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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80화 (80/120)

Chapter 80

맹렬한 기운에 테이블 위에 앉아 있는 몸이 자꾸만 뒤로 쏠렸다. 하지만 곧 조슈아의 두 팔이 상체를 단단하게 감싸 안아 지탱했다.

혀가 얽힌 틈으로 씁쓸한 피 맛과 달콤한 과일주 맛이 감돌았다. 소희는 그의 입안에 아직껏 머물러 있는 진한 알코올 향으로 인해 자신도 점점 취해 가는 듯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친데 달콤한, 참으로 모순적인 입맞춤이었다.

어느덧 소희는 몽롱하게 풀린 눈을 서서히 감고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엉켜 드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마저도 좋았다. 어렵사리 제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 끊임없는 갈망이 일어 그를 감싸 안은 두 팔에 힘이 실렸다.

뒤에 자리하고 있던 조슈아의 손도 점차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의 오른손은 목덜미를 쓸고 지나 그녀의 귓불까지 닿았다.

얼마 안 가 입술이 떨어졌다. 귓불을 간지럽히던 기다란 손끝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매 쪽으로 와 그것을 가볍게 쓸어 닦아 냈다. 곧이어 그 손가락은 백옥같은 뺨 위에 자리한 홍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까만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새하얗고 곧은 콧잔등 위로 툭 떨어졌다. 갑작스레 차가운 감각이 느껴지자 소희는 몸을 잘게 떨었다. 미세한 감촉에도 온몸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묘한 침묵 사이로 빗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얽혀 든 시선과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습한 숨결에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뛰어 댔다.

짙은 욕망으로 점철된 붉은 눈망울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불현듯 며칠 전의 장면이 떠올랐다. 저 눈동자가 사실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생각에 휩싸이기 시작하니 달아올랐던 전신이 서서히 차갑게 식어 갔다. 또 이성은 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래서 소희는 결국 속으로만 되뇌던 이야기를 꺼내 놓고야 말았다.

“너, 혹시… 켈리랑 잤어?”

뺨 위를 천천히 쓰다듬던 움직임이 멎었다. 이내 바로 앞에 놓인 남자의 얼굴이 비스듬히 내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소희는 아니라는 답만 바라며 굳게 닫힌 붉은빛 입술만 빤히 바라봤다. 그러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고 뒤잇는 말은 원하던 답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그게 중요해?”

조슈아는 대뜸 다시 질문했다. 맞다, 아니다, 그 둘 중 하나의 대답을 기다리던 소희는 문득 허탈해졌다. 맞든 아니든 그게 대체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듯해서.

그럼에도 소희는 꿋꿋하게 대답했다.

“응.”

대체 왜, 그러한 간결한 의문도 없이 난데없게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묘하게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 또한.

그 짤막한 대답 하나만으로 깊어진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린 거 같았다. 하지만 조슈아는 그에 성실하게 응해 줄 의무가 없다는 듯이 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그는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왔다. 곧 욕망에 사로잡힌 듯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가 가까워지고 입술이 뭉개졌다.

머릿속을 어지럽게 더럽히던 잡념이 뜨거운 입맞춤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소희의 눈꺼풀은 자연스럽게 천천히 감기고 있었다.

선명해지는 열감으로 인해 창고 안을 메우던 한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커다란 손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에 소희는 점차 뒤로 쏠리다가 결국 테이블 위에 눕고 말았다.

그 위에 있던 공구들이 밀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조슈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물기가 있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쓸고 내려가다 이내 얇은 드레스에 닿았다.

입술이 살짝 벌어진 틈으로 달뜬 숨이 오갔다. 의식하지 못한 새에 드레스는 점차 내려가 새하얀 살결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진 것들은 맨정신으로는 못 할 미친 짓이 분명했다.

* * *

조슈아는 인정했다. 자신이 지금 단단히 취해 있음을.

정신을 이리 흐트러트리는 것은 단순히 술기운만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시야와 짙은 라벤더 향기. 들끓던 마음이 넘치며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건 앞에 있는 여인의 향기 때문이라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처럼 구는 제 모습이 최악이라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에 고개를 파묻고 있으면 이보다 더한 쾌락은 없었기에 멈출 수 없었다.

차라리 애초에 맛보지 않았다면 이토록 온몸이 닳지도 않았을 텐데. 거친 숨을 뱉으며 그렇게 그는 자조했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이 여자는 제 삶에 떼어 놓기 힘들 정도로 깊은 갈망의 대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리아드도 자신을 원했다. 그것이 조슈아를 더 미치게 했다.

“너, 혹시… 켈리랑 잤어?”

조심스럽게 건넸던 질문의 저의를 파악하기는 쉬웠다. 한참 동안 가냘프게 떨리던 보랏빛 동공은 부정의 답이 나오길 갈구하고 있었다.

