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속 여주는 내가 할거야-66화 (66/120)

Chapter 66

브릭스는 요즘 모든 일상에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흘려보내던 지난날들이 아득했다. 그땐 그게 뭐가 그리 재밌었던 건지.

마시고 있는 술도, 알록달록한 디저트도, 또 형식적으로 오가는 대화도 모두 다 무미건조했다.

브릭스는 주황빛 조명 아래 유영하는 먼지들을 무의미하게 훑고 있었다. 그러다 그 시선 끝에 걸린 남녀를 바라보고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렸다.

둘 다 웃고 있었다. 가면을 쓴 겉치레라도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문득, 연주 소리와 함께 울리는 사람들의 언성이 귓전을 후벼 대며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더불어 이 모든 것에 지독한 권태가 섞여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끔씩 그를 잡는 손길이 있었지만 가벼운 인사와 함께 스쳐 지났다. 무도회장을 걸어 나오는 그 일련의 과정이 짧게 압축되어 흘러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하늘의 색을 고스란히 담은 호수가 두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브릭스는 그 앞에 대충 주저앉았다. 갖춰 입은 하얀 정복이 흙바닥에 더럽혀져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인생 더럽게 재미없네.”

금빛 눈동자가 호수 안에 갇힌 구름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적하기만 하던 공간에서 갑작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눈길을 돌린 브릭스는 다소 황당한 광경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주변 모든 색깔을 앗아간 듯 독보적으로 빛나는 여인이 보랏빛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그에 맞춰 화려한 드레스가 물결쳤다.

아리아드 피어슨. 그 여자의 주변으로 흥미로운 기운이 흘렀다.

“뭐 하세요?”

“깜짝이야.”

뒤돌아본 여자는 매우 놀란 듯 화등잔처럼 눈이 커다래져 있었다. 그 와중에 그녀는 성실하게 답도 해 주었다.

“아, 준비 운동이요.”

“무슨 준비요?”

“뛰어내릴 준비요. 제가 물놀이를 좋아해서.”

이 호수에서 물놀이라.

웃고 있는 아리아드를 바라보다가 그 뒤편에 커다란 호수를 곁눈질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친 짓으로 정의 내렸을 일을, 아리아드 이 여자가 한다니 나름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브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이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상당히 재밌는 분이었네. 그럼 마음껏 즐기세요.”

곧이어 브릭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아리아드의 다리가 힘차게 움직였다.

풍덩, 그 소리와 함께 밋밋하던 브릭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 위를 휘젓는 아리아드의 두 팔이 쾌활했다. 저 미친 짓에 합류하고 싶을 만큼 즐거워 보였다.

“재밌네.”

권태롭던 회색빛 일상에 점차 색감이 더해졌다. 그 와중에 무도회장에서 단연 돋보였던 남녀가 떠오르자 그의 만면에 미소가 퍼졌다.

“나도 잔잔한 호수에 돌 좀 던져 볼까.”

브릭스는 몸을 돌렸다. 철벅거리는 경쾌한 물소리를 배경 삼아 그의 발길은 다시 무도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금빛 동공은 즐거움을 공유할 상대를 찾아 나섰다. 이내 그는 구석 자리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조슈아를 발견했다.

술잔을 든 타이밍에 맞춰 브릭스는 그와 잔을 맞추었다. 유리잔의 맑은 소리와 함께 조슈아의 고개가 들렸다.

가면을 쓰지 않은 낯이 무심해 보였다. 브릭스는 자신을 훑는 그 시선에서 저보다 더한 권태로움을 읽었다.

아리아드라는 돌이 지독하게 고요한 조슈아라는 호수의 수면 위로 어떤 파장을 일으키려나. 브릭스가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입을 뗐다.

“나, 방금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네 전 부인을 만났다?”

조슈아는 곧장 눈을 피해 이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였다.

“엄청 재밌는 이야기인데 궁금하지 않아?”

“별로.”

짤막한 대꾸와 함께 그는 다리를 꼬고 샴페인을 들이켰다. 브릭스는 그 얼굴을 위에서 찬찬히 뜯어 살폈다.

그새 마음이 완전히 떠난 걸까. 그렇다면 흥이 식어 버리는데.

브릭스는 조용히 입맛을 다시고는 말을 이었다.

“방금 호숫가에서 만났거든. 갑자기 몸을 막 부산스럽게 움직이길래 뭐 하냐고 물었더니 준비 운동을 한대.”

“….”

“뛰어내릴 준비.”

금빛 눈동자가 여전히 조슈아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조슈아는 입술에서 유리잔을 천천히 떼어 냈다. 얼굴은 여전히 그럴듯한 변화 없이 무심한 낯이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막 호수로 달려 들어가는데….”

