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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71화 (71/120)

Chapter 71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악단의 선율을 비집고 들려왔을 때였다.

황후를 따라다니며 귀족들의 틈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켈리는 소음의 근원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대리석 바닥에 퍼진 유리 조각들 근처에서 브릭스가 웃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여유롭게 어깨를 살짝 들어 보였다.

켈리는 눈가를 설핏 찌푸리고는 조슈아가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무도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저 남자를 저리 긴박한 태도로 만들었을까. 정체 모를 불안감이 머릿속을 한가득 메웠다.

그녀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무도회장 밖으로 향했다. 벌써 그 남자는 한껏 멀어진 채였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따스한 바람결에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성큼성큼 걷던 그의 긴 다리는 어느새 뜀박질을 시작했다. 잡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걸음걸이에 그를 쫓던 켈리는 발길을 멈춰 세웠다.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그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한참 뒤, 누군가가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켈리.”

목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한마디만으로도 불쾌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켈리가 뒤돌아서지 않자 어깨 위를 잡은 손아귀에 더 강한 힘이 들어갔다. 유레시아 부인은 거칠게 그녀를 돌려세웠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니?”

자신의 딸들과 똑 닮은 주황빛 동공이 켈리를 내려 봤다. 일평생 그녀를 멸시하던 오만한 눈동자였다.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더구나. 네 힘으로 올라간 자리도 아니면서 그렇게 사람을 깔봐서야 쓰겠니?”

“한평생 저를 깔보시던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 조금 우습네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또박또박 뱉어 낸 대꾸에 유레시아 부인이 만면을 구겼다.

“켈리, 내가 그리 어려운 부탁을 한 것도 아니잖아.”

유레시아 부인은 며칠 전 황후 폐하를 저택에 모시고 싶다며 켈리에게 힘을 써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었다. 그 이유는 아마 로잘린과 에리카의 좋은 혼처를 알아봐 달라는 것일 테고.

편지를 받자마자 켈리는 비소가 터져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뻔뻔하기 짝이 없지. 내가 대체 당신들을 왜 도와야 해.’

그리 직설적으로 나가려는 말을 삼키고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제 존칭을 똑바로 써 주시죠. 켈리가 아니라 비저하라 불러 주세요. 보는 시선이 많으니 이제부터라도 서로 존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뭐?”

“그리고 부인, 부탁을 할 때는 공손한 태도를 갖추는 게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유레시아 부인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개졌다. 그 덤덤한 말씨에 한순간에 뒤바뀌어 버린 위치가 새삼스레 크게 와닿자 그녀는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저, 망할 년이….”

습관적으로 유레시아 부인의 오른손이 올라가고, 반사적으로 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대로 그 오른손이 뺨을 내려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몇 초가 지나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켈리가 한쪽 눈을 살짝 열자 바로 앞에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브릭스가 허공에 떠오른 유레시아 부인의 팔목을 붙잡은 채였다. 그는 입꼬리를 휘어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를 구사했다.

“부인, 이대로 손찌검을 하신다면 고상한 유레시아 부인의 명성에 굉장한 흠집이 생겨날 겁니다. 지금 여기에는 셋뿐이지만 제가 입이 상당히 가벼운 터라 소문이 금방 퍼져 나갈 거예요.”

온화한 태도와는 다르게 그 내용은 협박이었다. 브릭스의 힘에 차마 공중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여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꽤 긴 싸움 끝에 그녀는 패배를 선언했다.

“아르센트 후작, 저는 다른 급한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하니 이 손 좀 놔주시죠.”

언제 그리 힘 싸움을 했냐는 듯 그는 싱긋 웃으며 기꺼이 팔에 힘을 풀었다. 유레시아 부인은 짜증이 잔뜩 묻은 한숨을 뱉으며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났다.

그렇게 무도회장 앞 복도에 둘만 남게 되었다. 푸른 눈동자와 노란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금방 그 시선이 어긋났다. 켈리가 먼저 눈을 떼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 다리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앞을 브릭스가 가볍게 막아섰다.

“고맙다는 인사는 없어요?”

켈리는 미간을 한껏 좁혔다. 바라지도 않은 호의를 베풀어 놓고는 저런 언행이라니. 뻔뻔함이 이 정도면 유레시아 부인의 뺨을 치고도 남는다고 생각했다.

“고맙네요. 쓸데없는 오지랖 덕에 다음번엔 더 아프게 맞겠어요.”

그녀는 그 앞에서 한껏 빈정거렸다.

“재밌고 좋아하는 거에는 오지랖이 넓어진다는 아르센트 후작님. 저는 더 이상 재미가 없어졌다더니 오늘은 무슨 오지랖이신지 모르겠네요.”

켈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민하던 브릭스는 한참 뒤에야 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아드가 파인애플이 들어간 케이크를 먹고 쓰러졌을 때, 그녀에게 자신이 한 말이 그제야 생각나서였다.

“조금 뒤끝 있는 성격이었네.”

“그쪽은 피곤한 성격이고요.”

가시 돋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브릭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그렸다.

그 능글맞은 태도에 켈리는 더욱 짜증이 치솟는 걸 느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다시 발길을 움직였을 때였다. 앞에 있는 남자가 몸의 방향을 틀어 또 앞길을 막아섰다.

