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8
소희는 그렇게 굳어 버렸다. 이틀을 꽉 채워 기다린 남자였지만 직접 눈앞에 나타나니 그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고요했던 공기의 흐름이 나직한 목소리 하나에 비틀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 있을래.”
그의 눈길이 아리아드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이리저리 바닥에 널브러진 보랏빛 머리카락부터 시작해서, 넘어지면서 잔뜩 말려 올라간 얇은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다리까지.
낯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고는 소희는 고통을 잊은 사람처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슈아는 수납장에서 유리잔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크리스털 유리잔에 호박색 브랜디가 채워졌다. 갑작스레 나타나 그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술을 마셨다. 소희는 나무 바닥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이는 단순히 방금 술병을 열어 나는 향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잔뜩 술을 마신 듯했다.
소희가 그 앞에 서서 물었다.
“대체 날 부른 이유가 뭐야?”
조슈아는 잔을 내리고 소희를 바라봤다. 풍겨 오는 지독한 향기와 달리 새하얀 낯이 술을 한 모금도 하지 않은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 이유를 들으려고 이틀 동안 기다렸어.”
여태 그리 초조했던 마음에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붉은 눈동자가 그런 소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뒤잇는 말이 냉소적이었다.
“겨우 이틀 가지고.”
소희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갑자기 사라진 아리아드를 기다렸을 시간을 따져 보면 자신이 초조함을 느꼈던 그 이틀은 정말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앞에서 다시 죄인이 된 듯 온몸이 위축되었다.
그러한 냉한 침묵 속에서 조슈아는 다시 느릿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아리아드, 갈 곳이 없는 사람에게 거처를 마련해 줬으면 감사 인사를 먼저 하는 게 예의가 아닐까.”
그 말에 소희의 눈이 저절로 동그래졌다. 거처라니, 갑작스레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목 끝까지 차오른 의문에 조슈아는 명확한 마침표를 찍었다.
“비 맞으며 길바닥에 나앉을 뻔한 걸 내가 데리고 왔잖아. 아무도 반기지 않는 너를.”
이로써 그가 아리아드의 곁에 사람을 붙여 놓은 게 확실해졌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없을 테니까.
왜 사람을 붙인 건지 묻고 싶었지만 소희는 그 질문은 도로 삼켜 넣었다. 어차피 말하기 난감한 것은 제대로 답해 주지 않을 걸 알아서였다.
그 대신 그가 어떤 연유로 아리아드를 이곳에 머물게 하려는지를 물었다.
“…여기서 지내라는 말이야? 대체 왜?”
조심스러운 질문에 곧바로 따라오는 대꾸는 없었다. 그는 다시 잔을 잡고 입안에 독한 술을 머금었다.
“황성 밖으로 나가라며.”
소희는 재촉하듯 되물었다.
일주일 전에 제 눈앞에서 사라지라며 냉정하게 말하던 게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그런데 조슈아는 느닷없이 자신이 뱉은 말을 번복했다.
“여기 있어, 아리아드.”
비에 살짝 젖은 앞머리를 그가 가볍게 쓸어 넘기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지. 정말 미안한 거면 여기에 있어.”
나른한 어조는 소희의 죄책감을 정확히 파고들어 들췄다.
“그리고 곁에서 내 마음이 완전히 떠나는 걸 지켜봐. 너에 대한 감정이 모두 사라지면, 그 후에는 떠나도 좋아.”
뒤이어 그가 눈을 곱게 접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맑은 미소였다.
“그때 네가 갈 곳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실상은 아리아드의 처지를 비웃는 거였지만 말이다.
분명 그가 말하는 감정이란 증오 쪽에 가까운 것들일 것이다. 미움 또한 감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니까. 그리고 그는 완벽하게 아리아드를 털어 내는 모습을 보여 주며 그녀 또한 상처받길 바라는 게 분명했다.
조슈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른 유리잔에 술을 한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소희가 그걸 멀거니 바라보자 고압적인 어조가 뒤따랐다.
“앉아. 술 마시려던 거 아니었어?”
문득 잔을 건네는 손을 보고 있노라니 소희는 과거의 일이 생각났다. 축제 기간에 음료인 줄 알고 샴페인을 들이켜는 아리아드를 위태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조슈아가. 한 모금을 채 다 넘기기도 전에 그는 다급하게 그녀가 쥔 잔을 뺏어 들었었다.
아리아드가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것을 빤히 알고도 술잔을 건네는 지금과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소희는 잔을 덥석 건네받고는 무작정 삼켜 넣었다. 도수가 꽤 높은 터라 한 모금만으로도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이어 입술에 맺힌 액체를 가볍게 닦아 내고는 말문을 열었다.
“내가 여기 머무는 게 알려지면 너한테 타격이 갈 거야.”
무작정 피어슨 저택에 쫓겨났을 때, 갈 곳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을 당연하게 받아 줄 데온에게 찾아가는 것을 망설인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처참한 이미지의 아리아드와 당연하게 뒤따를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예상 밖에 단호한 목소리였다.
