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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67화 (67/120)

Chapter 67

까만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소희의 눈 위에 뚝 떨어졌다. 그에 눈꺼풀을 내렸다가 올렸을 때도 조슈아의 표정은 여전했다.

서늘하고, 날카롭고, 때론 무정했던, 그런 평소와 같은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낯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그 어느 때보다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이토록 분노에 찬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는 소희를 내려 보며 입술을 뗐다.

“뭐 하는 짓이야.”

목울대를 긁고 나온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소희는 그 앞에서 힘없는 눈만 천천히 깜빡일 뿐 쉬이 대꾸하지 못했다.

저 분노 어린 목소리를 잠재울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 자신을 구해 준 이가 조슈아라는 사실에 당황한 것도 이렇게 얼이 빠진 것에 한몫했다.

입술을 꿋꿋이 다물고 있자 조슈아의 언성이 점차 높아졌다.

“왜. 또 외로워서 자살 시도를 했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게?”

“….”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소희의 물 먹은 달팽이관이 윙윙 울렸다.

그는 젖어서 축 늘어진 정장 재킷을 거칠게 벗어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슈아는 일어선 채로 소희를 내려 봤다. 그 장신의 키만큼 거리는 멀어졌으나 좁혀진 미간은 또렷하게 보였다.

이어지는 말은 전보다 조금 차분했다.

“죽을 거면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가서 죽어.”

가시 박힌 목소리가 낮고 스산하게 울렸다.

소희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올려 그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힘없이 대답했다.

“…안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네가 찾아왔잖아.”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 너머로 조슈아의 모습이 일렁거렸다. 위에서 소희를 내려다보는 성난 얼굴의 목 부근에는 핏대가 솟아 있었다.

“궁 밖으로 나가서 죽어.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죽든 말든 알아서 해.”

“…알겠어.”

그것이 절대 진심은 아니었지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언쟁을 빠르게 마무리 짓고자 했다. 조슈아의 사나운 말소리가 물 먹은 달팽이관을 울려 뇌를 긁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다시 신경질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뭐?”

조슈아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 지금 알겠다고 그랬어?”

더욱 날카로워진 어조에 소희는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어째 성실히 답을 해 주면 해 줄수록 제 말이 그의 신경을 제대로 긁고 있는 듯했다.

그는 잔뜩 젖어 가라앉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물방울이 맺혀 있던 얼굴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깊은 한숨과 함께 메마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체 어디 가서 죽게?”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라며…. 알려 줘?”

힘없이 늘어진 대꾸에 조슈아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손등 위로 뼈마디가 하얗게 툭 불거졌다. 그곳에 그의 깊은 짜증이 묻어 있었다.

이내 조슈아는 한쪽 입꼬리를 삐쭉 올렸다.

“그래, 아리아드. 그냥 영영 사라져 버려.”

바닥에 던져둔 재킷을 집어 든 그가 그대로 돌아섰다. 새까만 구둣발이 소희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소희는 점차 희미해지는 발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잔디 위에 여전히 몸을 대자로 뻗은 채였다.

전신에 기운이 쭉 빠져서 손끝 하나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몇 분이 흘렀다.

새소리가 끊임없이 주변을 맴돌았다. 그 속에서 조슈아의 발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얕은 바람이 불어와 기다란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느른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푸른 하늘 위로 둥둥 떠다니는 하얀 구름들이 보였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하늘에 무의미한 시선을 두고 있을 때였다.

그대로 사라진 줄 알았던 발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에 자연스럽게 소희의 고개가 돌아갔다.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구두코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착각하지 마. 너 예뻐서 도와주는 거 아니니까.”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소희는 그 어떤 말도 덧붙인 적이 없었지만, 조슈아는 먼저 제 행동에 대한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놨다.

“내 공간에 드러누워 있는 꼴이 짜증 나서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슈아는 소희의 축 처진 몸을 들어 올렸다. 물 먹은 거대한 드레스 덕에 무게가 꽤 나갈 텐데도 그는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호숫가 앞쪽에 있는 별채로 발길을 움직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향기가 코끝까지 들어찼다.

예전 이곳에 처음 왔던 날의 기억이 눈을 감고 있는 소희의 앞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 품에 안겨서 별채로 온 건 예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조슈아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 침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섰다.

한쪽 팔로 소희를 안아 든 남자는 다른 손으로 욕조에 물을 받았다. 물이 채워지는 소리에 소희가 힐끗 한쪽 눈을 떴을 때였다.

“물놀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여기서 실컷 해.”

