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
도수 높은 양주를 들이붓고 나서야 별채로 향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서류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하얀 종이 위에 보였던 건 그녀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곁에서 내 마음이 완전히 떠나는 걸 지켜봐. 너에 대한 감정이 모두 사라지면, 그 후에는 떠나도 좋아.”
최대한 무심한 척.
“그때 네가 갈 곳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모질고 차갑게 뱉어 내도 마음 한구석에는 진실 된 말들이 메아리쳤다.
떠나지 마.
떠나지 마.
제발 떠나지 마….
태연스럽게 굴어도 불쑥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기란 쉽지 않았다. 어느 한 기점을 시작으로 제 인내심은 완전히 바닥나 버렸다.
꿈결에 봤던 연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제 손등 위로 불쑥 따스한 온기가 와 닿았다.
그러자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에 금이 가고 본연의 모습이 드러났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렸다. 그래서 손등 위에 올라온 따뜻하고 작은 손을 거칠게 떨쳐 낼 수밖에 없었다.
이 온기 하나에도 머릿속에는 온갖 잡다한 더러운 생각들이 들어찬다는 걸 이 여자는 결단코 알지 못하겠지.
“안 되겠다. 술맛이 떨어졌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욕망에 사로잡혀 그릇된 일을 벌이기 전에 이게 최선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현관 쪽으로 두 다리를 움직였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뒤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슈아는 다급하게 발길을 돌려 부엌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고 있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사실 술을 건넸던 건 비록 잠든 모습일지라도 이 여인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다는 불순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기분이라면 말이 완전히 달라졌다. 잠이 들어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탐하는 정말 불온한 짓을 저질러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낮은 한숨과 함께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는 여자를 감싸 안아 들어 올렸다. 힘없이 축 늘어진 여체에서 바라 왔던 온기가 느껴졌다.
침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점차 느릿해졌다. 안고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온몸에는 나른한 충족감이 퍼져 나갔다.
침실에 들어서서도 한참 동안 그녀를 안아 들고 서성이다가, 불쑥 더한 욕심이 머리를 들이밀자 그제서야 침대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실내용 슬리퍼가 벗겨지며 발아래 자잘한 붉은 흉터가 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시선을 천천히 올리자 무릎 언저리에도 관리되지 못한 흉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같이 뽀얀 피부인지라 흉터들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무릎에 있는 흉터는 산에서 도망치다가 엎어져서 생긴 것일 테고, 엉망이 된 발은 왜 이런 것일까.
조슈아는 서랍에서 연고를 찾아 짙은 상흔 위에 펴 발랐다. 제 할 일을 다 끝낸 그의 손가락이 여전히 그 자국들을 따라 천천히 선회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손끝이 그녀의 허벅지까지 올라가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흉터가 자리한 곳도 아니었는데.
이제 그만.
어렵사리 떼어 낸 손길과 함께 목울대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욕망이 자리한 마음속 공간에 빗장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날수록, 술을 먹는 양이 늘어났다. 잔뜩 취해 정신을 놓고 술기운에 의지해 보아도 열려 버린 공간의 작은 틈은 닫힐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술에 취해 매일 같이 별채를 찾아가고, 매일 같이 그녀를 찾았다. 자신을 피해 어디론가 도망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가 났고, 이대로 또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닌지 애가 탔다.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까맣게 타들어 가 버린 이성으로는 그것을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그는 폭우를 맞으며 그녀를 찾아 별채 주변을 방황했다.
그러다 무작정 창고의 문을 열게 되고.
“여기서 대체 뭐 해.”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하자 마음속 빗장이 밀려 작았던 틈새가 벌어졌다. 곧이어 완전한 제 욕망이 드러났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너를.
* * *
드레스가 커다란 손에 의해 손쉽게 벗겨졌다. 뒤잇는 아찔한 감각에 소희의 몸이 뒤틀리자 발끝에 겨우 매달려 있던 옷이 테이블 아래로 툭 떨어졌다.
진한 입맞춤을 끝낸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욕망이 짙게 드리운 붉은 눈망울이 번득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나신을 느릿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피부 위로 스며들어 뽀얀 살결이 더욱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조각상이 놓여 있는 듯했다. 욕구가 잔뜩 치밀어 올라 주체할 수 없음에도 잠시 넋 놓고 보게 될 정도로 아름다운 몸이었다.
