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4
브릭스는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것은 며칠 전 사업 관련으로 황태자궁의 집무실을 찾으면서부터 느꼈던 기운이었다.
하필이면 그날, 조슈아에게 초대장이 전달되었다. 거기에는 아리아드 피어슨과 찰스 엔드로의 약혼식에 관해 쓰여 있었다.
조슈아는 그 종이를 들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를 오래 봐 온 브릭스는 잘 알았다. 무심해 보이는 붉은 눈동자 안에 가끔씩 묘한 광기가 읽히는 것을.
건너편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브릭스는 친우에게 적절한 조언을 건넸다.
“무슨 심정인지는 알겠는데, 엔드로 가문을 건드는 건 썩 좋은 방법은 아닐 거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상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과거의 전적을 잘 알아서였다. 찰스 엔드로의 오른손 뼈를 모조리 부숴 버렸던 그 사건 말이다.
그건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조슈아가 입단속을 한 것도 있었지만, 엔드로 가문 쪽에서도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므로 쉬쉬하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손이 황태자에 의해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공론화하게 되면, 결국에는 그 이유가 스토킹 때문이라는 것도 밝혀질 테니까.
물론 내부적으로 그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특히 찰스의 아버지인 헨리킨 엔드로가 말이다.
며칠 전 집무실에서부터 이어진 불길함은 약혼식장에 도착해서까지 이어졌다. 홀 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번쩍이는 붉은 안광이 여전히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브릭스는 조슈아의 옆을 지나치려다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조슈아, 이성적인 방법을 연구해 봐. 지금 네가 하는 생각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닌 거 같으니까.”
그제야 조슈아가 고개를 돌려 브릭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여전히 입을 꿋꿋하게 다문 채였다. 집무실에서 한 말을 모조리 무시했던 때처럼 말이다.
그 앞에서 브릭스는 대충 변명을 늘어놓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대충 알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일순 전신을 차갑게 식게 하는 서늘한 시선이 닿았다. 브릭스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었으므로 금방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냈다.
“꺼지라고? 그래, 알겠어.”
그리 자신의 자리를 찾아 발길을 움직이면서도 불안감은 여전했다. 제 예감이 틀리길 바랄 뿐이었다.
* * *
붉은빛 카펫을 밟아 나가는 소희의 발걸음이 가끔가다 휘청였다. 아직까지 높은 굽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럴 때마다 찰스 엔드로는 바라지도 않은 호의를 베풀며 그녀의 몸을 이끌었다.
홀 안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에 선 소희는 맨 앞줄에 앉은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 속에 짙은 무심함이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서 이 상황을 해결해 줄 무언가를 기대하긴 힘들어 보였다.
찰스 엔드로는 사용인들이 끌고 오는 거대한 케이크를 바라보다가 그쪽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그렇게 소희와 조금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
기다렸다는 듯 어둠이 찾아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천장에 붙은 샹들리에 조명들이 모두 빛을 잃었다. 창문은 누군가 다 가려 놓은 것인지 그렇게 장내에 칠흑빛 어둠만이 자리했다. 두려움에 찬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번지고 있었다.
그러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희의 손을 낚아챘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달콤한 바닐라 향이 주변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일은 데온이 꾸민 일일까.
“아리, 나가자.”
예상했던 것처럼 그는 무작정 소희를 끌고 나가려고 했다. 앞날이 깜깜하기만 하니, 문득 이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엔드로 가문의 일원으로서 아리아드 피어슨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 목소리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틈에서 들려왔다.
“순결을 잃은 더러운 여자. 저 여자는 엔드로 가문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고래고래 내지르는 소리가 사람들이 웅성대는 목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소희에게는 그리 놀라운 것도 없는 전개였다. 예전 개교식 사건 때 이미 한 번 겪어 봤던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전에는 말 피를 머리 위에 들이부었는데, 이번에 제 몸으로 날아오는 것을 보면 그보다 약과였다. 누군가가 날달걀을 단상 앞으로 던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달걀 세례에 찰스 엔드로가 기겁하며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들을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날아오자 혼비백산이 되어 입구를 찾아 나섰다.
소희는 저 혼자 덤덤하게 새하얀 드레스를 적시는 날달걀을 털어 냈다. 옆에 서 있던 데온은 무언가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곧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아리, 괜찮아?”
“아주 괜찮지.”
“뭐?”
걱정이 잔뜩 담긴 질문에 태평한 대꾸가 뒤잇자 데온은 놀란 듯 되물었다.
“데온, 지금 상황이 꽤 괜찮게 흐르고 있어.”
