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77화 (77/120)

Chapter 77

애써 궁궐로 향한 게 무색하게도 그들은 부리나케 별채로 돌아왔다.

소희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다시 통창 너머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용히 내리던 부슬비는 어느새 굵어져 호수의 표면 위를 더욱 크게 출렁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 거센 물결을 보며 무의식중에 엄지손톱을 뜯었다. 머릿속에는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 반복 재생 되고 있었다.

소희가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웃통을 벗은 채로 제 침실에서 나오는 조슈아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얼마 안 가 뒤에서 웬 여자 하나가 따라 나왔다.

커다란 조슈아의 몸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빛나는 금발이 켈리임을 알려 주었다. 얼마 뒤에 그녀의 전신이 또렷하게 보였다. 팔과 다리가 훤히 드러난 얇은 슬립 차림이었다.

그러고 둘이 무언가 대화를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작은 대화 소리가 소희의 귀까지 전달되지는 못했다. 거리상의 이유도 있겠지만 귓속에 물이 꽉 들어찬 듯 갑작스레 먹먹해진 탓이었다.

두 사람이 재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런 장면까지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새삼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그 충격으로 현기증까지 일었다.

그 이전에 초조하게 조슈아를 기다리며 부정적인 대화를 끊임없이 그리던 머리가 다른 쪽으로 경로를 이탈했다. 소희는 갑작스레 다시 작가 모드가 되어 전보다 더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알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그려 내고 있었다.

소희는 계속해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웅얼거렸다.

“둘이 잔 걸까….”

그 말을 뱉고 보니 둘이 서로 안고 구르는 장면이 더욱 선명해졌다. 소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손톱을 더 세게 물어뜯었다. 어느새 살갗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부엌에서 토스트를 들고나온 메리는 소희의 입술에 닿아 있는 손을 잡아 내렸다. 그제야 저 먼 곳을 바라보던 연보랏빛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메리는 식탁 위에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에이, 설마 아니겠죠. 그래도 아리아드 님한테 아직까지 마음이 있으신 거 같은데.”

“걔가?”

대체 어느 구석이.

소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증오는 있어도 애정은 없는 게 확실했다.

얼마 전 둘이 처음 이야기를 나눴던 이 별채에서도, 또 그 뒤에 황태자궁의 응접실에서도, 마지막으로 찰스 엔드로와의 약혼식에서도. 그 모든 순간 소희를 내려 봤던 눈빛에는 부정적인 감정들만이 일렁거렸다. 그걸 모를 정도로 자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또한 맹렬히 사랑했지만 그에 보답받지 못하고 배신당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쏟아부었던 사랑보다 더한 증오만이 남아 있는 것이 보편적인 결과였다.

소희는 한숨을 푹 내쉬고 포크로 앞에 놓인 토스트를 뒤적거렸다. 그걸 가만 지켜보던 메리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사실… 저번에 제가 아리아드 님의 얘기를 듣고 저하께 말씀드린 게 있어요.”

그 의미심장한 말에 소희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 시선을 맞췄다.

“그 독살 얘기 말이에요. 사주한 인물이 켈리 님인 거 같다고 말했거든요. 그걸로 아리아드 님의 아이가 죽었다고도 이야기했었는데, 그걸 들으시고 표정이 싹 굳으셨어요.”

기운 하나 없는 얼굴 앞에서 메리는 제 생각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렇게 켈리 님을 죽일 것 같은 사나운 표정을 했는데, 둘이 갑자기 동침을 한다? 전 그건 말도 안 된다고 보거든요.”

“말이 안 되는 게 어딨어. 마음 없던 남녀가 갑자기 눈이 맞아서 몸을 섞는 과정은 원래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거야.”

소희는 내핵까지 닿을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 말에 대한 증거로 아리아드와 조슈아의 이야기를 댈 수 있었다.

과거의 조슈아는 탕녀인 아리아드를 경멸했다. 그런데 그 증오는 어떠한 한 지점에서 갑작스레 뒤집혔고 그들은 하룻밤을 함께했다. 증오가 뒤집혔던 그 한 지점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니 켈리와 조슈아의 사이도 그리 변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진짜 소설의 남주와 여주니까 말이다.

“에이, 그래도….”

메리는 머리를 굴리는 듯하더니 다시 말을 덧붙였다. 소희의 말에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울었는지 전보다 확고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걔한테 내 아이가 죽은 게 뭐가 중요하겠어. 사실 자기 아이도 아니었는데.”

소희는 앞에 놓인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중얼거렸다. 말을 하면 할수록 어지럽게 엉켜 있던 상념들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듯했다.

그 앞에서 메리는 수다가 트였는지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요? 그런데 표정이 정말 단단히 화나 보이긴 했었는데. 남녀 관계란 게 참 어렵네요. 하긴, 선대 황제들은 정부를 열 명 이상씩 뒀대요. 켈리 님과 동침을 했다고 해도 그에 비하면 조슈아 님은 여자관계가 완전 깔끔한 편이긴 하죠.”

조잘거리던 그녀는 일순 말을 멈췄다. 그리고 토스트를 깨작거리며 먹고 있는 소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따갑게 닿는 시선에 소희는 고개를 들었다.

“왜? 왜 그래?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포크를 내려놓고 얼굴을 더듬었다. 그런데 메리는 그와는 상관없는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그런데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누굴?”

