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69화 (69/120)

Chapter 69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기 전에.”

그는 그렇게 돌아섰다. 단호한 구둣발 소리가 나무 바닥을 울렸다.

소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 차가운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닫히는 문에 그의 널찍한 등이 반쯤 가려졌을 때쯤,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미안해.”

그때 나에게는 그게 최선이었어.

변명처럼 들릴 사족은 붙이지 않았다. 그에 조슈아는 발길을 멈칫 세웠다.

떠나려는 그를 잡고 싶었지만 다가설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확인하는 것이 겁이 났다.

요즘 와서야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현실이라는걸. 또 그 현실 속에서 조슈아가 아리아드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도.

‘그냥… 난 그냥 너만 있으면 뭐가 되었든 아무 상관이 없었어.’

서글픈 언성이 생각나자 뭔가가 심장을 쥐어짜듯 아파졌다. 하지만 결국 이미 벌어진 일, 같은 선택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제라도 조슈아에게 더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게.”

그가 그걸 바란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정말 이 황성을 영영 떠나서, 똑같은 상처를 두 번 주는 일이 없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떠나려면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조슈아는 아무런 대꾸 없이 멈춰 세웠던 발걸음을 움직였다. 문이 닫히는 그 작은 틈으로 소희는 외쳤다.

“다만, 마지막으로 메리를 한 번만 만나게 해 줘!”

뒤이어 쾅, 문이 닫혔다.

소희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도움을 요청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지금 아리아드의 처지로선 메리 한 명 만나는 것도 힘든 지경이었다.

조슈아와의 대화로 어지러워졌던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침대 위에 멀뚱히 앉아 있던 소희는 한참 뒤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소희는 침대 구석 가장자리에 흐트러져 있는 옷가지를 살폈다. 조슈아의 옷으로 보이는 것과 여자의 드레스가 뒤섞여 있었다.

그 틈에서 자신이 입을 만한 옷을 집어 들었다. 전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한 분홍색 드레스였다. 옷을 펼치자 그 밑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빨간 속옷이었다.

“누구 취향인지, 참….”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므로 소희는 그것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드레스도 입었다. 둘 다 이상하리만큼 몸에 딱 들어맞았다.

옷을 다 입고 방에 배치된 전신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자 소희가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린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삐죽 튀어나왔다.

“아리아드 님!”

그 정체는 메리였다.

* * *

조슈아는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들의 관계가 엉망인 이러한 상황에서도 말이다.

소희는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미안함이 더 크게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소희는 애써 침착한 태도로 메리를 맞이했다.

메리는 잔뜩 젖어 엉망이 된 침대 시트를 갸웃거리며 의문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떠난 거냐는 재촉 없이 소희가 먼저 말문을 열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 주었다.

“미안해. 내가 그렇게 떠나서. 나 때문에 많이 곤란했지.”

드디어 말소리가 들리자 메리가 침대에 둔 눈길을 돌렸다.

“아니에요. 저한테는 진짜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아리아드 님에게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나 보다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리 말하며 메리는 해맑게 웃었다. 그 말간 미소를 보고 있자니 조슈아와의 대화로 어지러웠던 속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메리의 왼편 뺨에는 그새 본 적 없던 짙은 상처가 생겨나 있었다.

얼굴에 남은 큰 상처는 역시 숲에서 무언가 잘못돼서 생긴 상처인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소희의 미간이 설핏 좁혀 들었다.

“혹시 어제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네? 숲이요?”

“내가 잠깐 거기를 갔다가 네 비명을 들어서.”

메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이내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쳤다.

“아! 비명이 아니라 환호성이었는데. 엄청나게 큰 산딸기를 발견했거든요.”

“…뭐?”

“제가 요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어서 새콤달콤한 게 당기더라고요. 그래서 밤에 산딸기를 따러 갔는데 신기하게 사람 주먹만 한 산딸기가 있어서…. 그런데 아리아드 님은 거기 왜 계셨어요?”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뭔가 이상했는지 메리가 하던 말을 멈추고 되물었다. 그에 소희는 허탈한 마음에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야. 몰라도 돼. 건강하니 됐다.”

비명이 아니라 환호성이었다니. 심지어 소리를 지른 그 이유가 대왕 산딸기를 발견해서였다니.

물론 아무 일도 없는 것은 다행이긴 하다만, 그녀를 걱정했던 제 순간들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허무함에 피식 웃고는 소희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뺨 왼쪽에 있는 상처는 뭐 때문에 생긴 거야?”

