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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73화 (73/120)

Chapter 73

조슈아는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까만 구두 밑창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어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흙먼지가 떨어졌다.

몇 시간 전, 별채를 빠져나와 그 주변을 계속해서 걸었다는 증거였다.

홧김에 아리아드에게 황성 밖으로 나가란 말을 던지긴 했어도, 정말 그렇게 떠나갈 여자를 생각하니 발길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궁 밖으로 나가서 죽어.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죽든 말든 알아서 해.’

‘…알겠어.’

그 쉬운 대답에 기분 나쁜 불안감이 들었다. 그 여자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저질러 버릴 거 같아서.

‘최대한 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게.’

또 순순히 제 곁을 떠나 조용히 살겠다는 말도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정말이지 자신이 없어도 잘 살 것만 같았다.

화기가 몰아치는 가운데,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다시 별채의 계단을 밟고 있었다. 침실 문을 열자 짙었던 라벤더 향이 사라진 뒤였다. 그 자리에 아리아드의 시녀였던 자가 앉아 있었다.

메리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하더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그러다 조슈아가 돌아서려 하자 급히 입을 열었다.

“…저하, 알고 계셨어요?”

들은 이야기는 기가 막혔다. 아리아드는 독살을 당할 뻔했고, 또 그 범인이 황태자궁에서 일했던 시녀라는 이야기.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의 소행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공들여 떠나 놓고서 굳이 다시 라트베아로 돌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을까. 과연 그녀는 복수를 위해서 돌아온 것이 맞을까.

모든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한 사람이 과연 자신의 아이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걸까. 글쎄, 그것을 확신하긴 어려웠다.

확실한 건 돌아온 이유 중에 자신의 존재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 그 와중에 우습게도 그 점이 심사를 단단히 뒤틀리게 했다.

‘당신의 목표도 엉망으로 만들어 보려고요. 아니면 그쪽 자리를 내가 되찾는 것도 좋겠네요.’

아리아드는 켈리에게 그리 호언장담했다.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녀는 한동안 황성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홧김에 떠나라고 했던 그가 마음이 변하여 다시 구질구질하게 잡지 않는데도. 한편으로는 그 점이 다행스럽게 여겨지자 조슈아는 자조했다.

그는 어느새 집무실 책상에 올려 둔 만년필을 쥐고 책상을 치고 있었다.

툭, 툭, 툭.

고민이 묻은 손놀림이 느려지다가 일순 그 소리가 멎었다.

떠나라고 했지만 그렇게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또 가까운 곳에 있다면 저 없이 잘 사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모순된 감정들이 계속 치솟다가 조슈아는 결론을 내렸다.

“…망가뜨리려면 손에 쥐는 게 먼저겠지.”

뒤이어 낮고 스산한 중얼거림이 울렸다.

그의 목표는 확실하게 재설정되었다. 이상해진 아리아드를 처음 본 그 순간, 그때의 마음가짐으로.

* * *

이틀에 걸쳐 진행된 무도회가 끝났다. 그리고 소희는 아리아드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상상 이상의 닦달에 시달려야 했다.

그 이유는, 역시나 찰스 엔드로였다.

“아리아드, 어쩜 그렇게 예의가 없는 거야! 대체 어딜 가서 뭘 하고 온 거니!”

다정한 목소리로 아리아드의 이름을 부르던 피어슨 부인은 더 이상 존재치 않았다. 이제 아리아드를 다 잡은 인질이라고 생각하는지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감시는 더 심해졌다. 피어슨 저택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요, 저택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조차 쉽지 않았다.

사실상 소희가 이러한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힘들었다. 아리아드에 빙의한 이래로 이렇게 미래가 까마득하긴 처음이었다.

‘당신의 목표도 엉망으로 만들어 보려고요. 아니면 그쪽 자리를 내가 되찾는 것도 좋겠네요.’

그리 호기롭게 말한 것이 우습게도 현재 아리아드의 위치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시간 전부터 자신을 붙잡고 세뇌하듯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는 피어슨 부인 때문이었다.

“일단 엔드로 가문 쪽에서 빨리 약혼식을 치르고자 한다는구나. 형식만 대충 갖춰서 이번 주 주말에 엔드로 가문 저택에서 치러질 예정이야.”

