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2
어둠 속에서 끝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러한 짙은 암흑에서 초래된 불안감은 점차 사람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켈리는 자신이 돌이킬 수도 없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려 멈추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무작정 걸어야만 했다.
그저 까마득하기만 했던 시야 아래로 질척한 수렁까지 생긴 건 남자의 사나운 눈길을 받은 뒤부터였다.
“예전에 아리아드를 위험하게 만들었던 걸 보고도 눈감아 줬으면 됐잖아.”
모든 걸 다 알고 있던 그는.
“이번에는 그 여자의 아이를 죽였어?”
그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아리아드까지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니, 이제 진정 모든 게 끝나 버린 게 분명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갇혀 허우적거리다가 곧 그대로 잠겨 질식할 것만 같았다.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왔으니 되돌릴 방법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차갑게 돌아서는 그를 붙잡고 빌고 싶었다. 날 버리지 말아 달라고. 이대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죽고 싶진 않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매서운 표정을 한 남자가 이런 부탁을 쉬이 들어줄 리 없다는 건 잘 알았다. 그래서 켈리는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알아도 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뿐이었다.
매킨리 황실의 핏줄을 갖는 것. 슬프게도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그뿐이라고 여겨졌다.
“…아이를, 아이를 가져야 해.”
같은 말을 반복하며 중얼거리던 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백지장처럼 하얘진 머리에서 마땅히 좋은 수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시종에게 독한 양주를 구해 오라 명했고 켈리는 그걸 받자마자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곧이어 위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제 앞에 놓여 있는 절망적인 상황보다 더한 고통은 없었으니까.
켈리는 술기운이 올라 비치적거리는 두 다리를 이끌고 방문을 나섰다.
술에 취해 벌이는 미친 짓이었다. 미친 짓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턱대고 그의 방으로 찾아갈 수는 없는 거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잘못들을 끊임없이 타인에게로 돌렸다.
모두 다 아리아드 피어슨 때문이야.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진 건, 모두 다 그 여자 때문이야.
그리 되뇌어야만 느닷없이 턱턱 막혀 오는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야만 이 모든 행동들이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른 아침, 남자의 침실이 있는 복도에는 적막이 흘렀다.
침실의 커다란 문 앞에 선 얇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떨림은 곧이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켈리는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침대 위에 장신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켈리가 그에게 빠르게 다가섰다. 술 때문에 기억이 끊긴 것인지, 그저 잊고 싶어 빠르게 지워 버린 것인지, 그 뒤에 일은 뇌리에 희미하게 자리했다.
번뜩 정신이 든 것은 사나운 언성이 귓전을 스쳤을 때였다.
“뭐 하는…!”
거칠게 밀린 몸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둔부가 대리석 바닥에 강하게 부딪히며 아릿한 감각이 뒤따랐다. 그에 입 밖으로 신음이 흘러나오는 대신 눈물이 떨어졌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야.”
“…아이를 갖고 싶어요.”
엉켜가는 모든 것들.
“저하께는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하룻밤만요, 딱 하룻밤만 저에게 내어 주세요.”
결코 복구되지 못할 지난날과 암담하기만 한 칠흑빛 미래들이.
“아이만 갖게 해 주세요. 마음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제발요.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잖아요.”
그제야 그러한 자신의 처지가 눈에 선연히 들어왔다.
그저 남자의 사랑만을 바란다고 읊조렸던 순수한 사랑이 빛에 바래 희미해졌다. 진정한 목표는 변색되어 사라지고 이제는 깊은 수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몸부림칠수록 잠겨 오는 늪인 줄도 모르고.
남자가 매정히 돌아서고 차가운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이 문을 나가면 이대로 모든 게 끝나 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끝낼 순 없었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매달렸다.
나를 가엾게 여겨 주어 이 깊은 수렁 속에서 꺼내 주길….
“…도와주세요. 저는 아이를 가져야 해요. 제발요.”
눈물을 머금어 우물거리는 말소리가 흐릿하게 번져 갔다. 그에 남자가 천천히 뒤돌았다. 자신을 직시하는 붉은 눈망울에 깊은 분노가 묻어 있었다.
