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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76화 (76/120)

그날 밤, 어둠이 짙게 깔린 것은 하늘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거대한 엔드로 저택 곳곳에도 황량감이 가득했다.

특히 헨리킨 엔드로가 있는 접견실에는 그 어두운 기운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런 식으로 망신을 당해서야!”

헨리킨은 낮의 일을 생각하며 이를 꽉 물었다. 그냥 사람이 많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각 분야에 이름을 널리 알리는 사람들이 한가득 차 있던 자리였다.

이제 와서야 아리아드를 제 집안에 들이려고 시도한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상황 판단이 쉬이 되지 않았던 건 다 제 아들 때문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리아드와 혼인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대는 하나뿐인 아들 때문에.

구석에서 몸을 쭈그리고 울고 있는 찰스 때문에 헨리킨의 신경은 더욱이 날카로워졌다. 주름진 이마가 짜증으로 물결을 쳤다. 그의 시야 내에 아들놈의 망가진 오른손이 들어왔다.

사실 아리아드와의 혼인을 허락한 건 단순히 아들의 부탁에서만 비롯된 결정은 아니었다. 마음 한편에 담겨 있던 황태자에 대한 분노도 그것에 한몫하였다.

아들의 손을 불구로 만든 이유가 겨우 아리아드 때문이라는 사실이 노여움을 더욱 키웠다. 결국 황태자가 그렇게 아낀다는 여자를 제 아들놈이 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수가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보니 그것은 너무 가벼운 생각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아들의 염원과 황태자의 복수, 그 이유만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여자였으니 말이다.

접견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약혼식장이 어두워졌을 때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운 범인을 알아 오라 시켰으나 결국 그는 헨리킨이 원했던 정보를 들고 오지 못했다.

“알아보니 저희 엔드로 가문 쪽 사람도 아니라고 합니다. 난동을 부린 직후에 그대로 자취를 감춰서 현재는 정보를 더 알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감히….”

이를 꽉 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헨리킨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독수리 모양의 작은 장식품을 들어 그곳으로 망설임 없이 던졌다.

“그만 좀 하란 말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울고 있을 게냐!”

그것을 그대로 맞은 찰스가 얼굴을 더 깊게 수그리고 소리를 감췄다.

작위를 물려받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저 모양이라니. 헨리킨은 더 심한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짚었다.

그렇게 제 아들을 한심스럽게 내려 보고 있던 와중이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찰스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황태자의 모습이 스쳤다. 약혼식장 입구를 빠져나가며 묘한 미소와 함께 묵례를 건넸던 장면이었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붉은 눈동자 안에 담긴 서늘한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예전부터 그와 사업적으로 긴밀히 마주하면서도 제 아들과 비슷한 또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편에 서 있던 헨리킨은 제 아들이 당한 시점부터 노선을 조금씩 틀고 있었다. 그리고 아리아드와의 약혼을 확정을 지었던 날, 그것은 명백히 황태자에게 대적한다고 선전 포고를 한 셈이었다.

이젠 그 범상치 않은 자와 완전히 반대편에 서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헨리킨은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전력도 그와 비견해서 꿇릴 것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매킨리 황실에 황자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다니엘 매킨리 쪽에서 아직도 연락이 없는 건가.”

“아, 오늘 낮에 몬트롤 지역 쪽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그의 비서는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편지 봉투를 꺼내 건넸다. 헨리킨은 급하게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곳에는 다니엘의 필체로 기분 좋은 소식이 적혀 있었다. 자신의 편에 서는 걸 환영한다는 인사와 함께 곧 전쟁이 끝날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곧 몬트롤 지역에서 승전보가 전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비서의 말에 헨리킨이 덥수룩한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다니엘 매킨리는 직접 전쟁터에 나가 제 능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할 정도로 명예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첫 번째 황자 임에도 조슈아 매킨리에게 황태자 자리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보다 조슈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열망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러니 곧 그의 등장으로 많은 것들이 뒤바뀔 것이라 헨리킨은 확신했다.

“라트베아에도 이제 새로운 바람이 불겠구먼.”

신경질만이 가득하던 언성에 드디어 여유가 찾아왔다.

새롭게 불어오는 바람은 매킨리 황실을 피바다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만들어 갈 생각에 헨리킨의 마음속에 강렬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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