위에서 내려다보던 냉담한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두 시선이 빠르게 어긋났다. 조슈아가 욕조 위로 소희를 던졌기 때문이다.

풍덩, 그녀의 몸이 또 한 번 물속으로 빠졌다. 다행스럽게도 욕조에 물이 어느 정도 채워져 있어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뒤이어 곧바로 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수면 위로 드레스가 부풀어 올라 있었고, 떨어지며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얼굴을 뒤덮었다. 소희는 힘이 실리지 않는 팔을 겨우 들어 눈가를 닦았다.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온도는 참 적당했다. 소희는 몸을 늘어트린 채로 욕조 벽면에 머리를 툭 기댔다.

천장에 매킨리 황실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게 보였다. 그 위로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조슈아의 표정, 그 처음 보는 표정들.

뜨거운 수증기 때문인지 갑작스레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소희는 숨을 한껏 들이쉬고는 천천히 내뱉었다. 그러자 비로소 조금이나마 호흡이 수월해졌다.

그의 품에 안겨서 별채로 온 건 예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는데.

그제야 소희는 이미 많이 바뀌어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체감했다.

* * *

메이컨이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저하, 다들 찾으시는데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방문이 열리고 조슈아의 모습이 드러나자 그는 주름진 눈매를 설핏 구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고, 하얀 와이셔츠가 그의 몸에 딱 달라붙어 탄탄한 윤곽이 훤히 드러났다.

“왜 이렇게 흠뻑 젖으셔서….”

그에 대한 대꾸 없이 조슈아는 메이컨의 손에 들린 옷가지를 빠르게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한테는 급한 업무가 생겼다고 전해 주세요.”

메이컨이 뭐라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그는 빠르게 다시 문을 닫았다.

조슈아는 침대 위로 옷가지들을 내던졌다. 그리고 욕실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삼십 분. 소희가 욕실에 들어간 지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나 있었다. 그런데 안쪽에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슈아가 그 앞을 천천히 서성이기 시작한 것도 삼십 분째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젖은 발자국이 나무 바닥에 새겨졌다가 마르길 반복했다.

그는 말라서 쭈글쭈글해진 옷깃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다시 그 문 앞을 서성대길 시작했다.

욕실 안에서는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너무나도 조용했다.

대체 무엇을 하는 건지.

오가는 반복적인 동작이 전보다 빨라졌다. 그 발걸음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십 분만 더 기다려야지 다짐했던 것과 다르게 그의 인내심은 빠르게 고갈됐다. 결국 조슈아는 욕실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뜨거운 수증기가 몸을 덮치고 하얀 연기 사이로 아리아드가 보였다.

그녀는 욕조에서 나와 우뚝 서 있었다. 그 밑으로 구겨진 드레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한 손에는 속옷을 들고 있었다.

그래, 하필이면 옷을 벗고 있는 도중이었다.

사실 이미 나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다고 할 만한 건 고작해야 손에 들린 속옷이 다였으니.

“아….”

외마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놓쳤다. 널브러진 드레스 위로 속옷이 툭 떨어졌다.

둘 다 눈을 마주한 채 동공을 잘게 떨었다.

이내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조슈아였다. 그는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쾅, 전보다 매서워진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조슈아는 문 앞에 멀뚱히 서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건지 본인조차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트리고 벽면에 몸을 기댔다. 축축한 셔츠의 밑부분이 벽면에 들러붙었다.

삐딱하게 기대선 채로 그는 눈가에 팔을 얹었다.

지금 이 몰골만큼이나 속도 엉망이었다. 비이성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제 몸은 멋대로 움직였다. 이젠 자신이 뭘 원하고 왜 이러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리아드를 떠나보내고 나름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일상에 색채가 사라진 듯 무미건조했어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조슈아는 몇 개월이 지나고 그 말을 신뢰했다. 이제 더는 그 여자가 없어도 괜찮을 거 같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난데없이 아리아드가 나타났고, 모든 것이 뒤집혔다. 나름 그 상태로 잘 유지되고 있던 생활의 패턴들이, 또 애써 잠재웠던 마음들이.

이성의 끈이 이리저리 뒤엉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만들어졌다.

무도회장에서 오랜만에 아리아드의 얼굴을 보았을 때, 뇌의 통제를 벗어난 다리가 그녀의 앞으로 가기 위해 반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켈리의 말은 변명할 여지도 없이 속을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제가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아리아드 님한테 가서 사랑 고백이라도 하려던 모양새였는데. 제 말이 틀렸나요?’

그래, 쌓아 놓은 반년간에 노력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순간이었다.

아리아드, 그까짓 존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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