소희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약혼식이 망쳐진다면 귀족들 앞에서 단단히 망신을 당한 엔드로 가문은 아리아드를 포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차피 찰스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궁리 중이었으니,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고함을 지르던 의문의 남성이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생각보다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이야기였다.
“아리아드는 처가 있는 페트린 후작과도 사랑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정신 나간 여자를 가문에 들이려고 하다니 진정 미치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을 꿋꿋하게 뚫고 들려오는 거대한 언성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난데없이 페트린 후작이 언급되며 그들에게도 오물이 튀었다.
페트린 후작 부인은 예전 개교식 사건을 주동할 정도로 아리아드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여자였다. 당연히 그 이유는 남편의 외도였고.
소희는 그 사실을 현실로 나갔을 때 소설 속에 쓰여 있는 내용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 장면은 조슈아와 메이컨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었다.
[“페트린 후작 부인이 사주한 것이라고 합니다.”
“페트린?”
“페트린 후작이 외도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상대가 아리아드 님이라고….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둔 모양입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절대적으로 숨기고자 했다. 개교식 사건을 다룬 신문 인터뷰에서도 그 사건은 그저 개인적인 원한으로 벌인 일이라 일축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남편의 외도 사실을 밝히는 순간, 제 얼굴에다가도 똥을 뿌리는 격이 되어 버리니까. 또 그러한 일이 알려져 처참히 떨어질 남편의 명예도 생각해야 했으니 속에서 천불이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남성에 의해서.
이 깜깜한 공간에 빛이 드리우면 페트린 후작과 그 부인의 형편없이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아리아드에게도 썩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찰스 엔드로에게 벗어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은 되었지만,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아리아드의 이미지를 더욱 더럽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리아드의 재기를 생각하고 있던 소희의 머릿속이 더욱 어지럽게 엉켜 버렸다.
그 와중에 이런 엉망인 상황에서도 데온은 아리아드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면 곤란했다. 불이 켜지고 아리아드와 같이 있는 모습을 모두가 보았다가는 애써 가문을 살리고자 힘쓰는 데온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야 만다.
“데온, 이제 가도 좋아.”
소희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데온의 가슴을 세게 밀었다. 하지만 그 커다란 몸이 손쉽게 밀릴 리는 없었다.
그는 작게 속삭이며 계속해서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어떻게 그래. 여길 빠져나가자.”
“아니, 이대로 도망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야.”
도망친다면 그들이 애써 라트베아로 돌아온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데온은 그의 자리에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고, 또한 소희도 그러했다.
“입구를 찾았어요! 여기예요!”
앞쪽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곧 문이 열리면 짙은 어둠만이 자리했던 공간에 빛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면 지금 둘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야 만다.
“데온, 제발 부탁이야. 나한테서 떨어져.”
소희가 다시 간절하게 부탁하자 그는 마지못해 몸을 떼어 냈다. 낮은 한숨과 함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바닐라 향이 점차 옅어졌다.
그와 동시의 홀의 입구에서 빛이 쏟아졌다. 사용인들은 분주하게 누군가가 창문을 가려 놓은 장막을 걷어 냈다.
소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달걀 껍데기와 끈적한 액체들이 이리저리 퍼져 있었다. 물론 그걸 거의 다 맞은 아리아드의 몰골도 처참할 것이었다.
시야가 훤해지자 앞쪽에 홀로 서 있는 그녀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조슈아는 아무런 동요 없이 전과 다를 것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어떠한 감정도 깃들지 않은 눈동자가 다른 이들처럼 앞에 서 있는 소희를 훑어 내렸다.
쏟아지는 다른 이들의 수많은 눈길보다 저 남자의 눈동자 하나가 더 강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애써 그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곳을 찾아와 귀한 시간을 내주신 분들에게 사과의 말씀 전합니다.”
아리아드의 곧고 맑은 목소리에 웅성거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방금 일어난 일들은 모두 제 책임이 맞습니다. 그렇기에 모두에게 민폐가 되는 상황에서 찰스 엔드로 님과의 약혼을 더는 진행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구석을 찾아 도망쳤던 찰스 엔드로가 불쑥 튀어나와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헨리킨 엔드로가 오른손을 뻗어 제 아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엉망이 되어 버린 광경에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그의 아들이 아리아드를 갖고 싶다고 떼를 쓴다 해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리아드를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었다.
결국 헨리킨 엔드로는 결론을 내었다.
“이 약혼은 없던 걸로 하지.”
그렇게 약혼식은 막을 내렸다.
아리아드를 향해 쏟아지는 경멸 어린 시선을 보아하니, 소희의 생각보다 더욱 좋지 못한 흐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