그 뜨거운 눈초리에 소희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리 웅크린 채로 애써 벌거벗은 몸을 두 손으로 가렸으나 역부족이었다.
조슈아는 제 몸을 가리고자 용쓰는 작은 손을 가볍게 잡아 올려 고정시켰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고개를 숙여 봉긋하게 솟은 살결을 물었다.
“아…!”
입술이 속절없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뜨거운 한숨이 튀어나왔다. 잔뜩 참다 터트린 신음이 남자를 더욱 자극했는지 움직임이 매우 거칠어졌다. 뒤잇는 강렬한 쾌감에 저절로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새하얀 눈길 위에 붉은 흔적이 새겨지고 있었다. 조슈아는 집요하게 모든 살결을 빨아들여 제 흔적을 남겨 두었다. 상체를 괴롭히던 말캉한 입술이 점차 아래로 향하자 소희는 흐트러진 숨결을 겨우 가다듬는 와중에도 다리를 좁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매서운 완력에 의해 다시 활짝 벌어지고 말았다.
조슈아는 그녀의 두 다리를 고정시킨 채로 새하얀 달빛에 비친 나체를 또 가만히 응시했다. 보얗던 살결이 부끄러움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르는 것조차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은 소희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지러움으로 인해 말이 더듬더듬 느릿하게 이어졌다.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면서…. 대체 어떻게 이래.”
소희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욕정이라고 하기엔 자신에게 와 닿는 시선과 손길은 너무 따뜻하고도 뜨거웠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또 괜한 미련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뒤잇는 말은 그것이 그저 망상에 불과하다는 듯 차갑기만 했다.
“아리아드, 마음이 완전히 떠났으니 이런 짓이 가능한 거야.”
“…뭐?”
“네 의사는 상관없이, 그저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그는 입매를 부드럽게 휘어 올려 웃었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탐스럽게 반짝거렸다. 들려오는 메마른 언성과는 다른 참으로 달콤한 미소였다.
“내가 정말 널 아꼈다면, 더러운 창고에서 널 이런 식으로 갖진 않겠지.”
이어지는 아찔한 감각에 소희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자극이 강한 지점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던 손이 멈추고 그는 제 바지 버클을 풀었다.
달아오른 몸과는 달리 두 손은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냈다. 저런 말을 들으며 관계를 지속하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 남은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저보다 두 배는 커다란 남자가 가냘픈 팔 힘으로 밀릴 리 없었다. 그의 묵직한 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밀한 점막 안으로 들어섰다. 거친 움직임 한 번에 파드닥 떨리던 소희의 전신이 축 늘어졌다.
“아파, 조슈아. 그만….”
흐릿하게 끊긴 말이 신음으로 바뀌어 터져 나왔다. 이어지는 행위에 아랫배가 빠듯하게 조여 오며 타들어 가는 듯했다. 고통은 강렬한 쾌감이 되어 눈앞에 섬광을 터트렸다.
맹렬한 몸짓을 따라오지 못해 허덕이는 여체를 커다란 손이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리고 조슈아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 쪽으로 얼굴을 내렸다. 귓가에 달뜬 숨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이제 와서 멈출 수 있을 리 없잖아.”
목울대를 잔뜩 긁고 나온 목소리가 나직하고 거칠었다. 그 습하고 더운 숨결이 귓속을 간지럽히자 소희는 몸을 잘게 떨었다.
조슈아는 잔뜩 흥분에 젖어 격렬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자신이 이끄는 대로 쉼 없이 흔들리는 뇌쇄적인 여자를 두 눈에 고스란히 담았다. 달아오른 전신이 도무지 식지 못할 관능적인 모양새였다.
그가 꾼 꿈은 현실이 되었다. 비록 자신을 유혹하며 웃고 있진 않더라도. 그럼에도 이토록 좋으니 이 현실은 꿈과 유사하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이 여자를 갖는 법은 쉬웠다.
조급하고 초조한 모습은 드러내 보이지 말 것, 겉은 여유로움과 차가움으로 무장할 것, 망가뜨려 강제로 취할 것.
관계에 우위를 점하는 법은 이토록 쉬웠는데.
조슈아는 환희에 찬 미소를 그리며 몽롱하게 풀린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반짝이는 빨간 입술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