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9
또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두통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온몸에 선명한 열기가 돌았다. 소희는 단순히 숙취가 꽤 오래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렇게 몸이 좋지 않아 하루 종일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완벽히 개지 않아서 가끔 얇은 빗줄기가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하늘은 푸른빛이었다.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빛줄기가 호수의 잔잔한 표면 위로 떨어져 반짝거리는 물비늘을 만들었다.
그걸 낮 동안 멍하니 바라보며 어젯밤 일을 반추하다 보니 어느덧 창밖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이 되자 창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소희는 그 명확하지 않은 실루엣만 보고도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봤다.
왜 또 찾아온 것이며, 오늘은 또 무슨 차가운 말을 하려는 건지. 그러한 상념들로 순식간에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문득 술에 취해 손을 덥석 잡았던 제 만행이 떠올라 심장도 벌렁거렸다.
소희는 침대에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체중이 몇 배로 늘어난 듯 온몸이 축 처지며 무거웠지만 그럼에도 무작정 발걸음을 움직였다.
자신이 조슈아의 손을 잡았을 때, 그것을 떨쳐 내던 매서운 감각이 잊히질 않았다. 또 그때 갑작스레 일그러진 표정 또한. 그 장면들이 계속 되풀이되다 보니 이젠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겁이 났다.
급하게 방을 빠져나온 소희는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잠옷 차림이라는 것을 신경 쓸 여유도 없이 별채의 뒷문으로 뛰었다. 미안함과 두려움으로 인한 다소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소희가 별채의 뒷문을 빠져나올 때쯤 저 멀리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비바람이 얇은 드레스를 덮쳤다. 8월의 날씨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사흘째 계속되는 빗줄기는 서늘한 공기를 만들어 냈다.
“으, 추워.”
소희는 추위에 몸을 피할 곳을 찾다가 별채 옆 창고를 발견했다. 문을 열자 녹슨 여닫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뱉었다.
나무로 지어진 작은 내부 안에 각종 청소 도구와 공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밖에 비가 쏟아지고 있어서 그런지 창고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더욱이 코를 찔렀다.
소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적당히 있을 만한 자리를 찾아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머리에 맺힌 빗방울들을 털어 내며 콜록거렸다.
단순히 숙취 때문이라고 여겼던 온몸에서 느껴지는 열감의 정체를 소희는 그제야 알았다. 아무래도 며칠 전 피어슨 저택 앞에서 비를 흠뻑 맞아 감기에 걸린 듯했다.
한참을 그렇게 기침하다가 시간을 계산했다. 일단 그를 피해 도망 나오긴 했으나 언제쯤 돌아가야 좋을지 몰랐다. 지금이 자정이었으니 두 시간 정도쯤 이곳에서 버티다가 나가면 그는 황태자궁으로 돌아가 있지 않을까.
그리 결론을 내린 소희는 추위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 더는 버틸 수 없겠다 싶을 때쯤 몸을 일으켜 별채로 향했다.
“…이제 갔겠지?”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겁에 질린 눈빛으로 별채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조슈아는 없었다. 전날처럼 술을 꺼내 마신 건지 부엌 쪽 테이블 위에 반쯤 비워진 병과 유리잔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날이 하루 더 반복되었다. 또 같은 시각에 찾아온 남자와 그를 피해 도망 나온 여자.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려 날씨가 전날보다 더욱 추웠다. 아침에 메리가 만든 감기에 좋다는 음식을 챙겨 먹었지만, 추운 공간에 반복해서 오래 있던 탓인지 점차 열이 더 높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창고에서 한참을 그렇게 끙끙 앓으며 앉아 있다 보니 문득 허탈함이 몰려왔다. 차라리 이럴 거면 별채를 떠나면 될 것을. 예전처럼 물리적으로 자신을 묶어 두는 것도 없으니 의지만 있다면 곧바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외부적으로 그 아무것도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떠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소희는 왜 그런지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결국 제 욕구를 인정했다.
그의 곁에 남아 있고 싶은 마음을. 소설의 완결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머무를 수 있는 순간 그 끝까지 말이다. 또 그가 보고 싶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이 아닌, 환하게 웃는 다정한 남자가.
소희는 추위에 잘게 떨리는 어깨를 움츠린 채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푹 묻었다. 그 생각들을 어렵게 인정하고 나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정들이 차올랐다.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 서늘한 표정도 이제 더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픈 와중에도 계속해서 조슈아를 피해 도망 다닌 것은 앞으로 그와의 관계를 어찌 개선해 나가야 할지 몰라 막막한 탓이었다.
부인해 왔던 감정들이 뒤엉킨 사이로 일순 녹슨 여닫이의 날카로운 소리가 끼어들었다.
끼익.