아마 더는 갖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니 이제야 욕심이 나는가 보지. 그리 생각하니 입 밖으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니어도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가 또다시 손에 쥔 물고기가 되어 버리면 그녀는 또 쉬이 떠나 버릴 테니까.

무작정 버리지 말아 달라며 매달리는 태도로 더는 이 여자를 붙들고 있지 못한다는 걸 알아 버렸다. 마음은 적당히 주고, 나도 적당히 받는 걸로. 그걸로 이 여자가 애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인 밀고 당기기였다.

조슈아는 이제야 이 여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문득 그녀를 별채로 불러 놓고도 어찌해야 할지 아득해져 직접 찾아가지 못했던 며칠 전 제 모습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 여자를 갖는 건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는데 말이다.

* * *

아리아드를 별채로 부른 날, 그날 밤 꿈에는 그녀가 나왔다. 제 욕구가 철저하게 반영된 꿈이었다.

새하얀 나신의 여자가 제 품에 안겨 있었다.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면서 고혹적인 연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고 곧이어 그녀는 눈꼬리를 접어 웃어 보였다. 작열하는 태양을 본 듯이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환한 미소였다.

멍청히 바라만 보고 있자 그녀의 손끝이 턱 끝에 와 닿았다. 그 턱선을 타고 내려가는 손길에 호흡이 점차 가늘어졌다. 문득 정신이 든 건 새하얀 나신이 제 몸 위에 올라타 셔츠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할 때였다.

서툴렀던 실제의 손길과는 다르게 자극되는 지점을 예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에 입 밖으로 나직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를 감싸 안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가위에 눌린 듯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리아드….”

흥분에 사로잡힌 언성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그런 그를 보며 여자가 고개를 들어 다시 웃어 보이더니 순식간에 입을 맞춰 왔다.

문득 무언가가 기이하게 느껴진 것은 그 순간부터였다. 자신의 입안을 헤집고 폐부를 채우는 그 향기는 바라 왔던 것이 아니었다. 그걸 깨닫자 전신에 감돌던 격양된 감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움직일 수 없었던 손끝이 접히고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리고 조슈아는 눈을 번쩍 떠 꿈에서 깨어났다.

꿈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그의 몸 위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으니까. 나체인 그의 상반신을 더듬으며 어설프게 입을 맞추고 있는 여자가.

조슈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꿈속에서 제 몸을 달궜던 흥분감은 순식간에 불쾌감으로 뒤바뀌었다.

“뭐 하는…!”

그는 거칠게 제 위에 올라가 있던 몸을 밀었다. 그나마 머리채를 잡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신사적인 태도였다.

몸이 밀린 여자가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쿵, 그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금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인 모양새가 처연했다.

조슈아가 협탁 위에 놓인 샤워 가운을 하체에 천천히 두르고는 그런 여자를 내려 봤다. 여전히 남아 있는 불쾌감으로 인해 짙은 눈썹이 한껏 좁혀 들어 있었다.

그는 축축한 입매를 거칠게 닦아 냈다. 입안에서 술의 씁쓰레한 향이 맴돌았다. 이 여자가 마신 술 때문인 게 분명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야.”

짓씹듯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정수리만 보이던 머리가 서서히 들려 올라왔다. 풀린 동공과 눈시울에 맺힌 눈물방울. 금빛 속눈썹이 천천히 감겼다가 떠지면서 굵은 눈물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이를 갖고 싶어요.”

가냘프게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겨우 뱉어 낸 그 말이 어찌나 황당하던지. 조슈아는 기가 막혀 잠시 말을 잃었다. 그 앞에서 켈리는 끝없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왔다.

“저하께는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하룻밤만요, 딱 하룻밤만 저에게 내어 주세요.”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웅얼거렸다. 마치 정신을 완전히 놓은 미친 사람처럼.

조슈아는 제 한쪽 머리를 붙잡고 눈매를 찡그렸다. 일순 날카로운 이명이 귓전을 할퀴며 두통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나가.”

많은 인내 끝에 겨우 곱게 뱉어 낸 말에도 밑에 주저앉은 여인은 굴하지 않았다.

“아이만 갖게 해 주세요. 마음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제발요.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잖아요.”

이곳에 더 있다간 자신도 미쳐 버릴 듯했다. 그래서 그는 제 침실인데도 불구하고 급하게 방을 빠져나오려 발길을 움직였다.

켈리는 그런 그의 뒤를 쫓았다. 팔을 잡고 뿌리치며 전과 다를 것 없는 머리 아픈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무슨 대화를 했더라. 글쎄,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도망치듯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는 사실 외에는.

꿈속에서는 아리아드로 인해 황홀경에 빠졌다가 현실에서는 진창을 구르는 느낌이었다. 꿈결에 봤던 모습으로 인해 그 여자가 더 그리웠다.

그제야 다짐할 수 있었다. 술을 잔뜩 먹어서라도 오늘은 꼭 별채를 들러야겠다고. 맨정신에는 못 할 짓을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해 보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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