그때였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에 브릭스의 말이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조슈아가 들고 있던 유리잔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브릭스는 유리 파편들을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반대로 유리 조각을 거침없이 밟은 조슈아가 그의 앞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목만 남겨 놓고 그렇게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브릭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이 떠나긴 무슨.

와 닿는 여러 시선 가운데 브릭스는 바라던 눈동자를 찾아냈다. 커다래진 켈리의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채였다.

이내 혈류가 활기를 찾은 듯 차갑던 전신에 뜨거운 감각이 퍼졌다.

“역시 재밌어.”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 올라갔다.

* * *

소희는 죽기 전 끔찍한 감각을 기억하며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막상 물속에 들어오니 강한 공포감에 휩싸였었다. 소설 밖으로 나가고자 자신이 시도해 놓고도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팔과 다리를 열심히 휘적거렸다.

하지만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드레스는 물에 젖어 무거워졌고, 수영도 못하는 몸이 수면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내 얼굴마저 잠겼을 때 소희는 그제야 깨달았다.

두 번 다시 이딴 미친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참고 있던 호흡에 힘이 풀리며 기도로 물이 흡인되었다. 그 익숙지 않은 고통과 함께 소희는 정신을 서서히 놓았다.

그 끔찍한 마지막 감각이 잊히질 않자 소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떨쳐 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애써 정신을 다잡고 마우스 휠을 움직였다.

최근 풀린 회차를 빠르게 훑던 눈동자가 원하던 내용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또 블루앙 래비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나가요.”

“…네?”

“그 돈을 들고 최대한 빨리 라트베아에서 떠나요. 아리아드 눈에 띄지 않게 당장 떠나라고요!”

격분에 찬 켈리의 목소리에 블루앙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의 시종이었던 자신이 왜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됐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심지어 제대로 된 귀족도 아닌 이에게 꾸짖음을 듣다니!

방을 빠져나가며 치켜뜬 다갈색 눈동자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문이 닫히자 블루앙은 중얼거렸다.

“라트베아를 떠나라고? 이까짓 푼돈을 쥐여 줘 놓고 떠나긴 어딜 떠나.”

손에 들린 주머니의 무게만 봐도 돈이 어느 정도 들었는지 가늠되었다.

물가가 비싼 라트베아에 자리 잡기 위해 평생을 고생해서 빈민촌에라도 집을 얻었다. 그나마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라트베아 대도시의 풍족한 일자리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적은 돈으로 마련해 놓은 살림살이를 다 버리고 떠나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블루앙은 켈리의 명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아리아드가 살아났다고 해도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또한 일말의 증거조차 남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자신은 라트베아의 로포아 동네를 떠날 이유가 없었다.

블루앙은 궁전 밖으로 걸어 나가며 켈리의 성난 언성을 떠올리고는 콧방귀를 꼈다.]

소희는 그 내용을 다 읽고는 중얼거렸다.

“…역시 켈리였어.”

라트베아의 빈민촌, 로포아 동네. 심지어 내용에 정확히 원하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라트베아는 황성이 자리한 만큼 커다란 도시였지만 정확한 동네 이름까지 알아냈으니 이제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소희는 다시 빠르게 빙의하기 위해 모니터 옆에 놓인 수면제를 집어삼켰다. 물을 들이켜 젖은 입가를 팔소매로 닦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진짜 가만 안 둬.”

눈꺼풀이 감기며 분노로 일렁이던 까만 눈동자가 사라졌다.

* * *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정신을 차렸는데도 여전히 물속이었다.

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무거워진 드레스는 족쇄가 되어 소희를 더 밑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버둥거릴수록 몸이 가라앉는 듯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당연히 익사의 위기에서 아리아드의 몸을 건져 주리라 생각했던 연금발의 남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숨을 참지 못하고 뱉어 내자 입 주변으로 작은 물거품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어룽거리던 시야가 더욱 흐려졌다. 곧 다시 이렇게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호흡이 느려지고 얼굴 주변으로 올라오던 거품들이 점차 잦아들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소희 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인영이 아른거렸다. 물속이 투명하여 그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였다.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집요하게 소희만 직시하는 붉은색 눈동자. 혼몽한 와중에 헤엄쳐 다가오는 사람이 누군지 소희는 곧바로 알았다. 저렇게 생긴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으니까.

조슈아가 손을 뻗어 소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끊임없이 가라앉던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소희의 눈앞이 깜깜해졌을 때쯤, 그들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조슈아가 호숫가에 그녀의 몸을 눕혔다. 그러자 기도에 차 있던 물이 끊임없이 올라와 소희는 콜록거리길 반복했다. 끝나지 않을 거 같은 잔기침이 잦아들고 점차 정신이 들었다.

시야가 선명해지자 조슈아의 얼굴이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 위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잔뜩 일그러진 만면이 놓여 있었다.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불꽃이 타오르는 듯 넘실거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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