“누구긴요. 조슈아 님이죠.”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이상한 애네.”

당혹감이 잔뜩 묻은 어투에 소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살피던 메리는 제 생각을 더 덧붙였다.

“지금 아리아드 님 표정이 사랑하던 사람의 외도를 목격하고 딱 충격받은 표정이에요.”

“무슨 소리야. 무슨 충격을 받았다고 그래. 나 지금 완전 멀쩡한데. 아무렇지도 않은데?”

따발총을 쏘듯 말을 와다다 쏟아부은 소희는 뒤이어 콧방귀까지 꼈다. 그러한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메리는 아리아드가 그렇게 멀쩡한 척 용을 쓰는 모습에 져 주지 않고, 더 명확하게 제 앞에 있는 주인의 얼굴 표정에 대해 설명했다.

“멀쩡하긴요. 아리아드 님 얼굴이 지금 밖에 날씨보다 더 안 좋은데요.”

그녀의 오른손 검지가 정확하게 통창이 나 있는 쪽을 가리켰다. 하늘엔 먹구름뿐이라 환해야 할 대낮이 온통 잿빛이었다.

“먹구름이 잔뜩 껴 있어요.”

소희는 뒤늦게 그것을 단단히 부정하듯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그를 봐 줄 메리는 제 할 말만 한 뒤 뒷정리를 하려고 부엌으로 떠나 버렸지만.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고정하려고 용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애써 올렸던 입매가 밑으로 축 처졌다.

메리의 말을 듣고 나서야 소희는 제 기분이 상당히 엉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는 비할 바도 못되게 기가 죽고 온몸에 맥이 빠져 있었다.

문득 소희는 그러한 자신이 우습게 보여 자조했다. 이제 조슈아와 아리아드는 완벽한 남남이었고, 그의 부인은 켈리였다. 그러니 결혼한 남녀가 한 방에서 나오는 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길이 별채에 나 있는 창문으로 향했다. 어느덧 호숫가에 짙은 안개가 껴 출렁이는 물의 표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희는 다시 손톱을 물어뜯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그에 살갗에는 더 짙은 핏방울이 맺혔다.

* * *

저녁이 되자 점차 몸에 뜨거운 기운이 돌았다. 아무래도 전날 한 시간가량 폭우를 맞으며 서 있었던 탓인 듯했다.

퇴근을 하기 전 메리가 놔둔 따뜻한 물을 먹고 소희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로 다짐했다. 내일 낮에도 조슈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냥 아무 말 없이 이 별채를 떠나겠다고.

차라리 갈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편이 이렇게 조슈아를 떠올리며 얹힌 듯 속이 답답한 것보다야 나을 것 같았다.

빗줄기는 계속해서 창문을 두드렸고 간혹 거센 바람으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래서인지 더욱 잠이 오지 않았지만 소희는 애써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양을 그려 나갔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복슬복슬했던 양의 머리가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얼마 뒤 완벽한 조슈아의 얼굴로 탄생했다.

소희는 짜증스럽게 이불을 걷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 짜증 나 진짜.”

아무래도 오늘도 일찍 잠이 들기엔 글렀다. 차라리 술에 잔뜩 취해 기절하듯 잠자리에 들면 어떨까. 소희는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한 일회성 방법을 생각해 내고는 침실 밖으로 향했다.

일 층 부엌 쪽 선반에 도수가 높은 술 몇 병이 놓여 있었다. 그걸 찾으러 가기 위해 소희는 어둠 속에서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부엌에 도착해 불을 켜고 선반을 올려 봤다. 이게 이렇게 높았나.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발뒤꿈치를 바짝 들어야 겨우 손끝이 닿을 듯 보였다.

의자를 갖고 와서 꺼내면 될 것을 소희는 미련하게 무작정 손부터 뻗고 봤다. 손끝에 술병이 밀려 닿을락 말락 하자 묘한 오기가 생겨났다.

“거의… 다 됐다….”

끙끙거리던 소희는 일순 밑에 깔려 있던 발 매트가 밀리자 중심을 잃었다. 그 휘청거림에 손끝에 닿아 있던 술병에도 힘이 가해졌다.

“…어, 어!”

고즈넉한 밤.

비명과 함께 요란스러운 소리가 별채 안에 울렸다. 가엾게 흔들리던 몸은 끝내 중심이 무너져 뒤로 넘어갔다. 앞으로 쏠린 커다란 술병도 선반 위를 이탈했다. 그렇게 그 짧은 찰나에 둘 다 허공 위에 떠올랐다.

소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무 바닥의 딱딱한 감촉이 엉덩이, 허리, 머리 순서대로 전달되었다.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에 절로 인상이 잔뜩 찌푸렸다.

곧이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병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는데 뒤잇는 소리가 없었다. 얼얼한 뒤통수를 감싸 쥐고 소희는 머리를 살짝 들어 동태를 살폈다.

술병이 보였다. 공중에 덩그러니 떠오른 술병.

그것은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소희는 그 기다란 팔을 따라 시선을 올리다가 술병을 쥔 주인공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망울이 대자로 뻗은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떨어지는 술병은 잡아 주었지만, 뒤로 엎어지는 그녀는 그냥 그대로 놔둔 채로.

브랜디 병을 들고 소희를 내려 보는 눈동자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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