찮으세요?”
“응, 목이 좀 아프긴 한데 거의 다 나은 거 같아.”
“어휴, 다행이다. 며칠 내내 열이 어찌나 오르락내리락하던지 정말 걱정이 컸어요.”
메리는 그 말을 건넨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이어 트레이 위에 간단한 식사를 가져와서 건넸다. 그리고 주인이 앓아누워 며칠째 참아야만 했던 수다를 이어 갔다.
“아리아드 님, 지금 황성 앞이 난리예요. 어찌나 북새통인지 아침에 잠깐 나갔다가 어지러워서 빨리 돌아왔잖아요.”
“난리? 왜?”
“전쟁에 나가셨던 황자님이 오늘 점심쯤에 도착한다나 봐요.”
황자라 하면, 다니엘 매킨리?
소희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요즘 들어 정신없게 흘러가는 상황들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말이다.
다니엘 매킨리의 등장으로 소설이 어디까지 전개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기승전결’ 중 벌써 ‘전’ 부분까지 온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등장으로 인해 후반부 이야기가 굉장히 피폐하게 흘러갈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격전지에서 살아 돌아온 전장의 영웅은 사실 어마어마한 악인이었으니까. 소희가 짜 둔 시놉시스에 의하면 그는 가는 곳마다 피바다를 만드는 캐릭터였다.
그러니 그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생김새를 제대로 파악하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글로 외양을 설명해 두긴 했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또 그곳에 가서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휴온 칼리우드의 생존 여부에 대해서였다.
예상보다 길어진 전쟁에서 과연 그는 살아남았을까. 조슈아는 반년 전 소희의 부탁을 들어준 게 맞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소희 앞으로 메리는 저 혼자 종알종알 떠들고 있었다.
“그 시간에 맞춰서 황족들하고 고위 귀족들이 나온대요. 전쟁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구경하려고 아침부터 자리싸움이 치열한데, 저는 그게 진짜 이해가 안 가요. 어유, 매일 보는 황실 사람들 때문에 아주 진저리가 나는데 그게 무슨 구경거리라고….”
소희는 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어 뭐라고 하는지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메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열심히 뱉어 냈다.
갑작스레 목소리가 멈춘 것은 소희와 눈이 딱 마주치고 나서였다.
“아, 그렇다고 아리아드 님이 진저리난다는 건 아니고요.”
무슨 의미인지 몰라 소희는 생각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에 커다란 눈에 담긴 의미를 오해했는지 메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말을 좀 잘못한 거 같은데….”
“메리.”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자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메리는 긴장감 있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앞에서 소희가 씩 웃어 보였다.
“우리, 오랜만에 산책이나 다녀올까?”
* * *
북새통이라더니, 그 말 그대로였다.
황성 문 앞을 기준으로 좌우에 사람들이 쫙 늘어서 있었다. 메리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 이 광경은 전보다 많이 정리된 모양새라고 했다.
기사들이 중앙 쪽으로 사람들이 들어서지 못하게 통제 중이었고, 곧이어 화려한 마차가 줄지어 들어섰다. 그 마차에서 한껏 차려입은 귀족들이 내렸다.
이 세계에 발을 들인 뒤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을 구경하기는 처음이었다. 얼마 전에 엔드로 가문에서 치렀던 약혼식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더는 황실 사람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아리아드는 그저 한 명의 구경꾼으로 전락하여 사람들 틈에 껴 있었다. 자신의 정체가 그 유명한 쓰레기, 아리아드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챙이 넓은 모자로 최대한 얼굴을 가린 채로 말이다.
얼마 뒤, 황성 문이 열리고 매킨리 황실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등장에 다시 주변은 시끄러워졌다.
황족을 보겠다며 뒤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를 밀고 난리가 났는데, 그 틈에 껴 있던 소희는 난데없이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몸이 이대로 펑 터져서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휴, 잠시만. 잠시만. 밀지 말아 봐요.”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오는 틈으로 소희의 슬픈 언성이 묻혀 사라졌다.
“어우, 아리아드 님!”
곁에 함께 있던 메리도 짧은 탄성을 뱉고는 인파 속에 떠내려갔다.
가볍게 다니엘 매킨리의 외양이나 확인할 겸 산책을 나왔다가 압사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다며 메리가 말릴 때 포기할 것을. 소희는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후회 중이었다.
이를 꽉 물고 두 다리로 버티려 했으나 무의미한 짓이었다. 곧이어 이보다 더한 함성이 들려오며 분위기가 더 과열되었으니 말이다.
“다니엘 매킨리다!”
누군가의 고함과 함께 앞쪽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그 웅장한 소리에 맞춰 매킨리 황실의 늑대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깃발이 흔들렸다. 남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행진했고, 바로 뒤쪽에는 말을 탄 기사들이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 속에서 홀로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외양만 멀리서 확인하고 빠지려 했던 소희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일단 하얀 제복을 입은 사람이 보이긴 했지만, 문제는 정말 하얀색 제복만 보인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문제는 이곳을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겨우겨우 버티다 다리에 힘이 빠진 소희는 사람들의 힘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렸다. 가볍고 마른 몸은 종잇장처럼 쉽게 앞으로 밀려갔다. 차라리 전신에 힘을 빼고 있으니 전보다 나은 거 같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에 있던 자리보다 훨씬 앞이었다.
“…의도치 않게 개꿀인데?”
소희는 바닥난 체력을 쥐어짜 내서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더 앞쪽으로 움직였다. 그러한 노력이 빛을 발해 어느새 맨 앞자리인 황성의 문 쪽에 위치할 수 있었다.
꾹 눌러 썼던 모자를 살짝 위로 올려 이마에 흐르는 눅진한 땀을 닦아 냈다. 그리고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다니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 집중했다.
제복의 색깔과 닮은 백마가 여유롭게 움직이다가 황성 입구 쪽에 멈춰 섰다. 다니엘 매킨리로 추정되는 남자가 가벼운 움직임으로 말에서 내렸다.
소희는 시야를 방해하는 모자를 좀 더 올려 썼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다니엘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헐겁게 쓴 모자가 바람결에 날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깜짝 놀라 다급히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공중에 떠오른 노란색 프릴이 달린 모자는 넓은 챙을 날개 삼아 멀리 날아간 뒤였다.
다니엘은 귀족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제 앞까지 날아온 모자에 걸음을 멈춰 그것을 한 손으로 가볍게 움켜잡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모자가 날아온 방향으로 향했다. 소희는 모자가 그의 손에 있다는 당혹감에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것도 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밝은 햇살 아래 눈에 띄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은 그대로 그와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다니엘의 한쪽 눈썹이 크게 치켜 올라갔다.
“아리아드 피어슨?”
그는 작게 중얼거리다가 발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니엘에게서 점차 아리아드에게로 모이고 있었고 웅성거림이 커졌다.
다니엘이 인파가 몰려 있는 앞쪽으로 걸어오자 대열을 지키기 위해 서 있던 기사가 비켜섰다. 그에 정말 단 한 걸음만을 남겨 두고 남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창백한 낯에 더 도드라져 보이는 적갈색 눈동자, 쫙 찢어진 얇은 눈, 그 왼쪽 눈매 위에 자리한 희미한 영광의 흉터.
외양은 아주 확실하게 확인한 셈이었다. 문제는 그를 피하고자 얼굴만 확인하려 했던 일로 인해 그를 가깝게 대면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지만.
그는 햇볕 아래 더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웃었다. 그에 얇은 눈매 위에 자리한 흉터가 일그러져 보였다.
“일 년만인가. 그런데 당신, 꼴이 말이 아니네.”
바로 앞에서 키득거리는 비웃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