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0
로포아 동네는 낡고 낮은 벽돌집들이 숨이 꽉 막힐 정도로 붙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마차로 들어갈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러면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사례는 두둑하게 하겠습니다.”
소희는 헝겊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마부에게 건넸다.
펜던트를 팔아 마련한 돈이었다. 상당히 고가의 펜던트인 만큼 주머니 안이 돈으로 한가득 차 있었다. 사치를 부리며 살아도 수개월을 넉넉히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소희는 마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호숫가까지 맨발로 돌바닥을 밟고 달려서인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발이 아려 왔다. 얼마 전까지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던 사실이었다.
가끔씩 지나치는 사람들이 소희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챙이 너른 모자로 가린다 해도 아리아드의 독보적인 실루엣은 감춰질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소희는 모자를 더 깊숙하게 눌러썼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선한 인상을 가진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블루앙 래비라고 아십니까?”
소희의 질문에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급하게 말을 더 덧붙였다.
“키는 이 정도 되고, 갈색 머리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한 여자입니다.”
“아!”
무언가가 생각난 듯 감탄사를 뱉은 여자는 손가락을 펴 좁은 길목을 가리켰다.
“저기 꼭대기 집에 살아요.”
그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소희는 저도 모르게 그만 실소를 하였다. 좁은 길은 등반해야 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었다.
근데 하필이면 또 꼭대기 집이라니.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자, 앞에 서 있던 여자는 눈치를 보며 소희에게서 멀어졌다.
소희는 깊은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떼었다. 처음엔 힘차게 움직이던 두 다리에 점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두 발은 상처가 더 덧나고 있는지 갈수록 더 고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꼭대기였다. 소희는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것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으로 대신했다. 한참을 그렇게 무릎을 붙잡고 숨을 돌렸다.
파랗던 하늘은 어느덧 노을이 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꼭대기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벽돌집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나무로 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열렸다.
작은 틈으로 소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세요?”
소희는 그 여자아이를 내려 보며 블루앙 래비의 인적 사항을 떠올렸다. 간이 큰 여자는 이름과 나이까지 모두 실제와 똑같이 기재했었다.
나이는 스물하나였으니 그 나이에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동생인가.
추리가 끝난 소희는 얼굴을 가렸던 모자를 벗었다. 모자 안에 감춰져 있던 보랏빛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흘러내렸다.
신비한 색감에 여자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앞에서 소희는 최대한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너희 언니 친구야. 혹시 언니가 집에 있을까?”
아이는 아리아드의 미소에 홀딱 빠진 듯 입을 벌렸다. 그러다가 입가에 고인 침을 닦고는 답했다.
“언니는 없어요! 나가서 일해요!”
어린아이들은 누구보다 솔직하다. 한순간에 푹 빠진 듯한 표정을 이렇게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니 말이다. 소희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리아드의 외모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고혹적인 얼굴이 말간 미소를 그렸다.
“그럼,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을까? 내가 언니를 만나려고 엄청 힘들게 올라왔거든.”
* * *
블루앙 래비는 돈만 보고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소희가 그것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로 되돌아갔을 때 블루앙 시점의 소설 내용을 보고 나서였다.
돈이 많다면야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 아리아드를 죽이려고 했지만, 또 그보다 더한 돈이라면 아리아드의 편으로 곧바로 돌아설 수 있는 사람.
심지어 켈리가 준 돈에 불만이 있어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블루앙 래비는 왜 그렇게까지 돈에 목을 매는 것일까.
소희는 낡은 가구들이 자리한 작은 거실 안을 살피다가 식탁 의자에 앉았다. 곧이어 신기하다는 듯 계속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을 죽일 각오를 할 정도로 돈이 절실했던 이유는….
“이름이 뭐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이는 화들짝 놀라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사벨이에요.”
“언니랑 사이가 좋은가 봐.”
“그렇게 좋진 않아요.”
의외의 대답에 이어졌다. 소희는 의문을 표하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나가서 일하느라 놀아 주지 않거든요. 전 대부분 집에 혼자 있어요.”
“그래서 원망해?”
“조금요. 조금 미워요.”
“언니가 일할 동안 다른 사람이랑 놀면 되잖아.”
“아무도 없어요. 가족은 언니뿐이라. 그런데 놀아 달라고 투덜거리면 아이같이 굴지 말라고 그래요. 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 사는 거라고. 자기 같은 인생을 살지 않았으면 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칭얼거리지 말라며 화를 내요.”
이사벨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 앞에서 소희는 작은 등을 천천히 토닥여 주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건 조금 속상했겠다. 그런데 언니가 널 정말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역시 블루앙 래비가 돈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동생 때문이었다. 남의 가족을 죽여서라도 동생을 먹여 살리려는, 정말이지 아주 경탄할 만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비소를 띄우는 소희의 앞으로 아이가 찌그러진 주전자와 잔을 들고 왔다. 그리고 고사리밥 같은 손으로 물을 채워 건넸다.
