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3
창문에 달린 하얀 시폰 커튼이 바람결을 따라 흔들렸다. 그 틈으로 정오의 쨍한 햇살이 길게 드리웠다. 이내 빛줄기가 눈가에 와 닿자 소희가 미간을 설핏 구기며 눈을 떴다.
푹신한 침대 위였다. 그리고 옆에는 하룻밤을 함께 보낸 남자가 팔을 괸 채 누워 있었다. 과거와 비슷한 장면 같지만, 각자의 속내는 완전히 다른 오늘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것인지 깨자마자 꼼짝없이 붉은 눈망울을 마주했다. 어젯밤, 어둠 속에서 사납게 느껴졌던 얼굴은 따스한 햇볕으로 인해 나른해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적막만이 흘렀다. 곧이어 맑은 새소리와 함께 조슈아의 기다랗고 단단한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느릿한 손길이 얇은 슬립 목둘레에 닿았다. 그에 소희는 팔다리를 우그려 몸을 작게 움츠렸다.
기절하듯 잠이 들기 전, 저 큼지막한 손이 제 몸에 저질렀던 엄청난 일들을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나, 더는 못해.”
입 밖으로 잔뜩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몸을 한껏 웅크리며 그의 손길을 피하려 하자 기다란 검지가 난데없이 소희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아니, 아리아드. 땀을 닦아 주려는 거야.”
그제서야 소희는 제 온몸이 식은땀으로 가득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마에 눅진한 땀이 배어 잔머리가 잔뜩 들러붙고, 얇은 슬립 원피스가 젖어 등 뒤에 철썩 붙어 있었다.
잔뜩 무리한 탓에 단순한 감기가 심각한 병으로 발전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창 너머로 들어오는 따스한 여름 바람 때문에 한기를 느낄 수는 없는 거니까.
“몸이 안 좋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조슈아는 그리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슬립 원피스의 끈을 내렸다. 몸이 납덩이 같아 반항할 기운도 없었다. 원피스가 그대로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소희는 그저 작게 대꾸했다.
“그만하자고 분명 말했던 거 같은데.”
“몸이 안 좋다는 말은 안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상한 논리에 밀려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에 조슈아는 트레이 위에 놓인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나신을 천천히 훑어 내린 남자는 젖어 있는 이마 쪽으로 먼저 손을 뻗었다. 차가운 물수건이 닿자 열 기운으로 빙글빙글 돌던 머리가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소희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 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몸이 안 좋다고 했으면 그만할 거였어?”
“글쎄.”
역시, 어차피 제 건강은 안중에도 없이 욕구에만 충실했던 주제에. 못마땅한 마음에 소희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뒤잇는 감각에 그대로 몸을 굳혔다.
이마에 닿아 있던 부드러운 움직임이 목의 살결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어젯밤의 잔재로 살결에는 여전히 홧홧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물수건이 피부 위에 스칠 때마다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소희는 애써 그런 모습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도 간질거려 참을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꽤 오랜 시간 뒤에, 발끝에서 제 할 일을 끝낸 손길이 멎었다.
조슈아는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 어떠한 움직임도, 말도 없이. 당혹감 때문에 눈을 질끈 감은 터라 소희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문득 궁금증이 일어 눈을 살짝 열었을 때였다.
“불가능했겠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그에 대한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발끝에 있던 조슈아가 순식간에 소희의 시야 내로 올라왔다. 묵직한 몸이 순백의 나신 위를 내리눌렀다. 그렇게 그녀는 두 팔 사이에 갇힌 채였다.
이내 맥이 풀린 웃음소리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픈 걸 알아도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걸 보면.”
소희는 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망울 하나에도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변화했다. 찬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낸 행동이 소용없게 전신에 다시 식은땀이 흐르며 심각한 열감이 이는 듯했다.
새까맣던 하늘에 여명이 강하게 밝아 올 때까지 행위는 쉼 없이 이어졌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성에 차지 않는지 자신을 내려 보는 눈동자에는 여전히 짙은 욕정이 묻어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들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마주 봤다. 소희는 그러한 고요 속에서 생각했다. 애써 땀에 젖은 몸을 다정하게 닦아 주는 행동도 욕정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고.
그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을 때면 전처럼 헷갈리다가도 제 머릿속에 울리는 서늘한 언성 하나에 망상에는 금방 제동이 걸렸다.
‘내가 정말 널 아꼈다면, 더러운 창고에서 널 이런 식으로 갖진 않겠지.’
그래, 아리아드의 몸이 그 정도로 끝내준다는 거겠지.
소희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괜히 이 몸 하나로 모든 남자를 애태웠겠냐며 그리 단순하게 인정해 버리는 것이 차라리 한결 편안했다.
위에서 소희를 내려 보던 조슈아가 불쑥 팔을 움직였다. 이마에 닿은 손가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는 잔머리를 정리해 나갔다. 어찌나 부드러운지 간지럽기까지 한 움직임이었다.