방 안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드레스가 들어왔다. 하나같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한 게 현재 피어슨 가문의 재정 상태로는 구할 수 없는 아이템들이었다.

엔드로 가문에서 지원해 준 게 확실한 드레스들을 뒤적거리며 피어슨 부인은 감격했다. 그리고 소희의 앞으로 여러 벌의 드레스를 올려 두었다.

“아리아드, 일단 이것들 먼저 입어 보고 오렴.”

소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옷들을 내려 봤다. 또 어딘가에서 뛰어내려 현실로 도피하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그 뚱한 표정을 곧바로 읽고는 피어슨 부인은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만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아리아드, 제발 착하게 굴어. 네가 잘하기만 하면 가문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단 말이야.”

“저는 행복하지 않은데요.”

소희는 낮게 말대꾸를 했다. 사나운 눈길이 와 닿자 헛기침으로 싸늘해진 상황을 무마하고자 했다. 하지만 피어슨 부인은 그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잔소리를 시작했다.

“얘가 그렇게 나이를 먹고도 왜 이리 철이 없니. 네가 애초에 잘했으면 이렇게 모두가 고생할 일도 없었어!”

그에 덧붙일 말들이 끊임없이 생각났지만 소희는 하지 않았다. 잔소리에 하나하나 대꾸해 봤자 길이만 길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결국 힘없는 자의 패배였다. 소희는 앞에 놓인 옷가지들을 손에 쥐었다. 귀 따가운 이야기들을 뒤로 한 채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내딛는 발걸음이 한없이 느릿하고 기운이 없었다.

약혼식까지 단 삼 일만이 남아 있던 시점이었다.

* * *

엔드로 저택의 구석진 방 안에서 소희는 몇 시간째 대기하고 있었다. 길어진 준비에 지쳐 의자에 기대 눈을 감은 채였다.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평범한 두뇌를 가진 소희는 이를 타개해 나갈 적절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대로, 제 몸이 끌려가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소희는 천천히 눈을 떠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엔드로 가문의 저택은 각종 장식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특히나 놀라운 것은 이 한여름에 거대한 독수리 모양의 얼음 조각상이 입구 중앙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약혼식 시작 한 시간 전.

물줄기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와 독수리 모양의 얼음 조각상을 지나 사람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호라는 칭호에 걸맞게 수많은 인사들이 줄을 지어 입장했다.

까만 머리, 노란 머리, 갈색 머리, 주황 머리, 파란 머리….

위에서 그 다양한 색채들을 따분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소희는 문득 익숙한 색깔에 눈길을 세웠다.

쨍한 햇살을 받아 유독 반짝거리는 은발이었다.

“…데온?”

소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당연히 닿지 못할 거리임에도 뒤이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데온은 마치 제 이름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올렸다.

그렇게 그 먼 거리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짙은 회색빛의 눈망울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데온은 무슨 말을 하려는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빤히 올려봤다. 이내 그가 발걸음을 옮기자 더 이상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음에도, 뒤이어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데온이라면 이 상황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리아드를 꺼내 줄 것만 같았다. 물론 그 방법이 정상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때마침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 얼굴을 확인하자 한결 편안해졌던 마음이 다시 어지러워졌다. 찰스 엔드로의 등장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순백의 정장을 갖춰 입어 유독 그의 얼굴이 더 누렇게 보였다. 소희를 보고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미소 지었다. 그에 드러난 이는 얼굴보다 더 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리아드 양, 두 번의 용서는 없어요.”

찰스는 그리 말하며 윤기 나는 아리아드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불쾌감이 남았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바로 앞에서 습한 숨결이 느껴지자 소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뒤잇는 감각은 굳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어지러움과 함께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이 상황을 회피하려는 머리가 본능적으로 죽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돌아왔다.

그리 끊임없이 도피해 봐야 결국엔 제자리였다. 현실의 소희는 결국 잠이 들 테고 또 아리아드의 몸에 들어올 테니까.

어쩌면 소희가 이곳에서 죽음을 다짐해 현실로 돌아간 순간, 아리아드 몸이 잠들어 있는 그 짧은 찰나에 이보다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결국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죽음은 적절한 해결책이 되어 주지 못한다.

건물 밖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찰스는 멀어졌다. 소희도 귓가에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제 이후 전개될 아리아드의 이야기는 온전히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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