낡은 나무 문이 열리고 문틈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앞으로 익숙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순식간에 쿰쿰한 냄새가 가득했던 창고 안으로 비릿한 비의 향과 함께 시원한 체취가 번졌다. 더불어 전보다 더 짙은 술 냄새도 함께였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에게서 소희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조슈아는 웅크리고 있는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내딛는 발길에 따라 낡은 나무 바닥이 쿵, 쿵 울렸다.
가까워질수록 그 울림은 더 크게 전달되어 그녀의 심장 소리와 자연스레 섞여 들었다. 그의 발소리인지 제 심장 박동인지 모를 정도로.
그는 바로 앞까지 다가서 그녀를 가만히 내려 봤다. 비를 맞고 돌아다닌 건지 흠뻑 젖은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여기서 대체 뭐 해.”
무심한 얼굴과 날이 서 있는 목소리. 상상으로만 그리며 두려워했던 모든 것들을 바로 앞에서 마주했다.
조슈아의 말에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직접 그를 마주하자 끝내 부인하던 당혹스러운 감정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소희는 결국 제 마지막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늘하게 닿는 붉은 눈동자. 사실은 지금 이마저 너무 좋다고.
* * *
어찌할지 몰라 방황하는 소희의 앞으로 남자는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그대로 굳어 숨죽인 채로 있자 조슈아는 되물었다.
“아리아드,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냐고 물었잖아.”
다그치는 목소리에 소희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이 남자는 별채를 계속해서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왜 이곳까지 직접 온 걸까. 심지어는 바깥을 오랫동안 이리저리 헤매어 돌아다닌 듯 비에 흠뻑 젖은 모양새로.
소희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이 정도 됐으면 그의 감정에 대해서 제멋대로 생각해도 좋은 걸까. 소희는 무정한 얼굴과는 다른 그의 행동들 때문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미련을 떨쳐 내고 싶었다.
“…너, 아직 나를 좋아해?”
“아니.”
그러자 단호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소희의 말이 끝맺음하자마자 곧바로 이어진 대답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찾아와.”
“너를 찾는 게 아니라…. 별채는 내가 원래 좋아하는 공간이야.”
조슈아는 잠시 말을 흐리는 듯하다가 급하게 덧붙였다.
“그러면 여기는 왜 왔어?”
소희는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얻어 낼 때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에게서 확고한 대답을 받아 내고 싶었다.
“여기도 네가 좋아하는 공간이야?”
한참 동안 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위에 굳게 닫힌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다물어지길 반복했다.
좁은 창문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들어와 조슈아의 눈매에 닿았다. 그에 붉은 눈망울이 더 짙은 빛을 띠는 듯했다. 그 깊어진 눈빛으로 한동안 소희를 내려 보던 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자꾸 네가 나를 피하니까 열 받아서. 그래서 찾아왔어.”
“…찾아와서 화를 내려고?”
“아니, 더 이상 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어. 내가 별채에 더는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원하는 대답이 전혀 아니었다. 실망스러운 답변에 소희는 천천히 시선을 떨궜다. 고온의 열로 인해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신발이 잘게 일렁였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나른한 말소리와 함께 그는 상체를 굽혔다. 커다란 손가락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녀의 몸에 닿았다. 이내 그는 소희를 안아 들어 공구들이 놓여 있는 작은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가 입은 하얀 와이셔츠는 축축하게 젖어 있어 소희의 얇은 잠옷까지 서서히 적셔 나갔다. 조슈아는 그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도 허리를 감은 팔을 떼지 않았다. 그저 바로 앞에서 소희를 빤히 내려 봤다.
가까이에 닿아 있으니 이제야 그의 상태가 자세히 보였다. 항상 술을 마셔도 멀쩡해 보였던 그는 지금 단단히 취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짙게 풍기는 술 냄새와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네 편의까지 봐줄 이유는 없잖아.”
또한 평소보다 더욱 느릿한 어조까지.
보통 때라면 부드럽게 흘러갔을 발음은 또박또박 각이 져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오히려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는 것이 티가 났다.
“이렇게 창고에 몰래 숨어 있을 정도로 넌 내가 불편한가 봐.”
그 질문에 이번에는 소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난감해하는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남자는 이내 입꼬리를 올려 낮게 웃었다.
“그렇다면 나야 좋지. 네가 괴로워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핏빛 눈동자에 이채가 돌더니 그는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그 장면이 느릿하게 재생되었다. 그리고 피할 겨를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이틀 전, 소희의 손길을 매섭게 뿌리치던 남자는 갑작스레 돌변했다. 정말 잔뜩 취해 버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뜨겁게 입술을 맞부딪칠 수는 없는 거니까.
열 기운으로 인한 건지 앞에 있는 남자 때문인지, 정신이 어지러이 흐트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