“여긴 내 공간이야. 누구도 내 결정에 뭐라 할 권리는 없어.”
그러한 건 저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 있는 오만함. 한때 소희에게 심적으로 굉장한 안정감을 주었던 완벽한 울타리였다.
“이곳과 이 주변에 있는 건, 전부 내 거고.”
조슈아는 그 말을 뒤이으며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가 떴다. 커다란 눈 안에 담겨 있는 눈동자가 반짝이며 오롯이 아리아드만을 담고 있었다.
몸에 서서히 술기운이 오르는 듯했다. 소희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며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귓가에서 조금 전 그가 뱉은 말이 윙윙 맴돌았다.
전부 내 거. 전부 그의 것.
그 말 한마디에 구차하게 의미를 덧붙이고 부풀렸다. 저 눈동자 안에 담긴 여자에 대한 소유욕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술기운에 의한 착각일지도 몰랐다.
증오는 있어도 애정은 없는 게 확실하다는 그 생각이 잠시 멀어졌다. 당연시했던 제 선택에 대한 보편적인 결과를 부정하고 싶었다. 자신에 대한 감정이 증오만 남아 있을 거라는 그 당연함을.
분명 술기운 때문이었다. 식도에서부터 퍼진 열감은 이내 온몸을 지배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켰다. 소희는 갑작스레 술잔을 내려놓고 건너편에 앉은 조슈아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 뒤에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 순간, 마주한 붉은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리고 조슈아는 망설임 없이 제 손등 위에 올라온 손을 털어 냈다. 손동작만 보면 마치 벌레가 올라앉아 털어 내는 급박한 모양새였다.
그에게 튕겨 나와 테이블 위에 부딪힌 얇은 손가락들이 얼얼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소희는 충격을 받아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극도로 싫어할 일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다가 얼마 뒤에 자조가 뒤따랐다. 불과 몇 분 전에 그의 심리를 유추하며 제멋대로 했던 망상들이 우스운 탓이었다.
이러한 싸늘한 태도는 정말이지 당연했다. 더할 수 없이 큰 상처를 준 사람에게 마땅한 대우였는데. 술을 삼킨 지 오래인데도 입안 가득 씁쓸함이 퍼졌다.
조슈아는 시선을 피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 되겠다.”
“….”
“술맛이 떨어졌어.”
굵직한 한숨이 뒤이었다. 요즘 항상 그랬듯, 그는 차갑게 등을 보이고는 현관 쪽으로 걸어 나갔다. 한 치의 미련도 없어 보이는 무심한 뒷모습이었다.
소희가 바라보는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별채를 다급하게 빠져나가려는 뒷모습이 어지럽게 물결쳤다.
쿵.
이내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가 그대로 테이블 위에 꼬꾸라져 머리를 박은 탓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날의 기억은 그렇게 끝맺음 되었다.
* * *
아침이 되고 메리는 일터로 복귀했다. 정오가 다 됐음에도 일어나지 않는 아리아드를 찾으러 그녀는 침실 문을 열었다.
인기척에 소희가 눈을 가늘게 떠 문 쪽을 응시했다.
“술 한 병을 다 비우신 거예요?”
“한 병이라니. 한 모금 마시고 쓰러졌는걸.”
이 망할 몸뚱어리. 그거 한 모금 삼켜 놓고 앓아누울 정도의 숙취라니. 진정한 코미디가 아닐 수 없었다.
이불 안에서 끙끙 앓는 소희를 메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내려 봤다.
“그럼 그 많던 술은 누가 다 먹은 거래요? 테이블 위에 큰 병 하나가 비어 있던데.”
“…술병이 다 비어 있어?”
분명 자신의 기억이 끊기기 전에 병 안에는 술이 반절도 넘게 남아 있었다. 필름이 끊긴 와중에 자신이 일어나서 마신 걸까.
이 어마무시한 숙취를 보면 그러한 가정이 말이 되는 거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기에 아리아드는 술 앞에서 그 누구보다 나약한 몸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로 떠나가 버릴 거 같던 남자가 돌아와 새벽 내내 술을 몽땅 마신 것일까. 차라리 그 가정이 더 그럴듯한 것 같았다.
그런데 대체 왜?
요즘 조슈아의 행동은 항상 물음표가 뒤따르게 했다. 무정하다가도 눈동자 속에 언뜻 비치는 맹렬한 기운으로 인해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아직도 그녀에게 애정이 남아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소희는 그러한 미련에 오늘도 별채를 떠나지 못했다. 미안하면 남아 있으라는 그의 말도 발목을 붙잡긴 마찬가지였지만, 무엇보다 이곳에 남게 되는 건 제 감정 때문이었다.
문득 메리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누굴?’
‘누구긴요. 조슈아 님이죠.’
글쎄, 그에 대해서 소희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조슈아가 일방적으로 쏟아붓던 따뜻함에 현혹되어 그저 그때의 날을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