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72화 (72/120)

Chapter 72

유리 받침대에 찻잔을 내려놓는 켈리의 손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에 달그락거리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응접실 안을 메웠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리아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런 짓을 벌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을까.

충동적으로 벌인 일에 깊은 후회를 하고 반성을 한다면 자신은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소희는 잠시 동안 둘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무엇 때문에 범인이 저라고 이야기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어지는 켈리의 말에 소희는 확신했다.

“…증거가 있느냐 물었어요.”

이 여자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구나.

“아, 그놈에 증거.”

쓸데없는 상념에 젖어 있었던 자신을 비웃으며 소희는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증거는 죽은 제 아이겠죠.”

“죽은 아이가 어떻게 제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어요.”

“그건, 두 번째 증거가 증명해 줄 거예요.”

소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불안감이 들어찬 켈리의 눈동자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소희의 손에 의해 응접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바로 앞에 보이는 낯익은 갈색 머리에 켈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 여자가 왜.”

블루앙 래비, 분명 라트베아를 떠났어야 할 여자가 다시 켈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아리아드와 함께.

“이 정도면 충분한 증거가 되었나요?”

블루앙 래비의 등장에 켈리는 들숨으로 한껏 가슴을 부풀린 뒤 호흡을 잊은 듯 그대로 멈춰 섰다. 딱딱하게 굳은 푸른 눈망울이 점차 초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소희는 그 앞에서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이 여자가 켈리 양의 명으로 독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실토했어요. 그렇다면 이제 충분한 증거가 갖춰졌으니, 앞으로의 당신의 위치는 제 손에 달린 거겠죠?”

긴장감 있는 현재 분위기와는 달리 태평한 말소리였다.

“전 목표를 잃었으니 새로운 목표를 다시 짜 볼까 해요.”

첫 번째 목표는 단순하게 소설을 살려서 돈을 벌고자 했고, 또 두 번째는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서라도 아이를 살리고자 했다.

하지만 두 번째 목표를 잃고 진정 모든 것을 다 잃은 지금.

“당신의 목표도 엉망으로 만들어 보려고요.”

소희의 마음은 다시 첫 번째 목표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니 더 가볍게 일어날 수 있는 법이었다.

“아니면 그쪽 자리를 내가 되찾는 것도 좋겠네요.”

사실 소희의 목표와 조슈아를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양립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지금 하는 말은 단지 켈리의 두려움을 가중하기 위한 큰소리일 뿐.

당장은 혼란에 휩싸인 켈리의 눈망울을 감상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말이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소희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자신이 느꼈던 고통에 비해 이 정도는 아직 약과겠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사색이 된 몰골을 구경하는 희열은 있었다.

그런데 블루앙 래비 뒤편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이 불쑥 걸어 나왔다. 물에 젖어 엉망이었던 모양새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깔끔히 정돈된 모습이었다.

“아리아드.”

나직한 목소리가 그 이름을 부르자 머릿속에 차 있던 즐거움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이어 등줄기에서 서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야.”

조슈아의 사나운 언성이 귓전을 때렸다.

“최대한 내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산다더니. 매번 넌 지키지도 못할 약속만 하지.”

서슬 퍼런 눈빛이 와 닿자 소희는 눈시울을 설핏 떨었다. 여기서 그의 등장은 정말이지 예상치도 못했는데.

소희는 단순히 켈리에게 겁만 주고 곧바로 떠날 작정이었다. 조슈아가 나타나기 전에 말이다. 그래서 응접실에 도착하기 전, 애써 사용인들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었다. 그들은 그가 밤늦게 도착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짜증이 잔뜩 묻은 붉은 눈망울이 소희를 내려 보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것은 조슈아의 등장만이 아니었다. 만면에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질려 있던 켈리는 이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였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기울더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비저하!”

응접실 안이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은 얼굴이었던 켈리는 정말 그렇게 기절하고야 말았다.

하필이면 또 왜 이런 상황에 쓰러져서는.

소희는 조용히 헛웃음을 뱉으며 대리석 바닥으로 눈길을 내렸다. 잔뜩 흐트러진 금발 머리와 입술 색도 하나 없어 시체 같은 만면, 툭 치면 부서질 것만 같은 골격들을 타고 내려오면 그 얇은 허리에 조슈아의 손이 닿아 있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켈리를 안아 올렸다. 숨이 턱턱 막혀 온 것은 그 순간부터였다.