켈리가 헛웃음을 뱉으며 그를 노려봤다.

이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한 느낌을 들게 했다. 자주 마주치는 시선과 그녀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까지.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제게 관심이 있으세요?”

일순 부드럽게 휘어 올라가 있던 브릭스의 입매가 딱딱히 굳었다. 그는 금방 당혹감이 묻은 낯을 지웠지만 더 이상 능글맞게 웃지 않았다.

그 표정을 살피며 켈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대체 왜요. 그저 겉모습이 아름다워서? 사생아라 꼬시면 쉽게 넘어올 거 같으니까?”

“켈리 양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시나 봐요.”

브릭스는 제 목을 조르고 있던 타이를 끌어 내렸다. 그곳에서 더 이상의 여유로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켈리 양은 조슈아를 왜 좋아하나요. 잘생겼으니까? 누구보다 강하니까? 그의 옆자리에 있으면 아무도 건들지 못할 거 같아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제 사랑을 단정 짓지도, 폄하하지도 마세요.”

“그럼 당신도 그러지 말아요.”

브릭스가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모순이 심하신 비저하 님.”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켈리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 *

불쾌해.

무도회가 끝나고 황태자궁으로 향하면서 켈리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을 그리 정의 내렸다. 브릭스,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를 꿰뚫어 보는듯한 태도가 특히 그랬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편없는 나를 대체 왜 좋아하는가, 그러한 의문이 계속해서 뒤따르다가 결국에는 본인을 좋아하는 그 남자마저 형편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짙은 상념으로 가득했던 시간 끝에 어느덧 마차는 황태자궁 앞에 다다랐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사용인이 뒤따랐다.

“응접실에 손님이 계십니다.”

그 말에 금방이라도 감길 듯 피곤한 눈을 비비며 켈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숨 막히는 현기증이 이는 듯했다. 반갑지 않은 익숙한 향기가 그 안에 어지럽게 퍼져 있었다.

인기척에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가를 접어 웃으며 나른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켈리 양.”

아리아드였다.

* * *

소희는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허브차를 삼켰다. 시원한 향이 입안 가득 맴돌자 한결 더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앞에 있는 저 금빛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며 대체 왜 그랬냐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적절한 해결책이 되어 주지 못한다는 걸 소희는 잘 알았다.

머리채를 잡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 켈리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용할 작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짜 놨던 여주인공의 설정을 기억했다. 아무리 저로 인해 그 설정이 크게 비틀렸다고 한들, 기본적으로 타고난 유한 성정은 변할 리 없었다.

한마디로 나쁜 짓을 하고 나서도 켈리는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리아드를 마주한 순간에 사색이 된 켈리의 얼굴이 그것을 증명했다.

“신기하다. 예전에는 제가 이곳의 주인이고 켈리 양이 손님이었는데 말이죠.”

태연스러운 말소리에 켈리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바뀐 자리를 인지하신다면 존칭을 써 주시죠.”

“아, 존칭.”

소희의 입매에 다정한 미소가 그려졌다.

“나를 죽이려고 한 사람한테도 존칭을 써 줘야 하나.”

물론, 그 내용은 다정하지 못했지만.

애써 천연덕스럽게 굴던 켈리의 낯이 또 금방 하얗게 질렸다. 푸른 눈망울이 바르르 떨리더니 그녀는 한참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무슨 소리예요.”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무슨 소리인지 다 알아들은 것 같은데.”

“증거 있어요?”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오는 목소리를 감상하며 소희는 육 개월 전 응접실에서 켈리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제 와 보니,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며 아리아드는 악녀로 남겠다고 다짐했던 일들이 한없이 우스워 보였다.

이미 많은 것들이 비틀렸다는 것을 잘 알고서도, 자신의 소설이니 결국 제 생각대로 될 것이라는 조그마한 오만함이 있었다.

소희는 씁쓸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제가 켈리 양의 사랑을 응원한다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그 진심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나 봐요. 제가 가진 아이가 조슈아의 아이가 아닌 것 같다는, 그 말할 필요 없는 비밀까지 전부 이야기한 게 무슨 의미인지 켈리 양은 몰랐던 거겠죠.”

켈리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바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찻잔을 쥔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어요. 그 비밀이 켈리 양 입 밖으로 나가 제가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 있겠다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사실이었으니까.”

소희는 정말이지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바랐던 그 한 가지는 그 정도로 간절했다. 초반에 그토록 절절하게 매달리던 독자들의 반응과 현실의 돈을 포기할 정도로 말이다.

“제가 그런 다짐을 했던 건 순전히 아이 때문이었어요. 모든 걸 버리고 딱 하나 바랐던 목표였었죠.”

켈리는 아랫입술을 잘근 물고 고개를 떨군 채였다. 그 앞에서 소희는 다시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런데 켈리 양은 제가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말끔하게 없애 주셨네요. 그래서 전 돌아왔어요. 더 이상 그 시골 마을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다시 말해, 제가 돌아온 건 켈리 양 덕분이에요.”

소희는 마지막 말을 다시 곱씹어 뱉었다.

“켈리 양이 제 아이를 죽인 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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