“아, 이건…. 요즘 제 스트레스의 원인이에요. 윗분 성질이 아주 날카로우셔서 이것저것 막 집어 던지시거든요. 그러다가 깨진 유리 조각에 맞았어요.”

“윗분이라면, 켈리?”

“맞아요.”

현실로 돌아갔을 때 소설에는 적혀 있지 않던 내용이었다.

조슈아와 결혼하고 그에게 외면받아 슬퍼하는 장면은 보았는데, 소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는 훨씬 더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듯했다. 그렇게 소희가 설정해 놓은 원작의 여주 캐릭터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아리아드 님이 정말 너무 그리워요.”

그리 말하며 메리는 울상이 되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아리아드 님처럼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거든요. 왜 다들 그렇게 혈안이 되어서 아리아드 님을 욕하는지 모르겠어요. 정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갑작스레 그녀는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그에 소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와 진정하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자리에 앉은 메리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리아드 님.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메리는 행동과 속마음이 같은 아이였다. 처음 보는 아리아드에게 자신은 잘리고 싶지 않다며 잘 부탁드린다고 말할 정도로 솔직한 아이.

해맑게 웃는 얼굴로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소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졌다.

“아이는 죽었어. 누가 날 독살하려고 했거든.”

“네?”

“난 겨우 살았는데, 아이는 살지 못했어.”

아이에 관한 질문을 총 세 번 받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세 번째로 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말을 하면서도 심장 부근이 시큰거렸다.

메리는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잃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앞에서 소희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혹시 블루앙 래비라고 알아?”

“설마… 그 사람이 범인이에요?”

“사주를 받아서 움직인 거 같아.”

“그 사람을 알아요. 황태자궁에서 자주 마주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더라고요. 그렇다면 사주를 한 사람은 황태자 저하나, 비저하이실 가능성이….”

메리는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잔뜩 구겼다. 그 앞에서 소희는 제 사정을 토로했다.

“집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아는데, 지금으로선 찾아갈 방법이 없어. 내 상황이 안 좋게 많이 꼬여 있거든.”

불과 얼마 전 일을 다시 떠올리니 더욱이 막막해졌다.

같이 참석한 피어슨 가문 사람들은 아리아드와 찰스 엔드로를 엮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희는 그런 찰스 엔드로를 패고 왔으니 그 남자는 아리아드를 찾으려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을 거였다.

한마디로 모두가 아리아드를 찾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번에 무도회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그 사람들에게 잡혀 블루앙 래비를 잡을 기회가 언제 다시 생겨날지도 몰랐다.

별채에 혼자 동떨어져 있어 아무도 그녀의 행방을 모르는 이 순간이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여기서 나갈 만한 마땅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황성을 조용히 빠져나갈 좋은 방법이 어디 없을까.”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자 메리는 그 앞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얼마 뒤에 소희의 두 팔을 덥석 잡았다.

“제가 오늘 얼굴에 있는 상처를 치료받으려고 황성 앞까지 가는 마차를 불러 놨거든요. 일단 저 대신 그걸 타고 황성 밖으로 나가세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여기는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안에 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면 네 상처 치료는 어쩌고?”

“그거야 다른 쉬는 날에 하면 되죠! 혹시 모르니 저랑 옷을 다 바꿔 입고 가세요.”

시원스럽게 대답한 메리가 벌떡 일어나 사용인이 입는 유니폼을 벗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같이 일어난 소희도 드레스를 벗었다.

서로 옷을 주고받으며 소희는 메리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발견했다. 가운데 박힌 진주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데온과 연락이 닿도록 도와준 메리에게 소희가 감사의 인사로 건넨 선물이었다.

“내가 준 목걸이를 아직도 차고 다니네?”

“당연하죠. 아리아드 님이 주신 건데요. 그때 목걸이 선물은 처음 받아 본 거라 정말 감동했잖아요.”

메리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다시 한번 감격한 듯 두 손을 꽉 쥐고 눈이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다가 소희는 불현듯 든 생각에 웃음을 멈췄다. 펜던트를 이용한 좋은 계획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메리, 줬다가 뺏는 거 같아서 미안한데…. 그 목걸이 잠시만 빌릴 수 있을까? 나중에 배로 갚을게.”

고개를 갸웃거린 메리는 옷을 훌러덩 벗었을 때처럼 제 목에 걸린 목걸이도 선뜻 풀어 건넸다. 조심스럽게 물어본 소희의 태도가 민망할 정도로 시원스러운 모양새였다.

“당연하죠. 원래 아리아드 님 물건이었잖아요.”

그리 말한 뒤 메리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려 줄 챙이 너른 모자를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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