자신이 진짜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흔들며 막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저를 내려 보는 조슈아의 서늘한 눈동자 하나에 죄인이 되고야 만다.

금방이라도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괜스레 초라해지는 기분에 의미 없는 눈싸움을 지속했다. 그러자 뜻을 알 수 없는 짧은 한숨이 그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소희에게서 등을 보였다. 무정하게 돌아선 몸과 그 품 안에 안겨 있는 여자. 멀어지는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조슈아, 그 남자의 존재 하나만으로 판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 * *

지독한 어둠이었다. 켈리는 그 속에서 끝없이 방황하다가 저 멀리에 보이는 희미한 빛을 따라 자연스럽게 발길을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서니 그곳에만 조명이 켜져 있는 것처럼 시야가 훤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다란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거울 앞에 섰지만 그곳에 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내 유리 표면이 잘게 일렁이더니 다른 이의 얼굴이 그 위로 떠올랐다.

켈리의 착한 성정이 마음에 든다며 예뻐해 주었던 비앙카의 얼굴이었다. 조슈아에게 사랑받지 못할 것을 암시하듯 안타깝다는 목소리가 뒤이었다.

‘켈리, 일단 이른 시일 안에 아이를 가지렴.’

곧 그 모습이 희미하게 번지더니 거울 위로 조슈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기까지 하시죠. 선 넘는 짓.’

술에 취한 와중에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던 어조가 스치고.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던 브릭스마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 봤다.

‘모순이 심하신 비저하 님.’

마지막으로 지긋지긋한 아리아드의 얼굴이 그 위에 겹쳐졌다.

‘켈리 양은 제가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말끔하게 없애 주셨네요.’

켈리는 더 이상 거울 위에 떠오르는 얼굴들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들은 끊임없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뒤이어 뇌를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과 함께 두통이 일었다. 그녀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제발 그만해!”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자 언제 그리 소란스러웠냐는 듯 정적이 찾아왔다. 자신의 불규칙한 호흡만이 장내에 작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두통이 점차 사라지자 켈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제 앞에 있는 거울은 드디어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켈리는 그곳에 비친 제 모습을 응시하다가 기이함을 느꼈다. 자신은 분명 웃고 있지 않았는데 거울 속 제 얼굴의 입매는 올라가 있었다. 뒤이어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연민에 잔뜩 빠져선. 넌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불쌍하지.”

거울 속 켈리는 오른쪽 입꼬리를 삐쭉 들어 올렸다.

“쓰레기 같은 짓을 저지르고 나서도 어쩔 수 없었다며 합리화하겠지. 왜냐하면 넌 네가 제일 불쌍하니까.”

그 순간, 그녀는 공간이 허물어지는 듯한 아득함을 느꼈다. 그곳에 깔려 그대로 죽을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을 때.

켈리는 꿈에서 깨어났다.

숨을 거칠게 헐떡이며 급하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손만 뻗으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 새까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이마를 짚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켈리가 먼저 입을 떼기도 전에,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조슈아는 이마를 짚고 있던 오른손으로 쏠려 있던 머리카락들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렇게 훤히 드러난 눈 안에 섬뜩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켈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남자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떼어지는 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한 번 조용히 넘어가 주면 사람들은 왜 멍청하게 똑같은 짓을 또 저지를까.”

번득이는 안광과 어울리는 서늘한 목소리였다. 갑작스레 저 날카로움이 왜 자신을 향하고 있는 건지, 또 저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켈리는 되물으려 잔뜩 메말라 갈라진 입술을 떼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다시 들려오는 말에 더는 그 어떠한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예전에 아리아드를 위험하게 만들었던 걸 보고도 눈감아 줬으면 됐잖아.”

불규칙하게 이어지던 켈리의 숨이 툭 끊겼다. 뒤잇는 그 나직한 말 하나에.

“이번에는 그 여자의 아이를 죽였어?”

충격에 잠시 호흡하는 것도 잊고 그녀는 그렇게 굳어 있었다. 꿈속에서 봤던 세상처럼 그들의 주변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일렁거렸다.

아니, 어쩌면 몽땅 그렇게 허물어지길 바랐다. 그 속에 묻혀 그냥 죽어 버리고 싶었다.

조슈아는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켈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미 원하는 답을 들은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물으려고 여태 기다린 거였을까. 그렇게 그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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