이어지는 대꾸는 또렷했다.
“적당히 해.”
똑똑히 머릿속에 새겨 넣으라는 듯한 마지막 말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진짜 죽여 버리기 전에.”
그는 팔에 닿아 있는 켈리의 손을 가볍게 잡아서 떨쳐 냈다. 남자가 고개를 빠르게 돌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와 닿던 얼음 파편 같은 눈빛이 사라지자 켈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게 끝났다. 모든 게.
유일하게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남자는 떠나가고야 말았다. 켈리는 쉼 없이 눈물이 흐르는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갖은 질타를 견뎌 내며 여기까지 어떻게 힘들게 올라왔는데.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비웃던 과거의 모습으로 전락할 수는 없었다.
과호흡이 와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살길을 찾으려 궁리하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조슈아가 아닌,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
거칠던 호흡이 멎고 켈리는 고개를 들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켜 발길을 내디뎠다.
깊은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내 줄 사람이 존재했다. 조슈아만큼이나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아득하기만 했던 칠흑빛 미래에 빛이 조금 드리우는 듯했다. 그 희미한 빛줄기 하나를 찾아 켈리의 발걸음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황태자궁을 벗어나 마차에 오르고, 또 거대한 궁의 입구에 도착해 매킨리 황실의 문양이 수놓아진 거대하고 화려한 문 앞에 다다르기까지. 그 기나긴 일련의 과정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문이 열리고 윙체어에 앉아 있는 여자가 보였다. 이제 그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어 줄, 비앙카 매킨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켈리를 보고는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눈물 자국이 진하게 자리한 얼굴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켈리는 목이 잔뜩 메어와 어렵사리 제 용건을 뱉을 수 있었다.
“…도와주세요.”
처량한 가락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 *
비앙카는 요즘 반복해서 챙겨 보는 일간지의 기사가 있었다. 라트베아로 돌아온 아리아드의 소식을 듣고 매일 같이 얹힌 듯 속이 더부룩했었으나, 이 기사 하나에 만병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엔드로 가문의 자제와 약혼식이 결렬되었던 날 아리아드 소식이 담긴 기사였다. 갖은 억측과 진실이 이리저리 뒤섞인 기사.
자신을 따르던 페트린 후작 부인이 함께 오명을 뒤집어쓴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아리아드가 재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모습을 보면 속이 다 시원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기특하기도 하지. 어떻게 저기서 저 이야기를 퍼트릴 생각을 했을까.
비앙카의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자리했다. 들고 있던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놓은 그녀가 윙체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엊그제 들었던 악단의 음악이 떠오르자 그것을 따라 낮게 흥얼거렸다.
얼마 뒤, 노크 소리가 울렸다.
“폐하, 접니다. 조슈아 님의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들어오게.”
이틀 전, 비앙카는 켈리의 이야기를 듣고 조슈아의 곁에 사람을 붙였다. 횡설수설하던 아이는 계속해서 울며 도와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간혹가다 조슈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가 자신을 버렸다고 말하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도움을 청했다. 진정하고 차분하게 말하라는 언성에도 켈리는 정신없이 제 할 말만 뱉어 냈다.
찰나의 불안감이 엄습하자 비앙카는 빠르게 움직였다. 조슈아의 소식이 제 불안감을 피해 가길 바랐다.
“저하께서는 삼 일째 별채에 머물고 계십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늦은 새벽에 별채로 가 혼자 술을 드시고 나오시는 듯했습니다.”
별일 아닌 이야기에 비앙카의 고개가 느릿하게 까딱거렸다. 그 앞에서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망설였다. 자신이 본 광경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단어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이내 붉은 눈동자가 와 닿아 뒷말을 재촉하자 그는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제는 아리아드 님과 함께 계시는 걸 목격했습니다.”
“…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비앙카의 흐릿한 물음이 뒤따랐다. 그에 남자는 사족을 떼어 내고 결론부터 빠르게 뱉었다.
“아리아드 님이 별채에 머물고 계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