멀거니 그걸 쳐다보고 있자 이사벨은 소희의 손에 잔을 쥐여 주고는 웃어 보였다. 그 말간 웃음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손에 들린 잔을 바라보며 소희는 생각했다. 역시, 이 천진한 아이를 미워할 일은 아니라고.
삼십 분, 한 시간. 그렇게 붉게 물들어 있던 하늘이 금세 어두워졌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이는 옆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였다.
“언니는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까 들어가서 자.”
그 말에 눈이 거의 다 감겨 끔뻑이던 아이는 구부정하게 인사를 하고는 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꽤 흘렀을 때였다.
현관문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울리더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곧장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네. 이 주만인가?”
천연덕스러운 인사에 여자는 놀라서 두 손에 쥔 봉투를 바닥에 툭 떨궜다. 그리고는 불안한 눈동자로 주변을 훑더니 다시 아리아드를 마주 보고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소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족 사랑이 대단하신 블루앙 래비 양.”
의자 다리가 나무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와 여유로운 언성이 겹쳤다.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동생이, 이 집이 사실은 사람을 죽여서 유지되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충격이 클까.”
그 말에 블루앙은 갈색 눈동자를 바르르 떨었다. 그러다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작스레 뻔뻔스럽게 돌변했다.
“증거 있어요? 아니, 증거가 있으면 또 뭐 어떻게 할 건데. 가문이 폴싹 망해서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그 말은 아주 예리했다. 소설 내용을 보고서야 범인을 알 수 있었던 소희가 이 안에서 증거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두 손에 그 어떠한 것도 쥐지 않았다는 걸 알아채기 전에 먼저 큰소리를 치는 것. 마치 거대한 무언가를 쥔 것처럼.
“증거가 없었으면 내가 당신이 범인인 줄 어떻게 알았을까. 당신, 내가 마신 주스에 독을 넣었잖아. 소량의 독이라 티가 나지 않을 줄 알았겠지.”
소희는 자신이 가진 정보를 이용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확한 정보에 뻔뻔함으로 무장했던 블루앙의 갈색 눈망울에는 점차 두려움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런 짓까지 벌인 이유가 동생 때문인 것 같은데, 네가 이대로 감옥에 갇히면 이사벨은 어떻게 될까.”
코앞까지 다가온 아리아드의 서늘한 얼굴에 블루앙이 뒷걸음질 쳤다.
“너는 내 아이를 죽였는데 내가 네 동생을 가만히 둘 거 같아?”
현관문에 등이 닿아 도망칠 구석이 없자 그녀는 입술을 달달 떨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우기는 꼴이 가관이었다.
“…피, 피어슨 가문이 쫄딱 망해서 아무런 힘도 없는 걸 다 아는데… 그런 협박이 통할 줄 알아?”
“쫄딱 망했다고 누가 그래? 황성 밖으로 쫓겨나서 요즘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나 본데, 난 곧 엔드로 가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야.”
그 변태 놈의 가문을 들먹이며 강한 척을 해야 하는 건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소희는 그리 말하며 헝겊 주머니를 꺼내 들어 흔들었다. 이 정도 돈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블루앙 래비, 이 집으로 곧 널 잡으러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그런데 널 잡기 전에 한 가지 의문이 들어서 말이야. 그걸 좀 따로 확인하려고 왔거든.”
사납게 몰아붙이던 소희의 언성이 갑작스레 온화해졌다.
“정말 네 자의로 한 짓이 맞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넌 날 죽여야 할 이유가 없는 거 같아서.”
강하게 밀고 나가는 전술이 먹혀들었는지 블루앙은 콧잔등을 잔뜩 찌푸렸다. 그 표정을 찬찬히 뜯어 살피다가 소희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미소를 띠었다.
아리아드의 고혹적인 외양과 소희의 성격이 어우러져 사람을 압도하는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난 네 마지막 대답만 듣고 여길 떠날 거니까.”
그러자 블루앙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당혹감이 잔뜩 묻은 말소리가 뚝뚝 끊겨 나갔다.
“나는, 그러니까….”
“그렇게 겁먹을 거 없어. 사실 내 궁극적인 목표는 네가 아니니까.”
소희가 손에 쥐고 있던 헝겊 주머니를 그녀의 발아래로 던졌다.
“네가 나를 도와준다면 너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게. 네 동생을 건드리는 일도 없을 거야.”
가득 차 있던 돈들이 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와 바닥을 굴렀다. 돈이 구르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블루앙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론, 거기 있는 돈도 모두 네 거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