소희는 숨을 가늘게 내쉬며 쓸데없이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고 되뇌었다. 그래 봐야 자신만 더 상처받을 테니까 말이다.
몇 분 뒤,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소희를 괴롭히던 상냥한 손길이 멎었다.
조슈아는 발아래 구겨져 있던 이불을 끌어 올려 새하얀 나신 위에 꽁꽁 둘러 주고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방문을 열자 메리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는 허리를 숙였다.
“저하, 황후 폐하께서 지금 당장 황궁으로 들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 * *
장내에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유명한 연주자를 초청한 자리였다.
그 무대를 즐기는 관객은 딱 두 명이었다. 비앙카와 조슈아.
원형 테이블 위에 놓인 센터피스를 사이에 두고 그들은 앉아 있었다. 감미로운 선율을 감상하는 비앙카의 고개가 완벽하게 단상 쪽을 향해 있었다. 조슈아를 완전히 외면하는 모양새였다.
한참 동안 그러한 행동이 지속되자 조슈아가 먼저 서두를 뗐다.
“같이 여유롭게 연주나 듣자고 부르신 건 아니실 테니, 용건을 말씀해 주시죠.”
그제야 비앙카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여태 일없이 별채에 있었다고 그러던데 그렇게 급할 게 뭐가 있니. 천천히 연주를 즐기자꾸나.”
딱딱하게 굳은 눈매를 보고는 그녀는 말을 뒤이었다.
“꼭 거기에 중요한 걸 두고 온 사람처럼 낯이 말이 아니구나.”
“다 알고 계시면서 빙빙 돌려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건방 떨지 마, 조슈아 매킨리.”
그리 말하는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눈매는 더없이 날카로웠다. 그런 매서운 분위기에서도 조슈아는 태연자약하게 답했다.
“폐하께서 무슨 명을 내리신다고 해도 제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싫습니다. 아리아드를 데리고 있을 겁니다.”
애써 미소를 그리던 비앙카의 입매가 내려앉고 여유롭던 자태가 깨졌다.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찻잔을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뒤잇는 말이 낮게 깔려 있었다.
“조슈아, 네 부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게 좋을 거야. 한순간의 충동으로 모든 걸 잃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이번에는 조슈아의 고개가 연주자가 있는 단상 쪽으로 돌아갔다. 도드라진 날카로운 턱선을 바라보며 비앙카는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억지로 분노를 내리눌렀지만 잔을 쥔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여자를 그렇게 챙기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딱히 궁금하지 않은 질문을 예의상 던지듯 심드렁한 언성이었다. 이는 분명 그녀의 신경을 긁기 위한 말이 분명했다.
“아, 폐하께서도 불운한 과거가 있으셨으니 그 여자에게 충분히 마음 쓰일 순 있겠네요. 그 생각을 못 했습니다.”
조슈아는 그 말을 끝으로 피식거렸다.
감미로운 선율 같은 목소리가 비앙카의 화기를 치솟게 했다. 황태자비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는 여자를 그저 동정심으로 올려 둔 것이 아니냐는 빈정거림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그녀는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잔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사방으로 퍼진 유리 파편 중 하나가 조슈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얀 피부 위에 희미한 상처가 생겨나고 아릿한 감각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는 무심하게 상처가 난 부분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내리는 게 전부였다.
그저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그 옆 모습에 비앙카는 기가 막혀 실소를 하였다.
“너에게 실망이 크구나. 이렇게 이성적이지 못하단 걸 진즉 알았다면 그 자리는 너의 것이 아니었겠지.”
비앙카의 언성이 전보다 높아졌다. 그녀는 더 이상 분노를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다.
조슈아가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칼날같이 예리한 두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서로를 벨 듯 날카로웠다.
“송구스럽게도, 이 자리가 폐하께서 주신 자리라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스스로 쌓아 올린 것이지.”
“그래? 그렇다면 앞으로의 난관도 혼자 잘 헤쳐 나갔으면 좋겠구나.”
그의 앞으로 비앙카가 일간지를 던졌다.
조슈아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다니엘 매킨리가 활짝 웃고 있는 흑백 사진이었다. 그리고 큼지막한 헤드라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다니엘 매킨리, 일 년의 대장정 끝에 드디어 몬트롤 지역에 승리의 깃발을 꽂다.]
비앙카는 연주자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멈추라 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슬 푸른 눈빛으로 조슈아를 내려 보며 한껏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마지막 말을 건넸다.
“앞으로도 그 자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아주 잘 지켜 내길 바란다.”
조슈아는 기민한 머리와 정확한 상황 판단 능력으로 주변 정세를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전쟁에서 다니엘 매킨리의 승리가 점쳐지자, 평소 자신을 안 좋게 보던 세력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는 걸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리아드를 곁에 두는 건 심지에 불을 붙인 폭탄을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존재 자체가 그의 커다란 약점이 되어 버릴 테니.
또 황후마저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 버렸다. 제 선택들은 복잡하게 흘러가는 정세 속에서 완벽하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방향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딱 한 가지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